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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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은

물통 안에 떨어뜨린 물감 한 방울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스며들고, 우러나요.






어렸을 때 제가 사랑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서로 좋아해 → ???'

이게 다였어요.



부모님의 결혼과 육아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결혼이 별로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죠. 그때 '사랑 = 결혼'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사랑의 결과가 결혼이 될 필요도 없다는 건 나중에 깨달았어요.



'서로 좋아해 → 사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결혼, 동거, 입양, 반려동물 →' 이렇게 제 사랑의 마인드맵은 여러 번 항목이 추가되었어요.



이 책의 작가 다나베 세이코는 사랑의 수천수만 개의 결 중에서 9개를 뽑아 선보여요. 표제작인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은 단연 강렬했지만 제 기억에 남는 작품은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한때 부모님은 제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외롭게 늙어 죽을 거라는 말로 제 생각을 바꾸려고 하셨어요. 어른이 되는 건 아프고, 온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린 것 같은 날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같아요. 그래서 고독이 저승사자보다 무서울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저 혼자 있기 싫어서 결혼을 한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았어요. 「눈이 내릴 때까지」는 그럴 때 들여다보기 좋은 작품이었어요.




이와코는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결혼에 대한 꿈을 갖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꿈을 품지 않게되자, 머리에 구멍이 뚫린 듯이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156쪽.




「그 정도 일이야」는 여자, 남자 그리고 인형에 관한 이야기예요.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새끼 돼지를 닮은 손가락 인형이 있어요. 데이트를 할 때나, 전화 통화를 할 때나, 둘만의 여행 중에도 인형 치키가 함께해요.



손가락 인형이 왜 필요할까요. 어쩌다가 주인공 커플 사이에 끼어든 걸까요? 인형이나 장난감이나 도구가 커플 사이에 등장하면 보통은 식어버린 관계를 되살려보려는 보충제로 나오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 치키라는 인형은 그렇지 않아요. 치키가 없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해버릴 것이고, 그 변화를 막기 위해서 인형이 존재하는 것이죠.



<아, 그럼 혹시 두 사람은 불륜관계?>

나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호리 씨와 나는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조금씩 서먹서먹한 느낌을 없애가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치키가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불륜관계'라는 말을 하면서 웃을 수 있으니까요.

127쪽.





시간이 흘러도 제 사랑의 마인드맵 위에서 변하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어요. 바로 사랑받고픈 마음과 사랑하고픈 마음이에요. 비율만 변할 뿐 이 두 마음은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해요. 요즘 '사랑'하면 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이와 비슷한 이중 감정을 다루는 글이 이 책에 실렸는데 바로 「짐은 벌써 다 쌌어」예요.



주인공은 아이가 셋이 딸린 남자를 사랑하게 돼요. 남자의 전부인이 떠넘기고 갔죠. 주인공은 남자를 사랑하고 독점하고 싶지만 아이들 육아까지 떠맡기는 싫었어요. 그래서 결혼도 아니고 불륜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자만 똑 떼어서 자신의 집에 들여요.



인간관계에서 나쁜 것을 따로 놓고 좋은 것만 취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과 남자의 연애 생활은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남자가 주인공을 내버려 두고 고향집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자주 와서 관계가 일시적으로 삐걱거리긴 해도, 주인공은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의 아이들까지 책임질 정도로 희생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주인공은 어느 인물과의 전화 한 통을 통해 어떤 사실을 자각하게 돼요.



이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사람을 사귈 때 좋은 점, 나쁜 점을 따로 관리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주인공이 너무나 저와 닮아서요. 아무래도 사랑은 썩은 부위만 칼로 도려내서 먹을 수 있는 사과는 아닌 것 같아요.



애를 태우며 서로 싸우며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하는 기분이 들었다.

224쪽.





책에 실린 단편 모두가 강렬하고 짧은 순간을 보여주면서 끝나지만 아쉬움보다는 여운이 남아요. 그 후에 주인공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한편 그렇지 않기도 해요. 단편의 매력이란 똑떨어지는 지점을 알고 쓴 것 같은 정확한 끝맺음 같아요. 똑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그것 자체로도 작품이고, 그림의 시작점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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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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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반짝거리는 우주 모래가 되어─







오늘 하루 외계인이라는 말을 두 번 들었다.

