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지음 / 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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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의 따사로움을 느낀 적은 언제일까? 대부분의 시간을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터라 날씨의 변화무쌍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 오후는 점심 식사 후, 몰려오는 잠과 투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커피를 입에 붓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하기에 힘겨운 시간이다. 하지만 장석주 시인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오후는 짧아진 그림자를 응시하며 드리워진 끝을 사색하고 근심, 걱정은 내려놓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고 느끼는 시간이다.

 

인생의 오후에 당도한 그가 전하는 삶의 태도는 여름과 가을 그 사이 어디쯤을 산책하는 듯하다. 그가 전하는 삶의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지나온 인생에 대한 소회 등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기운이 어쩔 수 없이 묻어 나올 법도 한데 이를 배제한 채 아름다운 면을 다룬다. 매 장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말을 한 줄씩 적어놓아 가만히 혼자 하고 싶은 건 역시 글쓰기와 책 읽기라 말한다.

 

나도 가만히 혼자 보내는 오후를 좋아한다. 저녁잠이 늦고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오후는 주말과 같다. 사람들과 부대낄 수밖에 없는 일상의 오후는 후회와 상념으로 가득한데 주말의 오후는 나른함과 싸우지 않고 진득하게 몸에 배도록 느끼는 시간이니까. 그가 가을 안쪽에 접어들었을 때 환한 웃음을 지었던 것처럼 나도 모처럼 느낄 수 있는 여유 속에서 기분 좋은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으니까.

 

가을이 저 안쪽에서부터 깊어진다. 바람이 분다. 아아, 다시 살아봐야겠다! 가을 오후, 마음의 근심들을 내려놓고 책을 읽다 혼자 웃는다. 얼굴이 환해지고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무르익은 석류 열매가 터지고 야산 언덕에 구절초가 흐드러진 이 계절이 좋다. 가을밤은 일찍 오고, 창가에 등불을 밝힌 채 귀뚜라미 우는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을 때, 아아, 이 가을, 내가 살아 있음이 미칠 만큼 좋다. (p. 67)

 

그에게 산책은 오후를 만끽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탁한 공기에 두통이 밀려온다면, 갑자기 밀려오는 힘겨운 생각들에 버겁기만 한다면 햇살이 도움이 된다. 햇살이 건네주는 위로는 따스하고 넓은 포용력을 갖는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큰 존재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신선한 공기, 빛, 물, 건강, 약간의 책들, 음악, 고요, 몇 벌의 옷, 물이 새지 않는 신발, 벗들! 행복을 위한 목록에 적힌 것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이다. (p. 29)

 

햇볕은 우울한 기분을 걷어내고 화창하게 만든다. 우리 기분은 더 유쾌해지고, 감정은 확실히 겨울보다 낙관적인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것은 봄날 햇볕이 일으키는 기적이다. (p.29)

 

창가 바 테이블에 앉아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싶다. 아직 그에 비해 출발점에 서 있는 나는 쉽게 조급해지고, 자주 출렁인다. 새벽 동이 트는 시간이 곧 쏜살같이 오후로 달려가겠지만, 오후의 내가 새벽의 나를 바라보면 그건 별거 아니었다라 하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아직 덜 여물었기에 얻는 상처와 아픔이라고 그때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가 길어올린 문장들처럼 거대한 장서 속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이렇게나마 계속 끌어올리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인생의 큰 줄기는 이랬으면 한다.

 

인생이 한 줄기 강물이라면, 누구나 작고 소란스러운 급류 같은 소년기를 보내고, 온갖 소용돌이들에 휘말려 전전긍긍하던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깊고 넓은 하류에 닿는다. 내 앞에 넓고 따스한 불멸의 바다가 가까이에 와 있다. 이미 내 삶의 윤곽과 형태는 바꿀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배움과 성장을 끝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취향을 세련되게 하며, 아상의 참모습과 만남으로 아끈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풍요한 삶을 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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