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억 1~2 - 전2권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기억. 

불완전하고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 

정체성의 큰 부분을 구성하기에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잊힌 기억"은 영화나 소설에서도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억》에 나오는 주인공 르네는 고등학교 역사교사다. 그는 전 인류가 앓고 있는 기억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 있어요. 

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 

기억 1 16쪽.


죽은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의에 맞게 고쳐 쓰인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르네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크레타의 미궁에 사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신화도 사실은 문화를 꽃피우던 크레타를 침략해서 멸망시킨 그리스인들의 전쟁 이야기를 미화시킨 것이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 승자들이 편의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거나, 가장 재미있는 버전으로 각색시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이야기꾼에 의해 꾸며진 것이다. 윤리·철학적 질문과 판타지 SF 요소를 가미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억》의 세계로 떠나보자. 






르네 톨레다노, 서른두 살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는 동료 엘로드를 따라 <판도라의 상자> 최면 공연에 참석했다가 심층 기억을 헤집어 전생의 기억을 파헤치는 실험적인 최면술의 첫 번째 피험자가 된다. 그는 '영웅적인' 전생 1917년 슈맹 데 담 전투에 참가했던 이폴리트 펠리시에 상병의 최후를 목격한다.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연장을 뛰쳐나왔다가 독일군을 연상시키는 행색의 강도를 만나 몸싸움을 벌이다가 그만 그를 죽이고 만다. 시체 유기와 무기까지 숨기고 집으로 돌아온 르네는 자수를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기억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다. 그는 살인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전생의 기억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다며 <판도라의 상자> 최면술사 오팔을 다시 찾아가 기억을 지워달라고 한다. 오팔은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좋은 기억으로 덮어씌울 수는 있다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 공연장에 르네만을 위한 공연이 다시 시작된다. 르네는 이번에 가족과 평화로운 나라에서 늙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전생을 선택하고 95번째 전생의 문으로 들어간다... 



르네가 두 번째로 방문한 전생에서 그는 레옹틴 드 빌랑브뢰즈 백작 부인의 최후를 보았다. 자연사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 주변에는 재산만 노리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그다음 전생에선 카르타고와 로마가 한창 전쟁 중이던 순간에 로마의 배의 배잡이였던 제노의 모습을 본다. 르네는 앞서 백작 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제노와는 마음속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더 생생해지는 전생 탐험... 르네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전생은 가장 첫 번째 전생. 야자수가 있는 흰 백사장에서 만난 게브라는 사람의 삶이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관찰만 하는 게 아니라 르네 자신의 모습이 게브와 실제로 대면에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브와 르네 사이에는 무려 111번의 전생, 1만 2천 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게브가 전설로만 전해지는 아틀란티스인이라는 걸 알게 된 르네는 아틀란티스를 대홍수로부터 구해내어 현대에 아틀란티스 문명의 증거를 증명하고자 한다. 인류가 자신의 기원을 알게 되면 모든 게 해결될까? 수수께끼가 풀리면 불확실한 시대에 명확성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 영화로 제작되어도 재미있을 것 같은 스릴넘치는 모험과 환상적인 전생 탐험, 진짜 역사인가 착각하게 만드는 아틀란티스 문명에 얽힌 비밀까지...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나한테 111번의 전생이 있었다는 것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을 해결하고 내게 정신의 안식을 주는 

111명의 동지가 있다는 의미예요.

기억 1, 367쪽.