별명이 외계인인 것도 충격이었는데, 진짜 외계인이라니.

본문 39쪽.







이 책! 게임 좋아하는 아이들은 진짜 재미있게 읽었을 거예요. 게임 좀 해봤다 하는 사람이면 알아보는 단어와 표현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기 때문이죠. 작중에서 은하가 즐겨하는 '유니콘피아'는 MMORPG에 광활한 우주를 비행하며 탐험하고 정복하는 《노 맨즈 스카이》 같은 샌드박스류를 합쳐놓은 게임이에요. 무려 만 12세 이하만 플레이할 수 있는 어린이 우대 게임이랍니다.




'유니콘피아'의 개발자가 인터뷰에서 "어린이들에게 현실 세계는 너무 좁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기술과 엔진 그리고 인력만 있으면 뭐든지 구현 가능한 게임 속 세상은 게이머들에겐 새로운 세계이고 놀이터예요. 특히 이 책은 코로나19를 견디며 탄생한 작품이라, 집콕하는 매일의 답답함을 게임이 달래주며 아고라와 아지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인공 은하는 하루에 1~2시간 정도로 정해놓고 게임을 하는데, 게임이 자신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인 만큼 부모님께 게임 금지령을 받지 않도록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거죠. 게임 속 세상에서도 규칙과 예의를 지켜 행동해요. 게임을 하다 보면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유저들이 있고, 해커와 핵 유저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게임들도 많거든요.




이런 책임감 있고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은하를 보면서 '아... 내가 어린이였을 땐 저런 자제력이 없었는데' 하면서 감탄했더랬죠. 밤새워서 게임은 당연한 거고... 그래서 항상 부모님께 혼나고... ㅋㅋ







일러스트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야겠어요. 센개님의 그림인데 표지를 처음 보는 순간 반했더랬죠. 90년대 갬성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어서... 분명히 SF를 읽고 있는데 향수에 빠지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요. 왜 그리운지, 뭐가 그리운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감성을 자극하는 SF 동화랍니다.




은하가 500만 광년 너머의 별에 통신을 시도하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별의 목소리〉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더라고요. 특히 표지 그림에선 그리움이 반짝거리는 우주 모래가 되어 묻어날 것 같아요. 센개님 팬이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지구는 오늘도 안녕합니다. 지금 지구는 봄입니다. 모든 자연이 정말 아름다운 계절이지요. 지구의 풍경을 여러분에게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오늘은 제 딸 은하 얘기를 더 해 보려고 합니다."

뚜두. 두두뚜두. 뚜두두두.

헥시나 기계어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이상하게 헥시나가 가깝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헥시나라는 행성이 우주 저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 61쪽.




창비 블로그에서 전수경 작가님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작가님은 동화를 읽는 게 좋아서 동화를 쓰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동화의 매력에 퐁당 빠진 것 같아요. 내년부터 좋아하는 그림 동화책을 조금씩 수집해보려고요.








혹시 책을 읽은 여러분 중에 외계인이 있다면, 일단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마세요. 정체를 들키면 너무 바빠지거나 귀찮아질 수 있거든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면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비밀을 지켜 드릴게요.

179쪽,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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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2
정세랑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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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SF를 좋아하시나요?




저 같은 경우 〈매스 이펙트〉라는 게임으로 SF를 처음 접했어요.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때는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장르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과 상상력이 만나 만들어진 소재의 다양성이 마치 화학 반응을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다채롭기도 해서 SF를 좋아해요. 



요즘은 경계를 허물고 소외된 것들을 품는 이야기로서의 SF 소설을 즐기고 있습니다. 전문 과학 지식에 무게를 두고 쓰인 하드 SF는 어렵지만 읽는 내내 놀라운 발견을 하는 것 같아서 성취감이 들죠. 반면 《종이 동물원》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떠올리면 감성 SF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장작이 타는 소리를 판타지, 우주선 내부를 걸어갈 때 나는 금속 마찰음을 SF에 비유하면서 판타지는 따스하고 SF는 차갑다는 막연한 인상을 가졌었는데, 《종이 동물원》을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은 이후론 그런 가정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어요. 




