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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 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쇄)
작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독창성 하나는 세계 최강이다.
“호불호를 떠나서 작가에게 독창성이란 최고의 미덕이니까.”(242쪽, 마트료시카)
작가에게 아부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독특함을 뿜어내는 ‘짧은 소설책’이다. 우선 작가의 독특함은 차례에서부터 드러난다. ‘작가의 말’이 뜬금없이 책의 중간에 나온다.
“…… 목차는 가나다순으로 배치했다. 이 ‘작가의 말’을 포함해서.”(114쪽, 작가의 말)
이 ‘작가의 말’을 포함해 독창성을 아주 강력하게 뿜어내는 16편의 짧은 소설들이 ‘엄격한 질서에 의해 조성된 혼돈에 오점을’(114쪽, 작가의 말 / 245쪽, 마트료시카) 남기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마치 자극적인 숏츠를 여러 편 몰아쳐 본 느낌이다. 하나의 소설에 온전히 몰입하기도 전에 숨 가쁘게 다른 장면으로 내던져진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도 각 소설이 가진 매력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작가가 그냥 쓰고 싶어서, 그냥 좋아해서 자유롭게 쓴 소설은 정말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를 찌그러진 탱탱볼을 닮았다.
-상상할 수 없는 결말-
일단 장르를 굳이 분류하자면 스릴러보다는 호러(공포)라고 생각한다. 소설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작품인 ‘아뇨, 아무것도’(67쪽)는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무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끔찍하고 잔인한 묘사는 거의 없다. 그저 사소한 일상 속에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소재로 시작하여 슬그머니 소름 돋는 공포를 보여준다.
“이런 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81쪽, 아뇨, 아무것도)
정말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말이다. 대부분 소설이 이렇다. 사소하게, 평범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내용이 뜬금없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오른다. 처음에는 그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서서히 나도 작가가 된 것인 양 제목만으로 그 다음 내용을 상상하게 되었다.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덤벼들었지만, 번번이 작가의 결말을 넘어설 수 없었다. 진정 우주 최강 독창성은 인정해야만 한다. 게다가 작가는 의도적으로 ‘마트료시카’(231쪽)을 맨 마지막에 넣는 ‘오점(汚點)-엄격한 질서인 가나다순을 파괴한 오점’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 의도가 약간 얄밉게 느껴졌다. ‘마트료시카’는 작가가 가장 자신 있게 독창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앞의 15편의 소설에서 독자가 연습해보고, 마지막 작품에서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려는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치 광고 글처럼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작가의 상상력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독창성의 벽이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그 거대한 벽 앞에 상상력의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대가 없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끝까지 추구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114쪽, 작가의 말)
작가는 그냥 쓴 소설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단어 ‘그냥’에서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은 진정한 자유다. 나같이 직장에, 가정에 얹혀사는 사람은 절대로 작가가 누리는 자유의 경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작가라는 직업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단어는 없었다. ‘그냥’, 이 단어가 이토록 강력할 줄이야.
‘물과 숨’(33쪽)은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자유와 해방감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주인공 재희는 ‘그냥’ 갑자기 물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했던 숨(호흡)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막는 족쇄였다는 점이다. 교사였던 재희는 교사로서 책임감, 학생에 대한 의무감을 고민 없이 내려놓는다.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손쉽게 떨쳐낸다. 마지막까지 포기하기 어려웠던 숨(호흡)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주인공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시작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것이 공포다. 놀라운 결말이지 않은가.
‘마트료시카’(231쪽)에서도 ‘해방감’을 언급한다. 사실 이 소설은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서로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원할 것만 같은 반복 속에서 작가는 해방감을 느끼기 위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아마도 작가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소설이 아닐까. 창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이 ‘미저리에 대한 단상’(55쪽), ‘48시 편의점’(205쪽)에 잘 드러나지만, 결국은 마지막 ‘마트료시카’에서 그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창성-
나는 ‘엄격한 질서에 의해 조성된 혼돈에 오점을 남기는 것’(245쪽)이 작가만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작가는 모두가 진화를 옳은 방향이라고 믿고 있는 엄격한 질서 속에 ‘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11쪽)을 통해 ‘퇴화’를 지향하는 존재들을 내세운다. 또한, 영화 미저리에서 피해자인 여자 주인공 미저리를 ‘교묘하게 타인을 조종하는 가스라이터’(63쪽)으로 재정의하기도 한다. 엄격한 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소설을 창조했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남긴 이 ‘오점’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독창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친구의 연인의 친구들’(121쪽)에서 장미의 친구인 주인공 ‘나’는 결국 친구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는 쪽으로 오점을 남긴다. 그것이 더 좋은 결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테니스를 쳐야 하는 이유’(157쪽)에서 인도인 구루는 명상이나 선문답을 하지 않는 오점을 남기지만, 결국 주인공 티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하이델베르크의 동물원’(183쪽)은 동물원 자체가 오점이지만, 그덕에 두 주인공은 인연을 발전시켜 나간다.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다. 쉽게 몰입할 수 있지만,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