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 - 500days in Ireland
김민수 지음 / 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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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이 날리던 오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읽은 이 책은 감동을 주었다. 민수와 올리버의 500일의 우정 이야기는 진심으로 가득 차서 눈물샘을 자극했다. 아일랜드와 한국까지의 거리만큼 멀었던 둘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졌던 건, 같이의 가치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이 지배했던 머릿속은 이제 네가 아니면 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한 번 외국에 나가 보고 싶다는 마음에 아일랜드의 한 ‘장애인 공동체’에서 생활을 시작한 민수. 그의 첫 시작은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었지만, 올리버를 만나고서부터 주고받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 결과로 이어진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 올리버는 간혹 간질발작도 일으켜 잠잘 때 숨 쉬는 소리조차 주의해야 하는 친구다. 그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달려가야 하고, 응급처치를 하고, 그의 일상을 나의 일상처럼 소중히 다뤄야 한다.

 

이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올리버가 민수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일부러 못되게 굴고, 틱틱되며 민수를 난감하게 만든 올리버의 행동은 그동안 떠나간 봉사자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올리버에겐 역시 예정된 이별을 꼬리표처럼 달고 온 민수에게 마음을 내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민수에게 마음을 연 것은 한 번 더 빤히 보이는 결말을 받아들이겠단 표시였다.

 

 

내 곁을 지켜주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이 들면, 다시 속아보자는 생각에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할 테지만 쉽게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을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이 상황을. 언젠가 이별이 다가오는 상황을 알면서도 나의 곁을 지켜주는 새로운 봉사자와 새로운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겐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는 다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p. 103)

 

 

친해진 후로, 둘은 티격태격 형제처럼 생활한다. 서로의 마음을 여전히 모르겠는 하루도, 잘 해준 것 같은데 알아봐 주지 않는 것 같아 느끼는 서운한 감정도, 나의 실수로 위험한 상황에 빠트린 것 같아 눈물이 나는 미안한 마음은 벽을 허물게 만들었다. 나를 네가, 내가 너를 치유하는 마법을 본다. 올리버가 배를 쓰다듬어 줄 때, 민수가 느꼈던 어지러운 심경을 나도 알 것만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를 쓰다듬는 건 미안하다는 우리끼리의 수화이거든요.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나도 미안해, 하며 안아주고는 불을 끄고 방을 급하게 나와 문 앞에 서서 엉엉 울어버렸어요. 나를 알아주던 친구가 참 고마웠고 감정을 들켜버린 제가 부끄러웠어요. 당신을 도와주려 애쓰는 사람은 나인데 정작 언제나 치유받고 돌아서는 사람은 저였던 거예요. 너는 내게 기적 같은 매일을 선물해주고 살아가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구나. 너는 나를 그렇게나 이해할 수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었구나.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던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올리버의 손짓이 눈에 아른거려 오던 잠도 달아나버린 그런 날이었어요. (p. 91)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관대해지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생활해도 강요하는 이도, 명령하는 이도 없는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선을 지키고, 사람을 대한다. 스트레스가 있어도 부정적인 발화로 이어지지 않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과 끊임없는 소통으로 해결된다. 새 언어를 배우면서 부정 표현이 없었다는 건,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행복의 증거는 내게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했던 나는 주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끝내 ‘원망’ ‘절망’ ‘이기’ ‘복수’ ‘질타’ 같은 단어들을 들은 기억은 없다. (p. 47)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민수가 걱정했던 건 올리버의 감정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할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만큼 아픔을 줄 수 없어서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그는 다시 아일랜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끊어 올리버에게 간다. 올리버가 그를 알아보고 안아줄 때 나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여전히 너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세상은 늘 정직함이 최선인데 그것이 쉽지는 않아서 그럴 때면 주변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고, 나의 오기들은 그렇게 용기로 변해갔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의 용기라는 것이 특별히 대담하거나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조금 덜 생각하고 옳은 것에 대해 실천으로 옮기는 하나의 움직임일 뿐 사실 모두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p. 190)

 

 

그는 평범한 사람에서 수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만이 대담함이 아니라 결심한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용기이며, 하나씩 다짐을 깨 나갈수록 겁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갈 수 있는 용기 속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고, 국경과 나이, 거리를 초월한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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