《오늘의 SF》 2호를 읽으면서 wavve 웨이브에서 첫 공개된 SF 앤솔로지 'SF8'도 함께 챙겨 보았어요.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민규동 감독님의 인터뷰가 무크지에 실려있는데요.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SF, 일상을 소재로 하는 SF(p.51)" 고민하면서 작가와 감독이 만들어낸 합작품을 감상했어요.



SF를 소비하는 독자인 저는 재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한 상상력을 즐겼거든요. (중략)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감독이 갖는 불행 중 하나는…. 이야기를 그 자체로 즐기는 게 아니라 영상화 가능성을 엮어 생각할 수밖에 없죠.


영화라는 트랙이 제게 생기면서부터는, SF 세계관의 대세를 만든 큰 작가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금방 휘발되고 작은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46쪽, 「두려움을 즐기는 연출가, 민규동」 



SF의 매력은 결국 사실주의 전통에서 재현이 불가능한 것들을 재현하면서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는 것이겠죠. 미래에서 현재를 보는 것처럼 인지적 소외를 시키고, 지금 사는 사회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SF에는 매력이 있단 말이에요. 

54쪽, 「두려움을 즐기는 연출가, 민규동」 









소설 코너는 검은색 종이 위에 흰색 잉크로 인쇄된 부분에 실려있어요. 검은 면에는 SF를, 흰 면에는 비소설을 싣는 게 《오늘의 SF》만의 특징 중 하나래요. 단편부터 중편까지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며 독자의 세상 또한 반전시켜요. 〈프레퍼〉는 지구 멸망 후 세워진 가게에서 팔 것 같은 까슬까슬한 스웨터 느낌이 났고, 〈인터디펜던트 바로크〉는 눈과 뇌가 빙그르르 돌아가는 기분 좋은 환상을 주었고, 〈임시조종사〉는 판소리와 SF의 만남으로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이었어요.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음성 지원이 된답니다. 이 작품을 언젠가 판소리 공연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스위트 솔티〉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자극했고, 〈0에서 9까지〉와 〈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차가운 땀이 흐르는 작품이었어요. 〈수진〉은 이상하고도 신비한 SF 특유의 느낌이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오늘의 SF》는 원고 청탁을 할 때 특정 테마를 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작가님들의 개성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어 좋았어요.





(아니리) 

옛날 서울 청파동에 지하임이라는 청년이 살았겠다. 

나이 스물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서른 넘어까지 진귀한 재주를 익혔으니, 이름하여 로봇 조종술이라. 세상천지 백 명 남짓 지닌 희귀한 재주이되 로봇이 전 세계 열 대 안팎으로 레드오션이 따로 없었더라. 백수 모양으로 낮에 자고 저녁 용돈 벌러 가기를 수삼 년이나, 일야(一夜)에 귀가하여 우편함 고지서 봉투를 개봉하여 본즉 겉면은 고지서이되 내용은 채용통지라.

199쪽, 「임시조종사」 









​인터뷰와 칼럼 코너에서는 SF 창작자들의 고민과 SF를 바라보는 관점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신작 SF 책을 리뷰한 코너에 나오는 책들은 내용이 궁금해서 당장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SF의 매력이란 자꾸만 들춰보고 싶고, 알고 싶고, 파고들고 싶은 것들을 기꺼이 내어준다는 점이에요. 소설, 인터뷰, 비평, 칼럼, 에세이, 리뷰 등 다채로운 글을 읽으면서 '아, 이래서 SF가 정말 좋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SF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만들어 준 책입니다. 




긴 시간을 헤매고 깨달은 건 도주 자체엔 의미가 없다는 것, 내 시야와 처지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좀처럼 적응할 수 없고, 인간이 비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에 회의가 드는 이들에게 환상문학은, 판타지와 SF는 그래서 사려 깊은 벗이 될 수 있다. 뛰쳐나온 곳에서 어떤 태도로 뭘 바라볼지 대화할 수 있다면 더. 

21쪽, 「SF를 쓴다는 것, SF 작가로 산다는 것」



"SF 영역은 기술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거의 모든 종류의 사고실험이 가능한 곳으로, '정의 justice'와 '젠더 gender' 그리고 '물리 법칙 physics'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문화적 설정에 의한 상상이 가능하다"

284쪽, 「SF와 과학기술 그리고 우주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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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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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랙 아이드 수잔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운이 좋았던 단 한 명.

