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식후 20~30분쯤 제자리 걷기와 종아리 운동을 한다. 
그냥 하기에는 지루하여 영화를 보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며칠이면 영화 한 편 뚝딱이다. 
그동안 영상물은 보기만 했지 감상을 글로는 써보지 않았다. 
이제 글쓰기 연습도 할 겸 내 감정의 기억을 남겨보려 한다. 
그 첫 번째 기록은 영화 『오아시스』다.


홍종두는 전과 3범으로 이제 막 출소했다. 교통사고 과실치사로 복역 중에 가족들은 찾아오지도 않고 말도 없이 이사갔다. 
가족들은 그를 싫어하는 눈치다. 특히 형수는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낸다.
종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사회성을 보여준다. 
형이 알선해준 중국집 배달 면접에서 사장이 말을 하는데 중간에 끊고 자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권하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일로 미룬다.
보다못해 옆에 있던 형이 야단을 친다.  일을 할 때도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배달을 간 장소에서 사람들이 고스톱 치는 걸 구경하다 가게 문이 닫히자, 도로를 질주하며 신나게 순간을 즐긴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눈치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인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이 있던 건지, 종두는 일이 끝나면 피해자의 집으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간다. 
거기서 한공주를 보게 된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돌봐주는 사람은 없다. 
거울에 반사된 빛을 동물로 상상한다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는 게 전부다.
그 허름한 집에는 그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은 종두.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만다. 
그는 여자와 손도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여자의 발을 처음 본다며 신기한 듯 자신의 발을 대보는 장면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이 대목은 인간 관계의 고립과 외로움이 어떻게 양면성을 나타내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옆집 부부가 한공주의 집으로 들어와 성행위를 한다. 
여자는 자신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공주를 의식하지만, 남자는 괜찮다고 말하며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들에게 공주는 사람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짐승인 것인가? 
공주는 문을 닫고 힘겹게 립스틱을 바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녀도 감정이 있는 사람임을 감독은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러다 갑자기 공주의 오빠가 찾아온다. 어딘가로 데려갈 모양이다.
말끔한 아파트. 집안으로 사회복지사 두 사람이 들어온다. 
"장애인용 아파트예요. 명의를 빌려서 가짜로 입주하는 사람이 있다길래.."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시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온 공주에게 오빠는, 
"옆집 사람들 밥 제때 안 챙겨주거나,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전화해. 한 달에 20만 원씩 주는데.. 20만 원이면 작은 돈 아니다." 
그에게는 20만 원이면 자신의 의무로 족한 것이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종두가 남겨두고 간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다.
이 연속된 장면들을 보며 나는 매우 마음이 아팠다.
어느 누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싶겠는가? 
그녀가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그 후 가까워진다. 종두가 말동무도 되어주고 밖으로 나들이도 데려가고 몸도 씻겨주고 빨래도 해준다. 
참 아이러니하다. 종두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사망케 한 사람이 공주의 아버지란 걸 생각해보면.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는 고독한 환경을 만든 가해자가 이제는 보호자가 되었다. 
이 지독한 역설 앞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다.

반전은 어머니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 드러난다. 종두가 그녀를 데리고 참석한 것이다.
식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지켜보는 내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참다못한 형이 종두를 밖으로 불러낸다.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러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왜 형이 불편해할까?
사실 교통 사고를 낸 범인은 형이었다. 종두가 그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감옥에 갔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렬한 반전인가? 감독에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하다.
나조차도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종두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편견을 가지고 그를 평가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사회에서 큰 문제없이 살아가지만 장애인이라고 불쾌한 모습을 보이며 무시하는 사람과 행실에는 문제가 있지만 장애인을 보듬어주는 사람.
과연 누가 인간적인 사람일까. 

그런 꼴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 
돌아가려는 종두를 하룻밤 자고 가라며 공주가 붙잡는다.
난 이 대목이 영화에서 가장 씁쓸하면서 슬픈 장면이라 생각된다.
여러 사람 앞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고 쓸쓸하게 돌아온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어 남자를 붙잡는다. 하필이면 종두의 어머니와 생일이 같은 날인 건 또 뭐란 말인가?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는 오빠 부부가 갑자기 찾아오며 끝이 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종두가 겁탈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들에겐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올케는 "우리 아가씨 불쌍해서 어떡해"라며 귀청이 찢어지도록 울부짖는다. 무엇이 불쌍하다는 것일까? 
월 20만 원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옆집으로 떠넘기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홀로 방치한 자의 울부짖음이여!  

잡혀 들어가는 종두에게 형사들이 묻는다. 
"솔직히 말해봐, 너 변태지?", "얌마, 솔직히 성욕이 생겨?"
영화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장애인에게 편견이 심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주의 오빠는 물건 값을 흥정하듯이 합의금으로 2천만 원을 부른다. 
종두의 형은 합의금 요구를 거절하며 저런 놈은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고 답한다.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저버리고 2천만 원을 요구하는 자와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진 동생을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자. 
뻔뻔함으로는 박빙의 승부다. 

공주는 온몸을 바둥거리며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다들 겉으로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진심으로 소통하는 인물은 전과자이며 사람들이 기피하는 종두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 '오아시스'는 공주의 방 벽에 걸린 그림을 말한다.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고립된 두 사람이 삭막한 사막과 같은 현실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오아시스가 되어준다는 의미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기회를 틈타 도망친 종두는 공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집앞 나무 위에 올라가 톱질하여 가지를 전부 잘라 버린다.
언젠가 공주가 방안 벽에 걸린 오아시스 그림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가 무섭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잡혀가기 전, 종두가 그녀의 오아시스를 지켜주기 위해 건넨 작별의 선물인 셈이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라디오의 소리를 크게 높여 답하는 공주의 모습이 서글프다.

이후 감옥에서 보낸 종두의 편지와 함께 공주가 스스로 방청소를 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공주는 누구의 도움 없이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 종두는 출소 후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글쎄, 그러기엔 두 사람에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 보인다. 
어쨌든 영화는 다소 희망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참으로 보는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 불편함만큼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당신은 범죄자와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가?' 
영화는 나에게 내내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24년 전 영화이지만 지금도 이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편의 자연주의 문학을 읽은 것 같은 매우 씁쓸하고 슬픈 영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