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학자 홍정하
이창숙 지음 / 궁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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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한 소설이다. 비록조선’, ‘수학자’, ‘홍정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매력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이 책은 대부분의 독자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이 셋을 잘 아우르고 있다. 최근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페이지를 접고, 표시하고 기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저자는 실존 인물인홍정하의 삶을 사실적으로 파헤치기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친숙한 삶의 모습과 가상의 인물들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사실에서 멀어지는 내용일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소설은 숙종 대 조선의 현실을 매우 개연성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중인 홍정하의 삶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서촌(웃대)의 모습이나, 왜란 이후 황폐해진 경복궁, 당시 중인들의 문학 활동 등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면 닿을 수 있는 그곳(서촌)에서 불과 200년 전에도 우리와 비슷한 삶이 있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역사적 사실에 이처럼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의 수학, 산학(算學)’

조선 시대 산학은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지배층들은 학문이라기보다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천시했다. 때문에 산학 연구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모든 것이 그 당시 산학을 담당하는 중인 계층의 개인적인 노력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의 책 󰡔구일집󰡕이 더욱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리학의 나라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성리학자가 현재 화폐의 도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철저히 지배층의 논리를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대 주목받지 못했던 영역이었던 산학학문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홍정하의 삶이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산학에서 사용되던 표현이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데 이 부분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중반은 ½, 소반은 , 태반은 , 강반은 ¾”(96)

 

현재 우리가 쓰는 수학적 용어의 태반이 일본 또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용례들의 발굴이 매우 반가웠다. 우리가 우리의 상황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용어들이 갖는 힘을 우리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수학처럼 우리의 전통이 단절된 학문일수록 더욱 우리 조상들이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역사를 발굴해 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우리도 서양과 일본, 중국의 학문에 종속되지 않은 주체적인 학문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전통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려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선 시대에도 산학은 잡과 시험의 주요 과목이었다. 비록 지금의 수학이 수능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겠지만, 중인 가운데 호조의 관직을 원하는 자들은 아마도 목숨을 걸고 시험에 도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산학 잡과 시험 풍경이 꼭 오늘날의 수능 시험장의 풍경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나무 통을 길게 매설하고 통 속에 노끈을 넣은 후, 과거장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신호를 보내면 밖에 있는 자가 줄을 당겨 시험문제를 확보하여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낸 것이다.”(109)

 

당시 부정행위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된 장면에서는 수능 시험장에서 최첨단 장비를 활용하여 부정행위를 했던 사례가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산학을 다루는 호조 관리에게 적용되었던, 그 엄격한 잣대가 지금 공무원들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지켜야 하는 사불(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삼거라는 말이 있다. 첫째, 부업을 갖지 않는다. 둘째, 땅을 사지 않는다. 셋째, 집을 늘리지 않는다. 넷째, 재임한 곳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다.”(172)

 

군사독재 시절, 공직자들이 가장 먼저 부동산을 매입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해나갔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내용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 지금까지도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 있기에 우리 사회의 금수저와 같은 신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존 인물 홍정하의 삶과 허구 인물 소이, 동이의 중요성

홍정하는 부족함이 없는 남양의 중인 집안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산학을 의무적으로 배웠으나, 말년에는 그 학문적 수준을 크게 끌어 올리고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였다고 스스로 만족해하며 삶을 마쳤다. 비록 그의 삶을 실제로 증명해줄 기록이 충분히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산학자로서 책을 집필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충분히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홍정하의 삶을 부각하는 장치로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등장시켰다. 특히 나는 그의 딸인 소이와 그의 제자인 동이가 그의 삶을 부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산학자 홍정하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수학과 음악이라는 연결고리도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

 

산학자가 어찌 이리 노래를 잘하는가? 나는 산학자들은 딱딱하고 가정이 좀 메마른,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116) - 지금도 수학적 능력과 음악적 능력이 관련이 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비록 상상의 산물이겠지만, 저자의 이러한 설정에 감탄하게 된다!

 

홍정하의 삶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유년 시절 든든한 후원자인 할머니가 계셨다. 어려웠지만 나중에 함께 살게 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믿음도 있었다. 청년이 되어서는 홍세태, 유수석, 겸재 정선 등과 교유하며 성장할 수 있었고, 특히 가장 친한 벗인 유수석이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역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유독 산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홍정하는 그로부터 학문을 즐길 줄 아는 경지를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는 아내와 자녀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면서 자신이 책임지고 살피지 못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아내와 소이의 존재는 홍정하의 삶에 가장 큰 충격과 아픔을 주는 동시에 그의 삶을 완결지을 수 있는 촉매제로 작용했다고 믿는다. 노년이 되어서는 제자 동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삶을 최종적으로 완성해 사제 간의 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그의 삶을 돌아보며 나도 내 지난 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삶은 내게 하나의 완벽한 삶의 전형으로 다가왔다.

 

책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아버지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도 마음이 뭉클했다.”(86) - 나도 아버지로서 내 아이들을 전적으로 믿어줄 수 있을까? 반성하게 된다.

자신(홍정하)이 어렸을 때 처음 느꼈을 순간을 동이도 맛봤다고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기뻤다.”(188) - 제자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스승이 되어보고 싶었다.

산학청에서 취재 시험을 준비하던 학생들을 가르칠 때보다 동이에게 더 마음이 갔다.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뿌린 씨앗 중 가장 굵은 씨앗은 아마도 동이일 것이다.”(191) - 나도 교사로서, 내 삶에 가장 굵은 씨앗(제자)을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고 죽을 수 있을까. 나도 동이와 같은 제자를 만나고 싶다. 홍정하와 같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학문을 대하는 자세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조선의 뛰어난 산학자인 홍정하도 산학 공부의 시작은 의무감이었다. 그리고 그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학이 깊이 연구해야 할 학문이라도 되느냐는 듯 되묻는 얼굴에 대고 왜 산학이 중요한지 설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칫 강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어떤 아이는 언젠가 산학의 중요성을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설사 이 아이들 모두 평생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몫이며 자신들의 인생이다.”(20)

 

그렇다면 학문을 하는 이유가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인지, 삶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학문 그 자체의 즐거움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자는 지금 대부분의 학생이 수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의무감으로 대하고 있어서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솔직히 나도 학생은 아직 실제 생활에 학문이 적용되는 사례를 풍부하게 접해보지 못했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본 경험도 부족하므로 학문을 의무감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론을 가르칠뿐이지 실제 문제를 해결하게 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홍정하는 산학을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실생활에서 찾게 된다.

 

정하야, 네가 논의 넓이를 계산할 수 있지 않냐?”(25)

 

전문직 중인 집안의 큰아들이라는 무게감과 친구네 집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 주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그에게는 실생활이었다. 그가 논의 넓이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문제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며, 무엇이 부족한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덤으로 그의 첫사랑까지 만날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학생들의 상황이 홍정하의 말처럼 학생들이 스스로 학문의 중요성을 찾아낼 때까지 내버려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칫 강요가 될 수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그 학문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학생들은 홍정하가 살았던 조선 시대보다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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