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팽 양 이삭줍기 환상문학 3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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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스무 살 시인 달베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달베르는 자신의 일상과 요즘 고민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부 적어 보낸다. 달베르의 고민이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애인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 모든 건강미는 루벤스의 것이다. 또 이 정도로 맑은 윤곽을 엷은 호박색으로 채울 수 있었던 사람은 라파엘로 뿐이다. (…) 그토록 육감적인 허리의 곡선은 잠자는 안티오페의 것이고. 통통하면서도 작은 손은 다나에 혹은 막달라 마리아가 저기 손이라고 주장하겠지. (…) 내 정열을 다하여 두 팔로 부둥켜안는 연약하고 팽팽한 허리는 프락시텔레스가 조각하였어(47-48쪽)." 읽는 동안 어느 배우의 입과 어느 배우의 코와 어느 배우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이상형이라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 달베르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인은 완벽한 외모에 몸가짐과 성품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 갖춰야 한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까? 당연히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리고 달베르는 그것에 괴로워하는데 자신의 이상이 너무나도 높다는 걸 자기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편지를 쓰는데 거의 자아성찰 일기 수준이다. 읽으면서 얼마나 피시피식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 캐릭터 뭐지? 진짜 특이하다. 보통 남의 일상을 구구절절 써놓은 편지라면 엄청 지루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 데나 눈 감고 펼쳐서 읽어도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가 이 글에는 있다. 바늘 끝으로 혓바닥을 살짝 살짝 찌르는 일을 한 1억 번 반복하다 보면 이게 고통인지 쾌락인지 느낄 수 없을 지경에 오르지 않을까. 이 소설의 문장은 극단의 미학 추구와 그로 인해 찾아오는 극단의 고통이 함께 들어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세계에 압도당했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조화이지. 따라서 고르지 않게 예쁜 여자보다 한결같이 못생긴 여자 쪽이 보기에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미완성이 걸작이나 무언가 빠져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은 없어. 기름 얼룩은 변변치 못한 모직물보다 고급 직물에 묻어 있는 쪽이 훨씬 보기 싫잖아(160쪽)." 달베르는 아름다움을 한 폭의 완벽한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상주의자다. 



그런 그의 앞에 테오도르라는 청년이 시종 이스나벨을 데리고 나타난다. 달베르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적 형상과 만난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점이다. 로제트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테오도르와의 우정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치겠다고 생각하는 달베르. 



사실 테오도르는 남장여자였다. 한때 모팽 양이었던 그가 어째서 남장을 선택했는가 알려주는 편지가 이어서 나온다. 모팽 양은 모든 남성들의 세계, 여성 앞에선 절대 보여주지 않는 진짜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의 남성에게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일이 그녀가 진심으로 저주하게 된 일이 되었다. 그녀는 여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285쪽)"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장, 추접스러운 농담 이 난무하는 남자들끼리의 대화 기저에는 "여성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303쪽)"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달베르가 테오도르를 만난 순간 부터 이야기에는 총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달베르, 로제트(달베르의 애인), 테오도르와 이스나벨(테오도르의 시종). 이들의 관계는 사랑, 이상 그리고 동경의 끈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테오도르가 여성이라는 걸 의심하고 있던 달베르는 셰익스피어의 낭만희극 「뜻대로 하세요」 상연을 기획한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맡고, 여자 주인공 로잘린드는 우여곡절 끝에 테오도르가 맡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극의 여주 로잘린드가 남장을 한다는 사실이다. 함께 연극 연습을 하면서 달베르는 점점 더 테오도르가 여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결국 로제트는 테오도르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가? 테오도르는 달베르의 바람대로 그의 여신이 되어 낙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인가? 참고로 셰익스피어의 희극 「맘대로 하세요」 에선 여주 로잘린드는 남장을 그만두고 남주와 결혼하는 걸로 결말이 난다. 






테오도르/모팽 양은 "진정한 행복이란 모든 방면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발휘하고, 자기가 될 수 있는 무엇이든 되어보는 것(507 - 508쪽)"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꿈도 꾸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다행히 이 책이 쓰인지 약 200년도 안 되어 이 행복이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모팽 양》에서는 여성을 육체와 혼의 영역, 남성을 정신과 힘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여자 주인공 모팽 양은 스스로를 그 한 쪽의 성질만 지니지 않은 "제3의 성(506쪽)"에 속해있는 이름 없는 존재 같다고 묘사한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Sleeping Hermaphroditus), 작자 미상,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리스도 이후, 고대 조각가의 특별한 장점을 이루는 그 정성으로 청춘의 미를 이상화하고 재현한 남자의 상은 하나도 없었어. 여자는 정신적 · 육체적인 미의 상징이 되었으나, 남자는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이래 완전히 실격해버렸지. (…) 따라서 양성을 구비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우상숭배를 하던 고대인으로 부터 가장 열렬히 총애를 받은 환상의 하나였던 거야.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은 이단의 천재가 창조한 상쾌한 걸작의 하나지. 완전한 남녀 두 개의 육체가 조화롭게 하나로 융화하여 우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두 개의 미가 조화를 이루어 서로 돋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뛰어난 미를 이룩하고 있어. 이보다 더 멋진 것을 이 세상에서 상상해낼 수는 없을 거야. 특히 외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막 날아가려고 하는 머큐리의 것인지, 목욕하고 나온 디아나의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그 등과 허리와 화사하고 늠름한 다리 등을 보고 느끼는 불안보다 더 바람직한 불안이 있을까? 토르소는 이름답고도 기괴한 미의 종합이야. 

본문 266-268쪽.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양성을 구비한 헤르마프로디토스(267쪽)"는 고대인들이 우상숭배했던 환상 중 하나였다. 나는 19세기의 사회상이 이런 발상의 구현을 가능케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극단적 탐미주의와 예술지상주의만이 제3의 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제3의 성'이라는 단어는 작품에서 쓰인 것과 다른 의미와 의도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제3의 성은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생물학적 카테고리에 따라 나의 성질을 정의 당하기를 거부한다.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 안에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있다. 이것을 단 한 단어로 뭉뚱그려 보려고 할 때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단어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제 그것들은 한 사람을 설명할 때에 효용성이 좋지 않은 단어로 전락했다. 생물학적 성별을 알려줄 수 있을 뿐, 그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 대해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던 중학생이었든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고등학생이었든 과거의 모든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제발 읽어보라고. 네가 고민하고 있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에 대해 훨씬 이전에 살았던 프랑스의 어느 작가가 어떤 해답을 내놓았는지 한 번 보라고. 그러면 적어도 정답은 아니더라도 참고는 되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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