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 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하느님의 가차 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느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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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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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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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호르몬이 많아지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던데..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새끼처럼
덥썩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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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1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자주 읽다보면 없는 감수성이 생기는 것 같아요.. ㅎㅎㅎ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쳐
더는 나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쳐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들풀처럼 너의 한계를 넓혀가라
파도처럼 너의 미래를 넓혀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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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본 - 박노해


열정 어린 청년들이 먼 길 찾아와 투명창 너머로 반갑게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예요?
자나깨나 혁명이란 화두이시겠지, 시대정신, 미래진보,희망찾기, 맞죠?
가만히 웃음짓다가 말없이 돌아왔네
그래 맞아, 하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거?
끝도 없이 걷고 싶은거,
걷다가 쓰러져 영영 잠들지라도 마냥 걷고만 싶은거
여자의 부드러운 살 부비고 싶은 거,
찬 바닥에 누울 때마다 그리운 건 여자의 따스한 온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얘기하며 밥 먹는 거
좋은 사람과 향기 좋은 차를 나누며
나직이 가슴을 열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거 

아휴 요 무정한 녀석들, 영치물도 안 넣어주고 갔네
불쌍한 우리 죄수들 목 빼고 앉아 기다리는데......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게 사람살이의 기본인데,
운동의 기본인데,
배고픔 앞에선 자유도 민주도 인권도 다 뒤로 밀리는 건데,
철없어라 종아리 한 대씩 찰싹찰싹, 깨달았니?

사랑하는 친구들아 잘 들어
꽃고 열매의 기본은 흙과 씨알 뿌리야
몸 받고 태어나 몸으로 사는 인간의 기본은 먹고 사는 것이야
나라 살림의 기본은 경제와 안보야
진보운동의 기본은 사람이고 민중생활이고 현실 삶이야

기본에 철저해야 해 
기본에 충실해야 해 
기본을 건너뛴 자는 반드시 무너지는 거야 
그러나 기본을 넘어서야 해 
기본을 뚫고 나가야 해 
기본에만 붙박힌 자는 반드시 쇠망하는 거야

이건 만고의 진리이고 역사의 교훈이야
지난 시대의 성취와 패배에서 이거 못 배우면 우린 미래가 없어
자기 먹고 살 것과 사회적 힘과 성취를 이미 다 해결한 채
인간의 기본을 건너뛰고 나라 경영의 기본에는 무능한 채 
절대이념에만 목청 높이는 진보 지식인을 경계해야 해
자기 먹고 살 것은 물론 사회적 기득권과 특권까지 다 누리고 움켜진 채 
이념이 아닌 인간, 경제와 안보, 세계가 저런데 우리나라 꼴은,
도덕과 밥 질서, 입만 열면 기본을 팔아 기본을 사는 
보수 지식인들을 경계해야 해
눈 밝게 뜨고 정직하게 삶의 안팎을 뚫어보며
기본에 충실하면서 기본을 넘어서야 해

사랑하는 친구들아
생활민중의 눈으로 보고 생활민중의 몸으로 생각해야 해

다음에 온 친구들이 
선생님, 지금 가장 절실한 게
걷는 거, 여자, 밥 먹는 거, 이야기하고 싶은 거죠, 맞죠?
아휴 요 착한 녀석들, 아직도 멀었구나
다시 종아리 걷어 찰싹찰싹, 깨달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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