재미있는 사실 하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전생은 1200년 영국에 살았던 궁수라고 한다. 에릭슨 최면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그가 믿는 대로 전생이 여러 번이었다면 몇 번이고 최면을 통해 그걸 다 밝혀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비발디의 사계 클래식 버전과 하드 록 버전은 매번 책 뒷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란에 적혀있는 것 같다. 하드 록 버전을 찾고 싶었는데 아직 못 찾았다. (아시는 분은 제보 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전생을 어땠을까 혹시 방법이 있다면 알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막연하게 이런 사람이었다면 좋겠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기억 2, 398쪽)"이라고 역자는 적었지만 내 입맛엔 다소 달달구리 했다. 결말에서 르네와 그의 일행이 생각해낸 대로 인류가 일종의 '진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 미래가 태양처럼 눈부시진 않아도 기대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을지..! 완독 후에 표지를 다시 보니까 책의 내용과 연관 있게 잘 디자인된 것 같다. (1권의 표지는 게브고 2권의 표지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팽 양 이삭줍기 환상문학 3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스무 살 시인 달베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달베르는 자신의 일상과 요즘 고민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부 적어 보낸다. 달베르의 고민이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애인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 모든 건강미는 루벤스의 것이다. 또 이 정도로 맑은 윤곽을 엷은 호박색으로 채울 수 있었던 사람은 라파엘로 뿐이다. (…) 그토록 육감적인 허리의 곡선은 잠자는 안티오페의 것이고. 통통하면서도 작은 손은 다나에 혹은 막달라 마리아가 저기 손이라고 주장하겠지. (…) 내 정열을 다하여 두 팔로 부둥켜안는 연약하고 팽팽한 허리는 프락시텔레스가 조각하였어(47-48쪽)." 읽는 동안 어느 배우의 입과 어느 배우의 코와 어느 배우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이상형이라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 달베르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인은 완벽한 외모에 몸가짐과 성품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 갖춰야 한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까? 당연히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리고 달베르는 그것에 괴로워하는데 자신의 이상이 너무나도 높다는 걸 자기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편지를 쓰는데 거의 자아성찰 일기 수준이다. 읽으면서 얼마나 피시피식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 캐릭터 뭐지? 진짜 특이하다. 보통 남의 일상을 구구절절 써놓은 편지라면 엄청 지루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 데나 눈 감고 펼쳐서 읽어도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가 이 글에는 있다. 바늘 끝으로 혓바닥을 살짝 살짝 찌르는 일을 한 1억 번 반복하다 보면 이게 고통인지 쾌락인지 느낄 수 없을 지경에 오르지 않을까. 이 소설의 문장은 극단의 미학 추구와 그로 인해 찾아오는 극단의 고통이 함께 들어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세계에 압도당했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조화이지. 따라서 고르지 않게 예쁜 여자보다 한결같이 못생긴 여자 쪽이 보기에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미완성이 걸작이나 무언가 빠져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은 없어. 기름 얼룩은 변변치 못한 모직물보다 고급 직물에 묻어 있는 쪽이 훨씬 보기 싫잖아(160쪽)." 달베르는 아름다움을 한 폭의 완벽한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상주의자다. 



그런 그의 앞에 테오도르라는 청년이 시종 이스나벨을 데리고 나타난다. 달베르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적 형상과 만난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점이다. 로제트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테오도르와의 우정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치겠다고 생각하는 달베르. 



사실 테오도르는 남장여자였다. 한때 모팽 양이었던 그가 어째서 남장을 선택했는가 알려주는 편지가 이어서 나온다. 모팽 양은 모든 남성들의 세계, 여성 앞에선 절대 보여주지 않는 진짜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의 남성에게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일이 그녀가 진심으로 저주하게 된 일이 되었다. 그녀는 여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285쪽)"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 추접스러운 농담 이 난무하는 남자들끼리의 대화 기저에는 "여성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303쪽)"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달베르가 테오도르를 만난 순간 부터 이야기에는 총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달베르, 로제트(달베르의 애인), 테오도르와 이스나벨(테오도르의 시종). 이들의 관계는 사랑, 이상 그리고 동경의 끈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테오도르가 여성이라는 걸 의심하고 있던 달베르는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 「뜻대로 하세요」 상연을 기획한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맡고, 여자 주인공 로잘린드는 우여곡절 끝에 테오도르가 맡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극의 여주 로잘린드가 남장을 한다는 사실이다. 함께 연극 연습을 하면서 달베르는 점점 더 테오도르가 여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결국 로제트는 테오도르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가? 테오도르는 달베르의 바람대로 그의 여신이 되어 낙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인가? 참고로 셰익스피어의 희극 「맘대로 하세요」 에선 여주 로잘린드는 남장을 그만두고 남주와 결혼하는 걸로 결말이 난다. 






