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삶은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어리석다'


-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1




4월 말 어느 목요일 오후 2시에, '에스카'라고 부르는 외계 종족이 전(全) 지구인의 거실로 착륙했다. 그들은 마치 파란색 플라밍고를 닮았으며, 물고기와 새를 합쳐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는 빛나고 구멍이 뚫린 흉곽이 있고, 그곳을 통해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비교감성 신호를 내보낸다. 인류가 맞닥뜨린 첫 행성간 접촉, 사실상 전쟁 없는 "침략행위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보다 「루니툰」 쪽에 훨씬 더 가까웠다(본문 42쪽)." 이들이 전 우주적 생물들을 대표로 찾아온 이유가 뭘까?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70억 인구와 1 대 1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범우주적 공동체는 인류가 증식할 경우,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종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지만 그들이 지구에 사는 다른 동물보다 현명하진 못하다고 생각한다. "보존하는 게 귀찮아서 자신들의 행성을 서서히 망쳐 놓고 재미와 이득을 위해 서로를 학살하는(67쪽)" 존재들, 나팔총으로 마지막 남은 도도새를 쏴 죽이기 전에 노래할 기회도 주지 않은 존재들, 난폭하고 아둔하며 하나의 문제에 하나의 의견 일치를 보이는 적이 없는 인류를 우주적 평화를 위해 말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성체이고 적어도 한 번은 인류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기로 한다. 어떻게? 




가요제에 참석시킨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옛날 우주의 지성체들 사이에 일어났던 끔찍한 지각력 전쟁(Sentience War)이 끝난 후, 은하 문명을 단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 제 100회에 드디어 인류가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초대받았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에스카'는 우승은 할 필요도 없으니, 단 한 곡으로 꼴찌를 면한다면 인류를 지구에서 없애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지구가 있는 태양계를 대표해서 나갈 음악가 리스트도 개최 측에서 이미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었다. 이들의 조사활동이 아주 쬐-금 구식이라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이미 한물갔거나 죽고 없었다. 잠깐 인기를 얻고 혜성 같은 속도로 사라진 '앱솔루트 제로스' 라는 밴드를 이끌었던 영국인에게 인류의 운명이 달려있다! 일렉트로펑크풍 글램록의 창시자 데시벨 존스, 드러머 겸 키보드 구타자 겸 구세주 역할 미라 원더풀 스타, 만능 악기 연주자 오르트 세인트 울트라바이올렛 이렇게 세 사람이었던 밴드엔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생물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곧 갖게 될 것 같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 전이나 후에는 모두 다 괴물이 된다' 


-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23




이 책은 알루니라즈, 케셰트, 이위즈, 에스카 같은 기상천외한 외계인들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 과거 개최된 그랑프리 가요제 이야기, 데시벨 존스와 앱솔루트 제로스의 이야기,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주의 법칙이 담겨있는 『고구나르 고어캐넌의 없앨 수 없는 보편 사실』, 되돌리고 싶은 과거, 아름답고도 어리석은 현재, 입장하는 내일이라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며, '음악으로 세계 평화, 아니 우주 평화를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SF 소설가의 대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제정신이 아니다. 현란하게 장식된 긴 문장이 계속되어서 읽는 도중에 주어와 목적어를 잊어먹고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익숙해지기 전까지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책이다. 한창때 이름을 날린 뮤지션과 다양한 록 하위 장르 용어에 익숙하고 유로비전 팬이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특유의 냉소적이고 나사 풀린 개그도 기꺼이 받아 줄 수 있다! 하는 사람 또한 이 책의 독자로서 적절하다. 스페이스 오페라 집필에 영감을 준《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에게도 권한다. 






정말이지 에스카는 예전에 진짜 성질이 더러웠어.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데다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어. (중략) 방대하고 우수한 기술을 지닌 은하 문명이 갑자기 침공하자 우리의 인식이 뭔가 급격히 뒤집혀서 우리가 똘똘 뭉친 게 아닐까 싶어. '파란 새의 눈'은 성간 히트곡 「제발 우리를 소각하지 말아요,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고 약속할게요」로 청중들의 넋을 빼놓았지. 우리는 10등을 했어. 그건 스캔들에 가까운 대사건이었어. 그때까지 신입 참여자가 그렇게 높은 등수를 차지한 적이 없었거든. 지금까지도 그 노래의 저작권료로 우리 행성의 방위산업비 전액을 충당하고 있다니까. 


본문 74 - 75쪽. 


"내가 다만 궁금한 건……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제발 부탁이야. 모든 게 굉장히 좋았어. 사냥꾼 엘머가 마침내 벅스 버니를 잡은 것처럼 다 좋았다고. (…) 내가 언제 개판을 만든 거지? 그날 밤에?"


(중략)


케셰트족 너구리판다의 눈에 무한한 시간선과 가능성이 은하 지도 속 점들처럼 펼쳐졌다. 매우 정확한 운명의 눈금과 분기점과 맥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 속 어느 깊은 여름밤에 번쩍 터졌다가 꺼진 폭죽처럼 휙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외외가 데시벨의 무릎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다르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240 -241쪽.



"이건 아니에요! 이러면 안 되죠. 우주선과 외계인도 그렇고 혹시나 지구로 영영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하지만 말하는 고양이까지 참아 준다고는 안 했잖아요. 너무 나갔다고요.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이건 장르를 벗어난 거예요. 당장 본래대로 돌려놔요!"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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