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본 - 박노해
열정 어린 청년들이 먼 길 찾아와 투명창 너머로 반갑게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예요?
자나깨나 혁명이란 화두이시겠지, 시대정신, 미래진보,희망찾기, 맞죠?
가만히 웃음짓다가 말없이 돌아왔네
그래 맞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거?
끝도 없이 걷고 싶은거,
걷다가 쓰러져 영영 잠들지라도 마냥 걷고만 싶은거
여자의 부드러운 살 부비고 싶은 거,
찬 바닥에 누울 때마다 그리운 건 여자의 따스한 온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하며 밥 먹는 거
좋은 사람과 향기 좋은 차를 나누며
나직이 가슴을 열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거
아휴 요 무정한 녀석들, 영치물도 안 넣어주고 갔네
불쌍한 우리 죄수들 목 빼고 앉아 기다리는데......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게 사람살이의 기본인데,
운동의 기본인데,
배고픔 앞에선 자유도 민주도 인권도 다 뒤로 밀리는 건데,
철없어라 종아리 한 대씩 찰싹찰싹, 깨달았니?
사랑하는 친구들아 잘 들어
꽃고 열매의 기본은 흙과 씨알 뿌리야
몸 받고 태어나 몸으로 사는 인간의 기본은 먹고 사는 것이야
나라 살림의 기본은 경제와 안보야
진보운동의 기본은 사람이고 민중생활이고 현실 삶이야
기본에 철저해야 해
기본에 충실해야 해
기본을 건너뛴 자는 반드시 무너지는 거야
그러나 기본을 넘어서야 해
기본을 뚫고 나가야 해
기본에만 붙박힌 자는 반드시 쇠망하는 거야
이건 만고의 진리이고 역사의 교훈이야
지난 시대의 성취와 패배에서 이거 못 배우면 우린 미래가 없어
자기 먹고 살 것과 사회적 힘과 성취를 이미 다 해결한 채
인간의 기본을 건너뛰고 나라 경영의 기본에는 무능한 채
절대이념에만 목청 높이는 진보 지식인을 경계해야 해
자기 먹고 살 것은 물론 사회적 기득권과 특권까지 다 누리고 움켜진 채
이념이 아닌 인간, 경제와 안보, 세계가 저런데 우리나라 꼴은,
도덕과 밥 질서, 입만 열면 기본을 팔아 기본을 사는
보수 지식인들을 경계해야 해
눈 밝게 뜨고 정직하게 삶의 안팎을 뚫어보며
기본에 충실하면서 기본을 넘어서야 해
사랑하는 친구들아
생활민중의 눈으로 보고 생활민중의 몸으로 생각해야 해
다음에 온 친구들이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걷는 거, 여자, 밥 먹는 거, 이야기하고 싶은 거죠, 맞죠?
아휴 요 착한 녀석들, 아직도 멀었구나
다시 종아리 걷어 찰싹찰싹, 깨달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