테오도르/모팽 양은 "진정한 행복이란 모든 방면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발휘하고, 자기가 될 수 있는 무엇이든 되어보는 것(507 - 508쪽)"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꿈도 꾸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다행히 이 책이 쓰인지 약 200년도 안 되어 이 행복이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모팽 양》에서는 여성을 육체와 혼의 영역, 남성을 정신과 힘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여자 주인공 모팽 양은 스스로를 그 한 쪽의 성질만 지니지 않은 "제3의 성(506쪽)"에 속해있는 이름 없는 존재 같다고 묘사한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Sleeping Hermaphroditus), 작자 미상,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리스도 이후, 고대 조각가의 특별한 장점을 이루는 그 정성으로 청춘의 미를 이상화하고 재현한 남자의 상은 하나도 없었어. 여자는 정신적 · 육체적인 미의 상징이 되었으나, 남자는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이래 완전히 실격해버렸지. (…) 따라서 양성을 구비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우상숭배를 하던 고대인으로 부터 가장 열렬히 총애를 받은 환상의 하나였던 거야.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은 이단의 천재가 창조한 상쾌한 걸작의 하나지. 완전한 남녀 두 개의 육체가 조화롭게 하나로 융화하여 우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두 개의 미가 조화를 이루어 서로 돋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뛰어난 미를 이룩하고 있어. 이보다 더 멋진 것을 이 세상에서 상상해낼 수는 없을 거야. 특히 외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막 날아가려고 하는 머큐리의 것인지, 목욕하고 나온 디아나의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그 등과 허리와 화사하고 늠름한 다리 등을 보고 느끼는 불안보다 더 바람직한 불안이 있을까? 토르소는 이름답고도 기괴한 미의 종합이야. 

본문 266-268쪽.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양성을 구비한 헤르마프로디토스(267쪽)"는 고대인들이 우상숭배했던 환상 중 하나였다. 나는 19세기의 사회상이 이런 발상의 구현을 가능케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극단적 탐미주의와 예술지상주의만이 제3의 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제3의 성'이라는 단어는 작품에서 쓰인 것과 다른 의미와 의도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제3의 성은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생물학적 카테고리에 따라 나의 성질을 정의 당하기를 거부한다.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 안에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있다. 이것을 단 한 단어로 뭉뚱그려 보려고 할 때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단어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제 그것들은 한 사람을 설명할 때에 효용성이 좋지 않은 단어로 전락했다. 생물학적 성별을 알려줄 수 있을 뿐, 그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 대해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던 중학생이었든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고등학생이었든 과거의 모든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제발 읽어보라고. 네가 고민하고 있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에 대해 훨씬 이전에 살았던 프랑스의 어느 작가가 어떤 해답을 내놓았는지 한 번 보라고. 그러면 적어도 정답은 아니더라도 참고는 되지 않겠느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닷속 유니콘 마을 - 2022 우수환경도서 Wow 그래픽노블
케이티 오닐 지음, 심연희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중한 건 언제나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본문 80쪽.




주인공 ‘라나’는 아빠와 함께 ‘메이’ 이모가 사는 바닷가 마을로 놀러 온다. 최근 이모네 마을에 커다란 태풍이 와서 이곳저곳을 보수해야 하는 일이 쌓였기에 도와줄 겸 온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엄마 ‘멜로디’와 자주 왔던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상처 입은 아기 유니콘을 발견하는 라나. 어쩌다가 다치게 된 걸까? 라나는 아기 유니콘을 이모네 집으로 데려와 다 나을 때까지 돌봐주기로 한다. 



