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별 기대 없이 책장을 팔랑팔랑 넘겨 보다가 그대로 푹 빠져서 끝을 본 책이다. 데뷔한 지는 꽤 된 작가이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비교적 최근이기도 하고, 그 책을 안 읽어봤던 터라 왠지 모를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난 제목이 너무 파격적이거나 특이하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 편이라 이렇게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라니, 내가 이해하지 못할 트릭 같은 게 담겨 있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나를 선택해 준 것처럼 내 품에 폭 다가왔다. 여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데, 하나같이 다 허를 찌르고 마지막 한 방이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 아가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의 모티브를 가져와서 남동생을 살해하려던 계획을 꿈꾸던 남자가 맞닥뜨린 웃지 못할 현실에 한 방 맞았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하나쯤 "기회만 된다면" 그에 편승하여 죽이고 싶은 사람 한둘쯤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나의 내면을 찔린 기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만 있다면" 이런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도 한둘쯤 있을 수 있다는 섬뜩한 한 방이기도 했다.

 

 

맘에 들었던 것은 조용하고 고즈넉한 시골마을 할머니집이라는 절대 안전한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 휴가계를 내고 무조건 할머니집으로 쳐들어간 손녀. 그 손녀 곁을 떠나지 않는 고양이. 밤만 되면 고양이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듯이 한 곳을 응시한다. 바쁜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로 와서 시간이 남아도는 손녀는 추리 신공을 발휘하여 수수께끼를 푼다. 그 진실은 의외로 쓸쓸한 것이었다. 경제대국이나 고령자대국인 일본에서 자주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일,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머지 않아 자주 접하게 될 수 있는 일이기에 씁쓸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낸 손녀도 대단하지만, 손녀가 도시에서 어떤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이 깡촌으로 온 건지 이미 알고 있었던 할머니, 그리고 그것을 알고 도도함을 버리고 손녀의 손에 몸을 맡겨 위로해 준 고양이. 이들이 진짜 대단한 탐정이다.

 

 

그리고, SF적 요소가 마구 버무려져서 뭔가 대단한 트릭이 있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진실과 트릭은 매우 간단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과 어디선가 나타난 네코마루 선배가 밀실 사건처럼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듯했던 사건을 가뿐히 해결해 버린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허무하면서도 납득을 하게 했다.

 

 

참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인 것 같다. 엄청 진지하고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을 막 파헤치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허를 찌르고 부침개 뒤집듯 휙 뒤집어 버려서 너무 심각하지 않게 끝내주는 스타일 너무나 내 스타일이다. 그 모든 것의 기본은 제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을 만큼의 탄탄한 필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구라치 준 작가가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인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미스터리 입문서로 유명하다고 한다. 아마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고 이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될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츠지무라 미즈키나 야쿠마루 가쿠 등의 작가들도 작품이 알려지며 그 앞 작품들까지 역주행하며 인기가 높아지던데 구라치 준 작가도 분명 그럴 것 같다. 워낙에 작품을 적게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작품이 많이 소개될 것 같다.

 

 

다만, 한국 독자로서 일본과 전쟁이라는 소재가 맞물리면 아무래도 근육이 경직되는데,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전쟁 상황에 비밀 실험을 하던 격리된 실험동에서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라서 무조건 마음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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