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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평점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외교천재 고려 (이익주, 김영사, 2026, 1판 1쇄, 296쪽)
-소통하는 역사학자-
#이익주교수
처음 이익주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역사 방송을 통해서다. 가장 신선했던 것은 그가 고려사 전공자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을 하고, 조근조근 설명하면서도 상대를 설득하는 모습이었다. 역사학자가 자기 연구 분야를 방송에 가지고 나와 대중과 소통하려 노력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다. 많은 역사학자가 철저히 자기만의 연구 성과 속에 갇혀 살면서 대중이 보기에 무의미한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익주 교수는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이 책 또한 그런 신뢰를 재확인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채로운 고려-
#고려사 #외교
고려사는 참 다채롭다. 아마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다가설수록 숨겨져 있던 매력을 발산하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학생에게 고려사는 지옥이다. ‘고려’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모든 상황이 다 불확실하다. 고정된 것 없이 계속해서 변화한다. 심지어 시기에 따라 지배층도 계속해서 달라진다. 다채로움은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모습이기에 아름답지만, 학생이 다가서거나 이해하기엔 어렵다. 마치 단순한 패턴이 반복되어 만들어진 복잡한 그림과도 같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아닐까. 고려는 쉽게 다가서기 어렵지만, 가장 현실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려사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중요한 장면을 9개 꼽는다. 1부 고려 전기 다원 외교의 네 장면과 2부 고려 후기 일원 외교의 다섯 장면이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늘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강대국이 하나인지 또는 다수인지가 달라질 뿐이었다. 고려는 그 모든 상황을 경험한 국가다. 그래서 고려의 외교적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한 외교적 전범(典範)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감정보다는 전략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고려의 외교적 경험을 설명하며 국가적 이익을 기준으로 각 장면을 평가한다.
-새로운 관점-
#국제관계 #외교 #전쟁
“사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의 이소사대(以小事大)에서 비롯된 말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살핀다’는 뜻의 자소(字小), 즉 이대자소(以大字小)와 짝을 이룹니다.”(23쪽)
한국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학습할 때 가장 큰 한계는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을 기준으로 대외(對外)관계를 바라보게 된다면 한국사 내부에만 주목하게 되어 관계(關係)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국제(國際) 관계, 즉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 외교를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감정보다는 전략을 우선 선택하려면 우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학습할 때 발생하는 한계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것이 오해였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고려의 독자 연호는 책봉-조공 관계가 단절된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이며, 이는 고려가 황제국을 자처했다기보다 오히려 책봉-조공 질서에 충실하게 대응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41쪽)
또한, 저자는 고려의 전쟁을 외교적 관점에서 재평가한다. 저자는 전쟁을 외교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전쟁은 외교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61쪽)
저자는 무조건 전쟁을 피해야 한다거나, 전쟁을 하려는 의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저자는 고려 최씨 정권의 대몽항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 전쟁과 협상을 병행하며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최씨 정권의 연장이나 민중의 피해를 기준으로만 보는 기존의 시각과 다른 평가이다. 다만, 장기전이 더 이상 의미를 갖기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 전쟁을 마치고 외교적 해법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라고 평가한다. 강화 천도와 개경 환도의 순간은 ‘최씨 정권’의 운명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이 아니라 ‘전쟁’과 ‘외교’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다.
-성공한 외교, 실패한 외교-
#세조구제 #공민왕 #반원개혁
고려의 외교적 경험은 모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실패한 장면만큼 성공한 장면도 있었을 뿐이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잘 드러난다. 우리가 잘 아는 서희, 이자겸, 공민왕 등 고려의 인물은 당시 고려 내부적 사정과 외부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외교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다보니 외교적으로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모습과 다른 색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 외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신의 한수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대체로 거란의 침입에 맞서 강동 6주를 확보한 서희의 담판에 주목한다. 하지만 저자는 훗날 고려 원종으로 즉위하는 태자의 여정에 더 주목한다. 고려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국가 멸망 직전), 그리고 몽골 뭉케 칸의 죽음과 쿠빌라이의 후계 다툼 구도 속에서 고려 태자는 국가를 위한 외교적 선택을 한다. 이른바 ‘세조구제’라는 결과로 이어진 그 장면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몽골 제국에 대항하여 그 국가의 형태를 지킨 경우는 고려가 유일하다. 그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가져온 고려 태자의 외교는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을 뿐,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철저한 외교적 실패는 무엇이었을까. 역시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동북 9성의 포기와 금에 대한 사대 요구를 수용한 장면을 들지만 저자는 다른 장면에 주목한다. 바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다. 공민왕의 개혁이 원 간섭기를 끝내고 몽골 제국의 붕괴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 인정하지만, 감정이 개입된 정책이었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원과 명이 교체되는 시기에 고려가 전략적 이점을 얻지 못하고 반원 감정에 치우쳤기에, 또한 공민왕이 키워낸 신진 사대부가 실리보다는 명분에 집착했기 때문에 고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원과 명이 대립하는 상황을 잘 활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고려는 그 기회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 여기에 신진 사대부의 가치 우선 외교(명분)가 더해져 실리 외교에서 더 멀어졌고, 그것이 결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277쪽)
한반도를 중심으로, 우리를 중심으로 학습하는 한국사를 넘어 ‘국제 관계’를 중심으로 바라본 고려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역사책 속에서 암기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었던 인물과 사건이 현실 세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 주변을 둘러싼 외교적 선택지를 이미 1,000년 전 고려인도 경험했고, 그것을 세심하게 판단했으며, 실제 외교적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고려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배울 차례다. 작은 강국으로서 대한민국은 고려만큼이나 훌륭한 외교적 선택으로 국가를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왜 명분보다 실리를, 감정보다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