이 책은 바다 생태계의 회복과 주인공 라나의 심리적 치유를 동시에 그려내어 독자에게 두 배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라나는 언제나 작은 생명체를 먼저 생각하고 돌봐줬던 상냥하고 강한 엄마의 뒤를 이어 바다의 수호자가 된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뛰어넘어 자신의 마음의 수호자가 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라나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눈물도 났고, 아기 유니콘과 바닷속 유니콘 마을의 환상적인 모습에 웃었다가, 라나가 아픔을 딛고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모습에 감동했다. 책을 덮고 나서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감정 표현을 할 줄 알고 말도 하는 사람을 상대로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이 꺼려 하는 일이다. 그 사람이 느끼게 될 아픔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통하고 우리와 다르게 생긴 동식물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의 감수성을 발휘하고 있는 걸까? 



나의 감수성이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같은 인간이나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자신의 취향에 맞게 귀엽고 보기 좋은 생명체에만 한정되게 발동되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만약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나무를 자를 때 수액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아프다는 비명 소리가 난다면 그리 쉽게 자연을 파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좀 과격한 발상인가?) 이질감, 혐오, 익명성, 침묵은 폭력을 불러온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려면 생김새가 다르고 의사소통 방식이 다를 뿐 그들도 나와 비슷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작가 케이티 오닐은 바다 밑에 사는 유니콘 종족의 ‘아우레’를 선택했다. ‘아우레’는 인간과 같이 말도 하고 감정도 있는 지성체로서 말 못 하는 바다를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아우레는 메이 이모에게 마을 사람들이 쓰는 플라스틱 그물 때문에 산호초가 다친다고 '바다를 더는 해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메이 이모와 마을 사람들은 순순히 그 말을 받아 주기가 힘든 것이, 만에 있는 작은 마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래전부터 계속된 고기잡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호초를 보호하면서 마을의 생계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았던 시절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플라스틱 그물을 사용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작가 케이티 오닐은 교훈적인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강요가 아니라 소통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과 유니콘 종족은 서로를 도와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산호초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왜 산호초가 파괴되며 그것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코너가 있다. 사람 혼자의 힘으로 환경 문제나 기후 변화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돕는다. 환경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내어 더 많은 이들이 생활 속 지구 돌보기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 그래픽노블의 작가 케이티 오닐이 하는 일도 그것의 연장선에 있다. 오닐은 따뜻한 그림체와 판타지적 요소를 성 소수자, 성 평등, 환경 오염 등의 사회적 이슈와 결합시켜 다양성과 포용성의 가치를 많은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녀는 『공주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로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티 드래곤 클럽』에 이어 『바닷속 유니콘 마을』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었으니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나볼 생각에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삶은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어리석다'


-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1




4월 말 어느 목요일 오후 2시에, '에스카'라고 부르는 외계 종족이 전(全) 지구인의 거실로 착륙했다. 그들은 마치 파란색 플라밍고를 닮았으며, 물고기와 새를 합쳐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는 빛나고 구멍이 뚫린 흉곽이 있고, 그곳을 통해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비교감성 신호를 내보낸다. 인류가 맞닥뜨린 첫 행성간 접촉, 사실상 전쟁 없는 "침략행위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보다 「루니툰」 쪽에 훨씬 더 가까웠다(본문 42쪽)." 이들이 전 우주적 생물들을 대표로 찾아온 이유가 뭘까?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70억 인구와 1 대 1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범우주적 공동체는 인류가 증식할 경우,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종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지만 그들이 지구에 사는 다른 동물보다 현명하진 못하다고 생각한다. "보존하는 게 귀찮아서 자신들의 행성을 서서히 망쳐 놓고 재미와 이득을 위해 서로를 학살하는(67쪽)" 존재들, 나팔총으로 마지막 남은 도도새를 쏴 죽이기 전에 노래할 기회도 주지 않은 존재들, 난폭하고 아둔하며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의견 일치를 보이는 적이 없는 인류를 우주적 평화를 위해 말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성체이고 적어도 한 번은 인류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기로 한다. 어떻게? 