본문 15쪽.





17년 전 일어난 블랙 아이드 수잔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의 인생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땅에 묻혀있다가 구출된 16살 '테시'는 지금은 지켜야 할 직업과 딸이 있는 33살 '테사'가 되어있었다.  


테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증언했다. 한편 테사는 자신이 지목했던 살인범이 진범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누군가가 테사의 집 창가 밑에 블랙 아이드 수잔을 심고 다니는 것이다.  혹시 진짜 범인은 아직 밖에서 테사의 테사의 딸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테사는 불안해하면서도 진범을 찾으려는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95년 증언 말입니다. 혹시 그 이후 변한 게 있습니까? 지난 17년 동안 사건이나 범인에 대해 달리 기억난 점은요?"

"아뇨."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기꺼이 돕고 싶지만 어느 정도만.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일깨웠다. 내게는 보호해야 할 십 대 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과거의 나 자신, 하나는 그 보라색 방에서 잠자는 아이.

본문 52쪽.



소설은 18년 전과 현재를 오가며 테시와 테사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두 주인공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독자는 둘의 말과 생각을 전부 신뢰할 수 없다.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핵심 정보를 빙빙 돌려 말하거나, 꽁꽁 숨기는 편이다. 



​단서의 빵 쪼가리를 따라가면서 독자는 나름대로 추리를 하지만 그 추리의 토대가 주인공의 거짓말 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휘청휘청 흔들리는 불안한 주인공의 심리와 기억. 이런 주인공에게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 대부분의 심리 스릴러, 특히 반전이 들어간 작품들은 독자에 따라 반응이 제각각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스릴러라고 하기엔 스릴이 부족하고 심리 스릴러라고 하기엔 사악함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휘청거리는 심리묘사와 뭐가 진실인지 몰라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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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정원
닷 허치슨 지음, 김옥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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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한테 문신을 새기나요?"

"정원엔 나비가 있어야 하니까."

본문 32쪽.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이 넘어버리는 소설이 또 있을까. 《나비 정원》은 스릴러 소설로 16살 여자애들을 납치해서 등에 정교하고 끔찍한 나비 날개 문신을 새기고, 21살이 되면 살인 후 시신을 보존처리해 날개를 전시해 놓는 '정원사'라고 불리는 연쇄 살인마가 나온다. 



이 작품은 연쇄 살인마의 손아귀에서 피해자들을 구출한 FBI 요원들이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살인마는 붙잡혔고, 살아남은 이들의 목격 증언으로 악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릴 수 있다. 사건의 해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살인마에게 납치당해 붙잡혔다. 섣불리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목숨을 잃는다. 어떻게 대처할까?  물리적 힘으로는 상대를 절대 이길 수 없고 정보도 부족하며,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이렇게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극단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이 있다. 




FBI가 확보한 증인의 이름은 '마야'라 불리는 18살 소녀다.  나비정원에 끌려왔을 때 마야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당돌하고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등장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FBI 수사관들은 마야가 혹시 살인마와 한패인 건 아닌지 의심한다. 마야를 보고 있으면 영화〈23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도저히 마야가 정원사와 한 패거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정원사는 여자애를 딱 세 가지 이유로 죽였어요. 첫 번째는 나이가 너무 많다. 유통기한은 스물한 살까지로, 그 나이를 넘기면 아름다운 모습은 덧없이 날아가니, 정원사는 아름다움을 낚아챌 수 있을 때 낚아채야 했어요.

본문 109쪽.



이 작품은 불쾌하다. 이 단어가 딱 어울린다. 오해하지 마시라. 좋은 의미다. 심리 스릴러가 어디까지 끈적거리고 답답하여 불쾌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성년을 상대로 한 납치, 감금, 강간….  소재가 그런 만큼 취향이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작가 닷 허친슨은 《나비 정원》을 시작으로 컬렉터 시리즈 3부작을 내놓았다. 오가와 요코의《침묵 박물관》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물건을 수집하고 정성을 들여 보존하는 행위, 그건 어떤 의미에서 광기의 표출이라는 걸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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