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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미원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웃어야 하나.
와글 와글도 아니고 키득키득도 아니고 클클클 도 아니고 "풋~~" 이나 "큭~~" 이 어떨까.
또는 "음화홧~~" 도 괜찮겠다.
이 책을 읽으며 지하철에서 내가 웃었던 웃음을 형용한다면 말이다.
기발한 상상력도 상상력 나름이지 정말이지 이런글은 처음 본다.
여자친구가 도넛이 되는가 하면 어머니가 빨간고추 안에서 튀어나오고
훌리오 이글레이셔스를 싫어하는 바다거북은 또 어떻고 사기치는 가슴 세개 달린 여자하며...
사람아닌 동물이나 사물 또는 가상의 물건을 의인화 시킨 이 엉뚱한 그림책 같은 동화는
하루끼라면 결코 비켜가지 않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이상하게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 "사람을 격려하는 선의로 가득찬 도넛' 처럼 선량하고 유머있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면서도 주변을 따뜻하고 상냥하게 바라보는 선의로 가득찬 주인공들 때문일까.
하루끼를 읽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입가에 웃음이 이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의 선량함에 있었구나 하고 역자인 김춘미씨의 글에 적극 동감한다.
하루끼는 어떻게 그런 스타일을 가질수 있었을까.
정통문학의 본령에 짖눌린 우리 문학 또는 소설가들은 우리에게 교양을 주었지만 웃음과
가벼운 삶의 안도를 주지 못했다. (김유정 빼고...^^)
우리에겐 왜 이런 작가가 없었을까.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노래하듯 자유롭게 글을 쓰고 읽는게 아니라 신춘문예에 눌린 고시생 처럼
리포트 내야 하는 학생들 처럼 쓰고 읽어야 했다.
이 정체 모를 가벼움에 대해 흥분하면서 설레면서 또는 비난하면서 또는 동경하면서
설왕설래가 있은지도 어언 십여년 이상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박민규 같은 소설가가 나왔다 .(그를 내 맘대로 한국의 하루끼라고 갖다 붙힌다면 그가 불쾌할까 어떨까 ^^)
암튼 내말은 시대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루끼는 부럽다.
아 왜 이런생각을 못했지?
아 왜 그런식으론 사물을 바라보지 못햇지?
아 그 알수없는 자유로움의 정체는 뭐지?
그러면서도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그 참신한 문체의 매력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잠시 나를 딴 사람으로 만든다.
너무도 틀에 맞춰져 더 이상 새로운 발상도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도 갖지 못한 교육과 양육을 받은
나는 정말 골판지 상자에 갇힌 원숭이 처럼 불행하단걸 알게 해주는 하루끼의 책들..
잠시 나를 선의와 부드러움과 상냥한 친절과 유머와 엉뚱한 상상력의 세계로 데려가 준
"밤의 거미 원숭이"에게 감사한다. 그 여행이 이틀간의 독서로 끝나버린게 아쉬우니
입이 심심해서 크랙카 먹고 싶을 때 바로 그때 딱 한 편 씩 다시 꺼내 읽어야지..
P.S) 뒤에 있는 역자후기 김춘미씨의 글도 참 잘되었다.
소쉬르의 이론대로 특정한 이름으로 명명된 사물이나 존재 자체는 그 이름으로 개념화 되는데
사실은 그 이름이 그 존재 인것 아니고 나의 이름 또는 존재도 사실은 뭐라고 명명이 불가능한
하나의 사회적 관계일 뿐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이름의 상투성을 벗어버린 포스트모던한 사고방식이
바로 하루끼 소설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또한 무척이나 가볍지만 무척이나 그러하다고(구조주의 언어학적 발상) 느끼게 만든다 군데군데.. 누가 하루끼를 가볍다고 하나 그는 시대를 리드하는 철학을 글로 푸는 것 뿐이다..(망구 내 생각)
그래서 가벼운게 그냥 가벼운게 아니라 큭~~ 하고 실소를 뱉으며 묘한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거니 하고 생각햇는데 뒤에 떡하니 김춘미씨가 정리를 해놓아 또한번 고마울밖에..
즉 하루끼는 원래부터 그런 톤의 소설을 잘쓰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뚜렷한 포스트모더니스트다 (고 말하면 공부없는 내가 하기엔 거창한 말인가? 하긴 마흔살의 아줌마가 하는말이 논문에 인용될 정도로 정확해야할 필욘 없겟거니...^^)
이 전공투 세대의 발칙한 젊은이는 그야말로 안티테제로 포스트모던을 선택해 팔구십년대의
젊은이 ,늙은이(나) 를 여전히 매료시키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