가요제에 참석시킨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옛날 우주의 지성체들 사이에 일어났던 끔찍한 지각력 전쟁(Sentience War)이 끝난 후, 은하 문명을 단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 제 100회에 드디어 인류가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초대받았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에스카'는 우승은 할 필요도 없으니, 단 한 곡으로 꼴찌를 면한다면 인류를 지구에서 없애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지구가 있는 태양계를 대표해서 나갈 음악가 리스트도 개최 측에서 이미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었다. 이들의 조사활동이 아주 쬐-금 구식이라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이미 한물갔거나 죽고 없었다. 잠깐 인기를 얻고 혜성 같은 속도로 사라진 '앱솔루트 제로스' 라는 밴드를 이끌었던 영국인에게 인류의 운명이 달려있다! 일렉트로펑크풍 글램록의 창시자 데시벨 존스, 드러머 겸 키보드 구타자 겸 구세주 역할 미라 원더풀 스타, 만능 악기 연주자 오르트 세인트 울트라바이올렛 이렇게 세 사람이었던 밴드엔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생물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곧 갖게 될 것 같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전이나 후에는 모두 다 괴물이 된다' 


-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23




이 책은 알루니라즈, 케셰트, 이위즈, 에스카 같은 기상천외한 외계인들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 과거 개최된 그랑프리 가요제 이야기,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의 이야기,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주의 법칙이 담겨있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되돌리고 싶은 과거, 아름답고도 어리석은 현재, 입장하는 내일이라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며, '음악으로 세계 평화, 아니 우주 평화를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SF 소설가의 대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제정신이 아니다. 현란하게 장식된 긴 문장이 계속되어서 읽는 도중에 주어와 목적어를 잊어먹고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익숙해지기 전까지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책이다. 한창때 이름을 날린 뮤지션과 다양한 록 하위 장르 용어에 익숙하고 유로비전 팬이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특유의 냉소적이고 나사 풀린 개그도 기꺼이 받아 줄 수 있다! 하는 사람 또한 이 책의 독자로서 적절하다. 스페이스 오페라 집필에 영감을 준《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에게도 권한다. 






정말이지 에스카는 예전에 진짜 성질이 더러웠어.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데다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어. (중략) 방대하고 우수한 기술을 지닌 은하 문명이 갑자기 침공하자 우리의 인식이 뭔가 급격히 뒤집혀서 우리가 똘똘 뭉친 게 아닐까 싶어. '파란 새의 눈'은 성간 히트곡 「제발 우리를 소각하지 말아요,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고 약속할게요」로 청중들의 넋을 빼놓았지. 우리는 10등을 했어. 그건 스캔들에 가까운 대사건이었어. 그때까지 신입 참여자가 그렇게 높은 등수를 차지한 적이 없었거든. 지금까지도 그 노래의 저작권료로 우리 행성의 방위산업비 전액을 충당하고 있다니까. 


본문 74 - 75쪽. 


"내가 다만 궁금한 건……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제발 부탁이야. 모든 게 굉장히 좋았어. 사냥꾼 엘머가 마침내 벅스 버니를 잡은 것처럼 다 좋았다고. (…) 내가 언제 개판을 만든 거지? 그날 밤에?"


(중략)


케셰트족 너구리판다의 눈에 무한한 시간선과 가능성이 은하 지도 속 점들처럼 펼쳐졌다. 매우 정확한 운명의 눈금과 분기점과 맥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 속 어느 깊은 여름밤에 번쩍 터졌다가 꺼진 폭죽처럼 휙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외외가 데시벨의 무릎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다르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240 -241쪽.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안 되죠. 우주선과 외계인도 그렇고 혹시나 지구로 영영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하지만 말하는 고양이까지 참아 준다고는 안 했잖아요. 너무 나갔다고요.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이건 장르를 벗어난 거예요. 당장 본래대로 돌려놔요!"


