바다의 얼굴 사랑의 얼굴
김얀 지음 / 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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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창 너머 바다를 보며 "참 아름답지요?"라고 물어오면, 나는 이내 잊고 기억이 떠올라 울상이 되고 만다. 누군가 내게 사랑에 관해 물어온다 해도 나는 역시 같은 표정일 것이다. (p. 15)

 

같은 대상이어도 각자의 스토리가 묻어 나온다. 나에게 바다는 위로인데 그녀에게 바다는 울상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어릴 적 자랐던 바닷가 마을, 미조리로부터 시작된 기억은 'ㄷ'이라는 남자와 사랑으로 이어지기까지 '기억'과 '환경'이 주는 힘이란 실로 대단함을 느꼈다. 짭조름한 비린내가 가득 찬 동네에서 친구오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을 때, 혼자였던 아이가 있었고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제 커 버린 그녀가 다시 방문한 곳에는 기억 속의 생생한 자리는 없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유년기를 정말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은 결국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p. 22)

 

유년기의 삶이란 '나의 삶'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외부에 의해 쌓아올려진다. 사랑을 믿지 않는 건 당연한 순서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된다. 미세한 틈 속에서 기대고 싶은 싹이 핀다. 결국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가 진한 사랑으로 마음앓이를 하기까지는 미조리로부터 이어진 질긴 파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일로 끝이 난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아니 잊었기에 현재의 웃음을 보인다. 과거는 미약한 힘을 '바뀌지 않는다'에게 불어넣고 있다면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에 걸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보았던 수많은 풍경들은 눈물 머금은 흐릿함이기도, 울고 난 뒤의 맑음이기도 했다.

 

'ㄷ'와의 사랑도 며칠 신다다가 사라질 신기루일 줄 알았지만 그녀와 'ㄷ'은 난생 처음 진한 감정에 어찌할 줄 모르고 보고 싶어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인다. 처음 느껴본 '진짜 사랑'이란 감정은 타인의 삶이 나로 인해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옷 위로 흩뿌져진 눈물들은 그녀의 밑거름이 되었을까, 다시 누군가를 믿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뭐. 그래. 힘들었다기보단 어려웠던 거지. 낯선 동네. 처음 해보는 배 사업.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딸들. 모든 것들이 나한테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인생이란 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어렵거든." (p. 202)

 

엄마와 함꼐 다시 찾은 미조리에서 그녀는 "다시 이곳에 와보니 기분이 어떻냐"라고 엄마께 묻는다. 그러자 엄마는 '힘들었다'를 '어려웠다'로 바꿔 말한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평온했다고 하니 이제 그 누구에게도 미조리는 더 이상 현재의 삶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니의 아이에게 재롱을 떨고 예뻐해주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마치 그때를 잊은 것처럼.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산 같단 생각이 든다. 그 산을 기어코 넘어버린 그녀와 가족들처럼 나도 등에 짊어진 그 산을 넘어버리고 훌훌 털어낼 수 있을까. 사랑을 느낀 그녀처럼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여러 물음을 던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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