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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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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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친구네 집에 가서 놀아도 돼?"라고 물었네. 이때 "물론이지"라고 허락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숙제를 다 하고 나서"라고 조건을 다는 부모도 있네. 놀러 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부모도 있겠지. 이는 모두 아이를 ‘의존’적이고 ‘무책임’한 위치에 놓이도록 하는 행위일세. 그러지 말고 "그런 건 스스로 결정해도 돼"라고 가르쳐줄 것.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가 있으면 제공해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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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포기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지금까지의 나’가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말하자면 무덤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네. 그렇게 해야 겨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현실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까?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네.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괴로워도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걸세. 그리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긍정할 수 있도록 ‘이대로 좋은’ 이유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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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노이로제는 생각이란 틀 속에 감정을 구겨 넣을 때 생긴다.

노이로제가 생기는 원인은 안 되는 걸 자꾸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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