20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
짐 홀트 지음, 노태복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 짐 홀트는 서문에서 지식에 목마른 사람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약속을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군이론, 무한대와 무한소, 튜링의 계산 가능성과 ‘결정 문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소수와 리만 제타 추측, 범주론, 위상수학, 고차원, 프랙털, 통계 회귀분석 및 ‘종형곡선’, 진리 이론 같은 위대한 지적 성취를 그것을 발견한 과학자, 철학자, 수학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여 칵테일 파티에서 잡담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핵심을 집어 상쾌하게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사상을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과 연관 지어 사고를 확장함으로써 전문가들도 심심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다니... 저자의 약속대로 이 모든 것이 한 권의 책에 담겨있다면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책 반열에 오를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 된다. 책에서 규정하는 문외한에 속하는 나는 저자가 나열한 지적 성취 목록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머지 절반은 처음 들어보기에 다소 불안하지만 일단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땠을까? 이하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소개한다. 





과학이, 윤리와 만나는 순간.


우생학으로 악명이 높은 프랜시스 골턴 경은 찰스 다윈의 외사촌이었다. 1859년에 외사촌이 발표한 종의 기원이 없었다면 골턴 경은 빅토리아 시대의 비주류 과학자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윈이 인용한 농부들이 더 나은 품종을 얻으려고 사육 동식물을 교배시킨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신체적 특성의 진화만 주로 생각한 다윈을 뛰어넘어, 골턴은 동일한 유전학적 논리를 재능이나 미덕과 같은 정신적 자질에 적용했다(본문 86쪽)." 


골턴 경은 본성 대 양육이라는 문구를 처음 내놓은 사람이다. 우생학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본성이 양육보다 더 지배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통계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골턴 경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심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지문 패턴을 구별하여 모든 지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경찰 수사에 위대한 도약을 가져왔다. 또한 프로이트 보다 수십 년 먼저 단어 연상 기법을 고안해서 자신의 무의식을 파헤쳤다. 


1900년에 그레고르 멘델의 완두콩에 대한 유전 연구 덕분에 우생학의 위상이 급부상했다. 1911년  골턴 경이 8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전 세계에서 그의 우생학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적용한다. 골턴 경이 죽기  4년 전에 인디애나 주 입법기관은 최초로 주 불임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확인된 범죄자, 백치, 정박아, 그리고 강간범의 번식을 금지하기 위한' 법이었다. 우생학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 강제 거세를 당한 것이다. 캐나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에서도 이런 강제 거세가 이루어졌고, 우생학 운동은 유럽 전역, 남아메리카, 일본에까지 퍼졌다. 물론 우생학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전개된 곳은 독일이었다. 본래 골턴의 우생학 이론에 인종 개념은 큰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우생학은 인종위생학으로 탈바꿈했다. 후에 나치의 실험이 우생학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고, 유전학자들의 반박을 받아 우생학 운동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끝이 난 걸까?


우생학을 실천하는 방법은 긍정적 우생학과 부정적 우생학으로 나뉜다. 좋은 자질을 키우는 것과 부정적인 자질을 억제하는 것이다. 인류가 인간 게놈에 알게 되어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자유방임형 우생학이 실천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배아 선택' 기법을 이용해서 유전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출산할 것인지 여부를 부모가 결정하게 하는 것은 부정적 우생학에 포함될 수 있다. SAT 고득점이나 푸른 눈과 같은 올바른 특성을 지닌 난자 기증자에게 높은 보수를 제공하는 것은 긍정적 우생학이다. 좀 더 적극적인 우생학은 배아 세포의 유전적 내용물을 직접 건드려서 자녀의 유전을 유도해내는 방식이다. 


