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타닉>은 이번까지 포함해 아홉 번을 본 영화다.
이처럼 여러 번을 본 영화는 많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찾게 되는 영화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내가 타이타닉에서 높게 평가하는 부분 중 하나는 작품 속 뛰어난 고증이다.
계급에 따른 복장의 다양성, 선실 내부의 가구와 장식들, 노동자층과 상류층의 대비되는 놀이와 예절 등.
타이타닉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1912년 영국 사회와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다시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1912년 사우스햄튼을 출발하여 미국 뉴욕을 향하던 타이타닉은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였다.
'신조차도 이 배는 침몰시킬 수 없다'고 요란하게 떠들던 배가, 그것도 첫 항해에서 허무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두 남녀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사이에 녹여내어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감독의 역량에 엄지를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제는 재난과 로맨스이지만 외피를 살짝 벗겨보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상업 영화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세기의 영화를 꼽는다면 <타이타닉>은 반드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할 위대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우선 미장센이 너무나 훌륭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뛰어난 고증은 물론이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현장감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과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CG를 최소한으로 사용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실제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촬영했다고 알고 있는데, 만약 대부분의 장면을 CG로 처리했다면
지금쯤 어색하고 초라한 화면들을 보며 실망했을 것이다.
타이타닉의 미장센은 현재 나오는 그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음악 역시 미장센에 견줄 만큼 훌륭하다. 이 영화의 주제곡인 'My Heart Will Go On'은 당시
대히트를 쳤다.
199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음반이었으며, TV 채널을 돌리면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던 노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곡보다 특정 장면에서 적절하게 쓰인 다른 곡들이 더 마음에 든다.
Never An Absolution - 출렁이는 깊은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메인 타이틀에서 흐르는 곡이다.
이 장면은 슬프지만 낭만이 깃든 영화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타이타닉과 함께 잠든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떠오르게 만드는 곡이며, 몇 번을 보아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Southampton - 꿈과 희망을 싣고 미국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는 타이타닉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다.
배가 출항할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갑판에서 손을 흔드는 잭의 모습은 볼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든다.
배의 선수에서 돌고래를 구경하다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나까지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Rose -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지속된 설득에 잭을 밀어내던 로즈는, 어느 순간 그를
찾아와 "마음을 바꿨어요."라며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이때 흘러나오는 'Rose'는 노을 진 바다의 풍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장면이다.
Unable To Stay, Unwilling To Leave - 마지막 구명보트 자리에 혼자 타기를 거부하던 로즈에게,
잭의 자리도 마련해 뒀다는 하클리의 거짓말에 잭도 맞장구를 친다.
둘은 처음으로 같은 마음으로 뭉쳤지만, 실은 하클리의 자리만 남은 상황이다.
내려가는 로즈를 바라보며 계약 같은 건 없었냐고 묻는 잭에게, 하클리는 자신의 자리만 있다며 내가 이겼다고 조롱하듯 말한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로즈는 문득 깨달은 듯 배에서 뛰어내린다. 두 사람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이 감동적인 장면에서 흐르는 구슬픈 멜로디는 몰입감을 한층 더 높여준다.
연출 또한 완벽에 가깝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지지 않고
흥미롭게 이어지는 흐름이 좋다.
잭이 도박으로 배표를 따내고 시간에 쫓기듯 탑승하기까지의 신나는 순간.
배의 하층부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일꾼들과 거대한 증기 기관의 웅장함.
상류층의 식사 장면과 대비되는 노동자들의 가식 없는 흥겨운 놀이 장면.
로즈와 약혼자의 갈등, 전직 탐정을 연상케 하는 칼의 심복 러브조이와의 추격전.
배가 빙산과 충돌하고 침몰하기까지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지루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아홉 번이나 보게 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연출보다도
'잭 도슨'이라는 인물에 있다.
꼭 주인공이라서, 혹은 외모가 출중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의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 좋다.
이러한 면은 하클리가 기를 죽이려고 의도한 식사 초대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긴장될 법한 자리지만 짐짓 당당하게 행동하며 이런 말을 한다.
"더욱 행복한 것은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하며, 누굴 만날지도 모르고 어딜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어젯밤에는 선교 밑에서 자다가 지금은 세계 최고의 배에서 여러분과 샴페인을 들고
있습니다. (...)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됩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클리와 장모가 한 팀이 되어 망신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하며
"순간을 소중히"라는 건배사까지 이끌어내는 모습이 멋지다.
그는 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 판매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이지만, 세상에 불평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의 긍정성을 찾아내며 행복을 느낀다.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삶의 자세 아닌가.
나 역시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이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에서 곤충이나 동물로 태어날 확률을 뚫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은 또 얼마나 운이 좋은가.
외모나 빈부 격차는 아무 상관 없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종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런 생각들이 잭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다른 영화의 인물들보다 더 큰 호감을 갖게 된 듯싶다.
그의 인생이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해, 나도 이런 삶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로즈는 시대적 관습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상류층의 위선적인 예절과 청첩장만 5백 장이라는 정략결혼은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든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배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마침 근처에 있던 잭이 발견한다.
설득 끝에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긴 두 사람은 항구에 도착하면 함께 떠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카메라는 나이 든 로즈의 잠든 모습과 함께 액자 속 사진들을 비춘다.
말타기, 비행기 조종, 자동차 운전, 바다낚시 등, 사진들은 그녀가 시대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백 년을 살며 잭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잠들기 전 로즈가 바다에 '대양의 심장'이라는 목걸이를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주었던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게 타이타닉과 잭에게 진정한 작별을 고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목걸이는 오래전 타이타닉과 함께 가라앉았어야 할 물건이므로, 미련 없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타이타닉의 침몰과 두 남녀의 로맨스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영화는 '인생을 주변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 하나 나온다. 스스로를 '왕족'이라 칭하던 갑부
하클리가 훗날 파산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계급적 선민의식에 휩싸여 있던 그도 대공황이라는 예측 못한 경제적 재난 앞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앞서 잭이 말한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와 일치하는 상황이며,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로즈가 관습에 순응하고 돈을 택해 하클리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와 함께 몰락하여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항상 자신이 이긴다며 자만하던 하클리는 졌고, 주체적인 삶을 택한 로즈는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