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 셋셋 (김혜수 외,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쇄)
신인(新人)의 소설은 기대보다 만족이 크다. 소설 전체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하나만이라도 찾을 수 있어도 작품과 작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 마음 덕분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새로운 작품을 읽으며 좋아하는 문장이 쌓인다. 그렇게 그 작가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진다. 이 소설집은 신인 작가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가는 기초를 제공하려 한다. 그래서 이름이 셋(3) 셋(Set)인가보다. 신인 작가를 독자와 만나게 해주는 출판사, 그 세 존재가 첫 만남을 갖는 소설집이기에 ‘셋셋’은 생소하면서도 매력적인 이름이다.
신인 작가는 알려진 것이 적다. 그러다 보니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곧 작가의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이고, 무엇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소설이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집 속 주인공들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내겐 머나먼 우주와도 같은 생소한 모습투성이다. 충분히 내 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내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 같았다. 아니, 관심을 가지려 노력할 마음조차 없었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이들을 만난다면 나는 그들에게 조금 더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삶보다 더 힘겨운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픔, 상처-
소설 속에서 만난 아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시절의 상처’였다. 아무래도 내가 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기에 그런 마음이 들었나 보다. 부모나 나 자신의 아픔보다 아이들의 아픔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들은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졌고, 부모가 충분히 보살펴주었다면 평생 절대로 알 수 없는 아픔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의 아픔에 가장 공감했다.
‘여름방학(김혜수)’의 주인공 ‘나’는 아빠를 잃었고, 친지들을 떠나야 했으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엄마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안정적인 보호와 지원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녀의 삶이 더 아프게 다가온 것은 지하 곰팡내인 군내같이 자리 잡은 결핍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어떻게 감아야 하는지 부모님한테서 배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눈치껏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 … 그때 놓친 것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찾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27쪽)
‘지영(이서희)’ 속 지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트라우마였음을 모르고 자란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녀의 부모가 그것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56쪽) 당연히 상처는 오롯이 그녀 몫이 되었고,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여야 할 부모가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 부닥친다.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궁지에 몰린 삶은 결국 극단적인 공감과 위로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들의 선택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공감이었고, 다만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쁘다는 사실만 남을 뿐이다.
“쿰쿰한 지하방에서 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나랑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줬어. 정말 힘들었겠구나, 위로해주는 거야. 누군가는 날 안아주고, 누군가는 울어주고.”(64쪽)
-냄새-
아픔과 상처는 강렬한 냄새로 찾아온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느낀 이들은 ‘곰팡내가 섞인 군내’로, 치매 부모를 보살피는 이에게는 ‘익숙한 지린내’로.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김현민)’ 속 해연은 현실이 곧 냄새다. 직장은 퇴식구의 음식물이 내뿜는 악취로, 집안은 엄마가 내뿜는 익숙한 지린내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냄새는 그녀가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어떤 몸부림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냄새 같은 존재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소설 속 주인공과 달리 위로나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어떤 기억은 냄새로 인해 우연히 되살아난다. 억지로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냄새를 맡으면 기억이 갑자기 떠오는 경우가 있다. 현실에 매몰되어 잊고 살아가던 그 기억은 현실을 벗어나게 해주는 매개물이 된다. 해연에게는 맛동산의 피맛과 고소한 냄새가 그것이었다. 냄새는 곧 위로와 구원이었다.
“지금보다 물엿과 땅콩 가루가 담뿍 버무려져 고소했지만, 오물오물 씹다보면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딱딱했던 맛동산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였다.”(87쪽)
나도 막상 지금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잘 생각나지 않는다. 희미한 장막 속에 갇혀있는 그 기억들은 나를 만들고, 내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초들임이 틀림없지만,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이 힘들고 괴로울 때, 냄새는 그 기억을 끄집어내 주는 장치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연과 그녀의 어머니는 맛동산이 그런 매개였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나이가 들수록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취업하면 당연히 직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학생 때처럼 떠들어 댈 수 없었다. 무조건 견디거나, 그렇지 못하면 일을 그만두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참 힘겨웠었다. ‘아이리시커피(이지연)’의 희수도 직장을 견딜 수 없기에 새로운 직장을 창출(?)해 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해, 희수는 모든 것이 소진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위의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 무뎌지는 게 단단해지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출근해서 업무를 수행하는 자신에게 느껴지는 건 자괴감뿐이었다.”(128쪽)
그런데 희수가 만들어낸 새로운 직장마저도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공간으로 변해버린다. 심지어 그 공간에서 희수가 느꼈던 감정은 절대로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버린다. 희수는 과연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내지 않은 채 자신만의 비법으로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녀에게 어떤 위로와 공감이 필요할까.
‘호날두의 눈물(양현모)’ 속 ‘개저씨’는 이제 내 일상이 되었다. 개저씨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익숙하다. ‘경유지(전은서)’ 속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관계도 여럿 경험해 봤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만 남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결국 친구로부터, 직장 동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그게 우리가 살아갈 힘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우리에게 그런 위안을 전해준다. 삶이 피폐하거나 헛헛한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위로를 얻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