골턴 경의 우생학은 인류 향상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유전자 편집, 설계된 아이를 만드는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개인적 향상을 목표로 지능이나 신체운동 능력  또는 행복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아내 부모가 자녀를 개량할 수 있게 된다면 개량화된 계급과 그렇지 않은 자연상태로 태어난 계급이 나뉘는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 


버트런드 러셀은 자서전에 자신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수학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에드워드 프렌켈은 대놓고 플라톤주의자를 자처하면서 10대 때 수학적 발견을 이뤘을 때 기억을 마치 첫 키스와 같았다고 썼다. 고등수학을 배운 사람은 수학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자연스럽게 결부시킨다고 한다.... 하하... 수학을 너무나 싫어했던 학생이었던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 패스. 


그래도 좀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사람들을 삶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해주며 경이로움과 기쁨을 안겨다 주는 수학의 매력이 존재한다는 건 진짜인 것 같다. 150년 전에, 영국 지도에 색칠을 하던 학생이 모든 지도를 구별해서 색칠하는 데 단 네 가지 색깔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추측을 했다. 그 가설이 옳은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자와 철학자들이 달려들었다. 1976년 6월에 수학자 보르강 하켄이 케네스 아펠과 함께 컴퓨터 알고리즘의 정보 처리 속도를 이용해 이 증명이 참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수학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들은 아펠과 하켄의 증명에 불만족스러워했다. 그중 첫 번째 이유가 "아름답지 못하다"였다. 책에는 이런 흥미로운 일화가 많이 나온다. 


아름다움의 오래가는 특징에 가까운 것은 단순성이다.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도 이를 칭송했으며, 오늘날의 물리학자들도 단순성에 찬사를 보낸다. 다른 요소들이 전부 동일하다면, 방정식이 더 짧을수록 아름다움은 더 커진다. 그런데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끈이론은 어떠할까? 추종자들 중 한 명이 농담 삼아 했던 말대로, '에잇, 젠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끈이론이 지금까지 내놓은 결정적인 방정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본문 310쪽, 「끈이론 전쟁, 아름다움은 진리인가?」 중에서...


저자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 원리'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100만 년 후의 문명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은 두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바로 수학과 웃음이다. 코페르니쿠스 원리는 "오랫동안 존재해온 것들은 앞으로도 더 오래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와 달리 최근에 생긴 것들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62쪽)."라는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100만 년 후 후손들의 수학과 웃음 코드가 어떤 것일지 추측해보자. 수학은 인류 문명의 가장 보편적인 요소라고 여겨지는 만큼 예측하기 쉬울 것이다. 반면에 그들의 웃음 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수학과 웃음의 위치가 지금과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잠시 버트런드 러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1907년 30대 때 수학을 찬미하는 글을 썼다가 80대 후반에 자신이 젊었을 때 했던 수학에 대한 모든 찬미를 '대체로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늙은 러셀에게 수학은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며, "동어반복으로 구성(68쪽)"되어 있었다. 저자는 러셀에게 일어난 일이 인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859년에 독일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논문에서 제시한 이후로 전 세계의 수학자들이 풀어내지 못한 '리만 제타 가설'이 해결된다면 어떨까? 수학자들에게 수학은 불가사의가 아니라 네발동물은 동물이다라는 진술처럼 동어반복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만 제타 가설이 100만 년 후에 학생들에게 농담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철학, 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논할 만한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가? 


