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주가가 높아지고 있는 야쿠마루 가쿠 작가님 책을 처음 접해봤다.
정말 표지 감각적으로 잘 뽑았다. 이 책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말기 암으로 여명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쾌락의
노예가 된 연쇄살인범과 목숨을 걸고 그 범인을 추적하는 중년의 말단 형사의 이야기이다. 일각을 다투는 이들의 모습을 모래가 스르륵 쏟아지는
모래시계로 표현한 것 같다.
범인을 전반부에서 이미 밝히고 시작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왜?"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와이더닛' 미스터리로 긴장감과
몰입감은 감소하지 않는다.
(스포일러 포함)
데이 트레이더로 서른 남짓한 나이에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은 사카키 신이치. 그러나 그는 말기 위암 선고와 함께 늘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던 살인 욕망을 봉인 해제하여 그 대상을 찾아 변장을 하고 밤거리로 나선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범인을 잡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만년 말단 형사 아오이 료. 그는 최근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풋내기 형사 야베와 함께 좇는다. 그에게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것을 줄곧 원망하는 스무 살 딸 미즈키와 십 대 아들 겐고가 있다. 그
역시 위암이 재발하여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이끌리듯 그는 사건을 집요하게 좇는다.
뛰어난 스토리텔링
초반부에 자꾸 이것저것 할 일들로 인해 맥이 끊겨서 몰입이 힘들었는데 딱 한번 리듬 타니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다.
읽으면서 내용의 빠르면서도 빈틈없는 진행, 등장인물 네 명의 관점이 카메라의 방향처럼 바뀌면서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것, 대사들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고 내레이션과 조화를 잘 이루는 점 등에서 이 작가가 각본가 출신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자님 후기를 보니 영화에 대해서
공부하고 각본가적인 마인드가 있는 작가였다. 역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각본가 출신 작가들의 책은 믿고 보는 편이다. <잊혀진 소년>, <범죄자 1, 2>로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작가 중 한 명인 오타 아이, 그리고 일본 드라마 <언페어>이 원작소설인 <추리소설>을 쓴 하타 다케히코
등 각본가 출신 작가들은 흡사 한 편의 영화 혹은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동감 있는 대사들과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도록 글을
쓰는 것 같다. 역자님 후기에 이 작품도 단편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물의 매력
책을 읽고 또 추천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 중 하나가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이다 보니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이 이해가 되고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만년 말단 형사 아오이는
일본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자주 소비하는 클리셰같은 성격이긴 하다. 가족보다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 우선인, 외곬수라서 가족과 조직에서도
백안시당하고, 형사의 감에 지극히 의존적인, 그리고 그 감이 결국 맞는 캐릭터의 형사. 무례하고 부하 형사에게도 무정하지만 결국은 부하
형사에게도 인정받고 알고 보면 무척 속정 깊고 마음 여린 스타일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매우 전형적이고 신선할 것이 없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스토리와 매력적인 주변 인물들의 선방으로 역시 빛나는 캐릭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아내 유미코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2년 전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그리고 가볍고 사명감이라고는 없어보이는 풋내기 형사 야베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타입의 아오이와 조를 이루어 수사하며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졌지만 이내 어엿한 한 명의 형사로 성장해 나간다. 그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독자로서 기쁨이었다.
가족의 의미라는 메시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존재인 사람인 것 같다. 즉, 가족이 아닐까? 하지만 역시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가족인지도 모르겠다. 사카키를 괴물로 만들어 인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인간의 마음을 상실한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은 가족이었다.
반면, 아오이는 엄마의 임종도 지키지 않았다며 자신을 원망하며 사사건건 엇갈렸던 딸 미즈키와 부모의 존재감이라고는 없는 십 대 아들 겐고와
마지막 시간들에 화해와 용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연쇄살인범이 된 사카키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불우한 환경이었다고 해서 누구나가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범죄자를 향한 시선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과 밝은 면, 즉 양면성이 있는데 어떤 부분이 더욱 발현되고 발전되어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는 역시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최악의 인간이어도 우호적인 환경을 만나면 인성의 그나마 좋은 부분이 드러날 수 있고,
최선의 인간이어도 불친절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모든 좋은 부분이 고사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자기 속에 어두운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자신을 두려워하고 그 욕망을
봉인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이해심 많은 청년이었던 사카키. 그런 그의 모습과 사카키의 소꿉친구이자 사카키의 비밀을 알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의
곁에 있어주고자 했던 사카키의 유일한 구원이었던 스미노. 사카키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경찰에 그를 신고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그녀. 모두가 안타까웠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책으로는 처음 만난 작품이었다. <A가 아닌 너와 (미번역)>라는 동 저자의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단편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소년 범죄의 문제를 꽤 리얼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봇물 터지듯이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