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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
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압축 소멸 사회 (이관후, 한겨레출판, 2024, 1판 1쇄)
명쾌하고 속 시원한 진단이다. 정치학자인 저자는 대한민국이 왜 빠른 속도로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한다. 대한민국의 인구 감소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이 위기의 원인은 매우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해 나가기에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아니, 이 위기를 극복할 수나 있을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이대로 소멸해버릴 것인가.
-압축 성장과 압축 소멸-
우리는 일제 식민 지배를 극복했고, 건국 직후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민주화, 산업화, 근대화를 이룩해 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런 ‘압축 성장’이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에 추가되었고,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압축 성장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압축 소멸’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압축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진국이 제시해 주었고, 그들이 발전 과정에서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가며 정해진 답을 암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 ‘압축 성장’의 시기에는 가장 중요했다. 지금 우리가 암기력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 그것으로 인재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이유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미래에 만나게 될 문제가 무엇일지도 상상할 수 없다. 당연히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지도 지금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압축 소멸’을 경험하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압축 성장’ 시기에 만들어진 틀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선진국인데, 대응 방식은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것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더는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 없다는 건 무엇일까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뜻일 겁니다. 이 공동체에서의 삶이 지금도 행복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44~45쪽, 1부 대한민국은 왜 소멸을 선택했나)
희망이 없으면 무기력해진다. 어떤 목표도 달성할 수 없기에 당장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소멸되든 말든, 내 행복을 위해 지금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게 학교나 회사,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면, 대한민국이 소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라는 해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자는 ‘정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정치’가 소멸해버렸고, 그래서 이 위기를 극복할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정치란 가능성의 기예이며,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을 폭력이나 강압이 아니라 조정과 합의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76쪽, 1부 대한민국은 왜 소멸을 선택했나.)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적 위기 상황이다. 대화와 타협, 협력과 소통은 이미 사라졌다. 이게 유독 현 대통령의 성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일 것이다. 권력 장악에만 급급한 정치인들을 보며 국민은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심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에서 보았을 때, 전형적으로 망하기 직전의 국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제국’을 경영한 경험이 없다.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제국을 경험했고, 그 유산을 물려받았다. 나는 그 제국의 유산이 바로 ‘정치’라고 생각한다. 제국은 단순히 주변 지역을 침략하고 식민 지배하면서 약탈만을 일삼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국이 주변을 침략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지역, 다민족, 다문화를 품을 수밖에 없다. 하나의 순수한 집단, 민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제국을 경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상 강력했던 제국은 모두 다원주의와 포용성을 근간으로 한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唐)이나 원(元)과 같은 과거의 제국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도 비슷하다. 우리의 제국 경험은 고구려나 발해 정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유산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치학으로 본 한반도 현실-
정치학자인 저자는 한반도의 현실을 복합적 위기로 본다. 그 대다수는 현재 언론에도 보도되어 많이 알려진 내용이지만, 일부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 사실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중요한 내용이 있어 그 부분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좋은 대학 나와서 안정적이고 괜찮은 소득이 보장되는 직장에 취업해 자신과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식이다. 굉장히 엘리트 집단 지향적이다. 표준 자체가 너무 높은 내러티브다.”(67쪽)
충격적이다. 모두가 위와 같은 표준적인 삶을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저것이 상위 10%만 누릴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의 모습이라는 것을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저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학급에서 3등 안에 들어야만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생각인가. 또 아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대다수 아이는 당연히 저 10%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또 저 10%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생각이다.
“어떤 이유로든 얄타 체제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세계 질서가 제1,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야만적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강대국들의 힘의 경쟁을 제어할 수단이 사라지고, 제국주의적 본성이 세계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는 것입니다.”(120쪽)
얄타 체제는 소위 우리가 아는 냉전 체제다. 이 냉전 체제가 전 세계적 평화를 유지하는 힘의 균형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냉전의 가장 최전선에 있는 우리 처지로서는 냉전이 우리의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이 주장에 약간 거부감이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냉전 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상호 견제가 가능했고, 그 덕에 우리 같은 약소국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전쟁 등 미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최전선에 있는 국가에서 폭력 행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북한이 파병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우리도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당장 미국의 힘이 동아시아에서 사라진다면,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와 중국으로 둘러싸인 한반도도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소멸이 생물학적 자정 작용의 하나(134쪽)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전 세계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문제를 대한민국이 가장 앞서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어떤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그대로 소멸할 것인지, 아니면 이 위기를 극복할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니면 잘못된 해법만 계속 고집한다면 소멸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정치’를 복원하고, 우리 문제를 직시할 것을 주문한다.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소멸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창조의 영역(252쪽)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없는 것을 지어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