헛소리의 본질을 탐구하는 도덕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를 따라가는 24번째 글 「아무 말이나 하세요」에선 "철학자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본질이 있으리라고 결코 생가지 않는 것들의 본질을 알아내려는 직업적인 성향(본문 465쪽)"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편도선 수술을 마친 비트겐슈타인이 꺽꺽거리면서 "차에 치인 개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친구 프랑크푸르트는 "차에 치인 개가 어떤 느낌인지 넌 모르잖아"라고 받아쳤다. 프랑크푸르트가 친구의 비유적 표현에 불만을 가진 이유는 그 말이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헛소리와 거짓말의 차이는 헛소리는 말의 진리성에 무관심한 태도에서 나오고, 거짓말은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거짓말쟁이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동일한 게임 - 진리의 권위에 의해 정의되는 게임 - 의 정반대 측면을 행하고 있다. 헛소리하는 자는 이런 게임을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 및 진실을 말하는 자와 달리, 헛소리하는 자는 자신이 옳다고 여겨서 하는 말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다. (중략) 바로 그 점 때문에 헛소리는 매우 위험하다. 헛소리는 진리를 말하기에 부적격한 사람으로 만든다. 

본문 467쪽, 「아무 말이나 하세요」 중에서... 



프랑크푸르트는 거짓말과 헛소리를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중고차 판매원은 차를 팔기 위해서 알면서도 헛소리를 한다. 그런가 하면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 처럼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캐나다 작가 로라 페니는 거짓말과 헛소리에 관한 프랑크푸르트의 이론의 모호성을 탐구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G. A. 코헨은 자신의 논문에서 프랑크푸르트가 간과했던 학술적 저술에 등장하는 헛소리를 추가한다. 그러면서 더 정확한 범주를 제시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다양한 사람의 손에 의해 "진리에 대한 의심(472쪽)"이 계속된다. 특정 분야를 막론하고 하나의 지적 발견은 계속해서 탐구되고 검증받으며 지적 성취가 된다. 


진리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발상은 기이하게 보일지 모른다. 제정신이 사람이라면 누구도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 또는 '탄소 배출이 기후변화를 초래한다' 또는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와 같은 진술이 있을 때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판가름난다는 데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명제들 -옳음과 그름에 관한 주장,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원대한 역사적 서술, 가능성에 대한 논의, 관찰 불가능한 실체에 관한 과학적 진술 등 - 의 경우, 진리의 객관성은 지켜내기가 더 어렵다. (윌리엄스의 표현대로) 진리의 '거부자들'은 우리 각자가 자신만의 견해에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관해 나름의 이야기를 지어내어, 일종의 권력 행사로서 그것을 남에게 들이민다는 것이다. 

본문 472쪽, 「아무 말이나 하세요」  중에서. 



◆ 



저자가 20년 동안 <뉴요커>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연재한 글을 모아 놓은 책인 만큼 다양한 분야와 주제가 독자를 기다린다. 도서 비평, 글로 옮긴 브이로그 같은 느낌의 글도 있다. 책에 실린 모든 글의 공통적인 특징은 수학, 과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특정 지적 성취를 주목하고 그와 관련된 인물의 생애, 당시 학계의 반응과 대응, 지적 성취의 발전 과정을 저자 짐 홀트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종말론적 결과들을 요약해야겠다. 우주는 세 가지 최후를 맞을 수 있다. 빅크런치(최종적인 붕괴), 빅칠(꾸준한 속도로 영원한 팽창), 또는 빅크랙업(점점 더 가속되는 영원한 팽창). 인류도 세 가지 최후를 맞을 수 있다. (중략) 그들이 아무리 멋진 이론과 시나리오를 내놓든 간에, 우주 종말론 연구자들은 할리우드 영화제작사의 우두머리들과 아주 비슷한 처지다. 즉 누구도 뭐가 뭔지 모른다. 

본문 344쪽, 「우주는 어떻게 끝나는가?」 중에서.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전적으로 독자의 사전 지식과 흥미분야에 따라 달라질 텐데, 독서 전에 달달한 간식을 준비해두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수학을 다뤘던 2부 ~ 5부를 읽는 동안 뇌를 가지고 찰흙 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ㅋㅋㅋ 확실한 건 당신의 입맛에 맞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을 적어도 한 개 이상 발견할 거라는 점이다. 아인슈타인과 괴델과 함께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뛰어들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