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스펙트럼 - 석가모니에서 무묘앙 에오까지, 그 깨달음의 궤적 깨달음의 스펙트럼 1
김현철 지음 / 시단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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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존재라면 나도 이미 존재라는 얘긴데 왜 굳이 깨달아야 하는가? 굳이 깨달을 필요 없다.

그런데 살다보면 신호가 오는 때가 있다. 어떤 신호가 올까? 고통이라는 신호가 온다. 그러면 그대는 저절로 약을 찾게 된다. 그대는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거나 약 비슷하게 생긴 거라면 뭐든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때 결국 만나게 되는 게 깨달음이다.

그러니 왜 깨달아야 하느냐고 미리 묻지 마라. 고통이라는 삶의 신호가 그대를 발견하는 순간 ‘왜?‘는 흔적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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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연은 일렬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연은 동시에 도처에서 한꺼번에 발생한다. 이런 동시발생의 증거는 바로 가까이에 있다. 책 읽기를 중지하고 위를 보라. 당신은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무한하게 많은 과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태양은 빛나고, 심장은 고동치고, 새들은 노래하고, 아이들은 뛰놀고, 폐는 숨을 쉬고, 개는 짖고, 바람은 불고,귀뚜라미는 울고,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있다. 계속해서 예를 들 필요가 있을까?

이런 현상들은 시간적으로 차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도처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이전도 이후도 없다. 다른 말로, 자연이 선형으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은 시간으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은 동시 다발적인 존재 전체이고, 그것이 영원의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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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사실은 그대의 고통을 필요로 해서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대는 "아니 내가 왜 고통을 원합니까? 내 유일한 소원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내가 고통을 붙잡아두다니요?"라고 반박하겠지만, 그건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럼 왜 사람들이 고통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고통이 허망함보다는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에고는 근본적으로 이분법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그 상대방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 상대방이 어떤 것이건 최소한 상대방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왜냐하면 이분법에 근거한 에고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내 앞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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