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낯선 곳에 가면 의외의 자기 속의 용기와 순발력, 근성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도쿄뿐만이 아니라, 단 며칠이지만 여행을 떠났던 곳들이 여러 곳 보여서 가슴이 두근두근, 뭉클뭉클하기도 했다. 내겐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바닷마을 가마쿠라. 오사카, 교토와는 또 다른 느낌의 일본의 전통과 서양의 문화가 함께 느껴졌던 고베 등 내가 책 속의 그 길들을 거닐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홋카이도에서 체류한 저자분들이 없어서 살짝 아쉽긴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서 한 달 살고 써야 하나? ^^)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뭘 했나? 생각해 봤다.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봤다. 물론 그 전에도 대학원에서 여름방학 동안 며칠 동안 교수님과 클래스메이트들과 게이오 대학 학생들과의 세미나, 일본 기업 견학 등 일주일 정도 갔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교수님이 인솔하셨고 일본어 잘하는 클래스메이트들을 따라 다니면 됐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원 공부는 살짝 뒷전으로 미루고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학부 4학년 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어학 준비가 부실했던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특히 어학은 준비가 많이 되어 있을수록 많은 것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마태 효과'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가진 것도 빼앗기는 것이다. 어학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일단 두렵기 때문에 더 소극적으로 되고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도 위축이 된다. 당연히 얻는 것도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 어느 정도의 실수가 있을지라도 전반적인 상황을 매니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더 도전해 보고 그러면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래서 기껏해야 방학 동안이지만 학교 내의 어학당도 세 코스 정도 다니고, 한국 어학당에 와 있던 일본 동생들과 언어교환을 하고 바로 일본어능력시험 1급을 동시에 준비했다. 뭘 하면 적당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교환을 할 때도 3, 4시간씩 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동생들은 부모님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분들이셔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했는데 무척 성실하고 열의가 있었다. 1시간 반 정도 한국어학당에서 배운 것들 중에서 모르는 것을 내게 물었고 나도 능력시험과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중에서 보고 모르는 것들을 물었다. 능력시험 1급 정도의 문법과 어휘 정도면 일본어의 기본적인 이론 정도는 마스터할 수 있고 원어민인 동생들에게 물어가며 감을 익힐 수 있어서 일본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일본어다운 일본어라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소통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감이 있었다. 앞으로는 현지에서 현지인들과 소통하며 fine-tuning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도쿄 북부 이타바시 구, 한 정거장 더 가면 사이타마였던 변두리의 작은 여학생 기숙사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국제센터 담당자분을 따라 다니며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구청에 가서 처리할 일들, 외국인 등록증 등등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동네 지나가다가 봤던 중고매장에서 작은 브라운관 TV를 5천엔인가 주고 사서 낑낑대며 기숙사까지 나르고 학교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다녔다. 그때 마침 일본 야구의 자이언츠가 승리해서 그 계열사 기업들이 일대 세일에 들어가서 Bic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도 하나 샀다. 그리고 이케부쿠로 역 서쪽 출구로 나와 길을 걷거나 지하 상가에서 걷다 보면 그즈음 한참 유행했던 히라이 켄의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익히 알려진 외국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히라이 켄의 부드럽고 허스키한 음색과 예스럽고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노래가 저절로 재생된다. 도쿄 예술극장 안에 있는 기념품 숍을 드나들며 엽서도 사고, 기숙사가 있던 동네 역 바로 앞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무슨 책들이 있나 둘러도 보고 동네 드럭스토어에서 샴푸, 치약 등 생필품도 사고 100엔 숍에서 몇 가지 물건 등 삶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추억에도 잠겨 보고 또 가 봤지만 몰랐던 곳들을 체크하면서 다음 여행을 기약해 보기도 했다.
역시 문화, 미디어 매체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경우는 솔직히 커리어를 위해 지극히 타산적이고 계산적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계획했었고 필요에 의해 생활했었는데, 저자분들을 보니 일본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들을 통해 접했던 일본의 면면에 동경을 품고 일본에 입성한 분들이 많았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연출해 내는가가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서울이라는 곳도 매체를 통해 감성과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오히려 내국인들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그렇게 더 아름다운 도시가 되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이라는 곳. 섬나라라는 것이 양날의 칼이어서 섬이라는 한계 때문에 대륙 진출의 야욕을 품기도 했고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취약성을 가지긴 했지만 반면에 섬이라서 고립되었기에 전통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근대화 이후 그 전통문화와 근대문화가 공존함으로 인해, 서양인 뿐만 아니라 동양인에게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특유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외세의 침략에 바람 잘 날 없었던 우리나라는 지금 이 정도도 정말 대단한 것이다. 끊임없이 무너지고, 포화에 초토화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첨단 도시, 아시아에서 손꼽는 메트로폴리탄의 모습을 갖추었다. 급조된 도시라는 느낌, 내게도 있지만 그것조차 대단한 것이다. 동정과 애정을 품게 된다. 이제부터 만들어갈 모습을 기대하며 우리나라의 모든 곳들을 어루만지고 품어주고 싶다.
저자분들이 공개한 숨겨진 보석같은 곳들, 여행의 꿀팁들을 살려 여행 갈 계획을 다시 한번 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