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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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소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굳이 되짚어보면 서른 이후가 아니었을까. 특히 결혼 이후. 얼마 전에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내 삶이 소설과 다르지 않았기에 소설이 재미없지 않았나 싶어요." 단편소설은 그나마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신춘문예 등을 통해 조금씩 접했으나 장편소설은 아주 드물게 읽었다. 누군가 그랬다고 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장편소설을 읽다보면 그 말이 생각난다. 재미있는 장편소설을 잡으면 일상을 작파하게 된다.

 이번에 읽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 그랬다. 276쪽에 목차 대신 20개의 번호가 달린 소설을 말 그대로 단숨에 읽다시피 했다. 번호로는 정확히 중간인 10을 기준으로 주인공인 장군이 친구 콘라드를 만나기까지70여년의 시간을 거슬려 기억하고, 친구를 만나 친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 걸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단 하루 동안의 일이다. 전날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 날 오전이 채 되기 전까지.

 

 "그런 일들은 먼훗날 비로소 다시 생각난다. 몇십 년이 흘러가고, 누군가 세상을 떠난 어두운 방 안을 거닐고 있으면, 갑자기 오래 전에 사라진 말과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그 몇 마디 말이 삶의 의미를 표현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내 삶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그제서야 그 일이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고는 잠시 멍해진다. 그런 일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갈수록 새록새록 떠오르고, 되새기고, 정돈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서야 잠잠해지기도 한다. 소설의 주인공 역시 어느 날, 떠나가버린 친구를 기다리며 떠올린다. 어머니와 함께 쇼팽을 피아노로 연주한 친구를 두고 아버지와 주고받은 말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해했음을.

 

 "콘라드는 절대로 훌륭한 군인이 못 될 거다."

 "왜요?"

 아들은 놀라 물었다.

...

 "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던 그 친구로 인해 주인공은 사십일 년 동안 자신을 저택의 한 켠에 유폐시켜버린다. 그리고 말한다.

 

 "참 신기하게도 기억은 쌀과 뉘를 골라낸다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보면,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 그런데 사냥 갔던 일이나 책의 한 구절, 아니면 이 방이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이 곳에 있었를 때는 세 사람이었지. 그 때는 크리스티나가 살아 있었어."

 

 사십일 년을 두 가지 질문을 묻기 위해 기다렸지만, 결국 답은 독자가 짐작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말한다. "다 부질없는 일이지."

 

 헝가리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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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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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을 처음 만난 건 영화였다.

 토니륭과 제인 마치가 주연했던. 당시 19세의 제인 마치는 소설 속 '소녀'에 딱 어울리는 그런 소녀였다. 토니륭 또한 부유한 중국 남자이면서 너무나 여린 속을 지닌  '그'는 걸맞게 퇴폐적이어서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영화를 본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두 사람이 밀애를 나눴던 그 공간은 눈에 선하다. 소설에서 그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시의 소음이 매우 시끄러웠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 소리는, 너무 크게 들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 소리 같다.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방은 어두웠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 안에 파묻혀 있었고, 도시라는 기차 안에 실려 있었다. 창문에는 유리창이 없었고, 발과 블라인드만이 내려뜨려져 있었다. 햇빛은 받아 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발 위에 어른거렸다. 늘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였다. 블라인드 때문에 그 그림자들에는 줄무늬가 나 있었다. 나막신들의 딸그락거리는 소리들이 머릿속을 때리듯 울렸고, 목소리들은 날카로웠다. 중국어는 소리를 지르며 말하는 언어여서 나는 마치 사막의 언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야릇한 언어였다."

 

 그렇게 소녀는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 메콩 강을 건너는 나룻배에서 그를 만나 그 곳으로 갔다. 일 년 반이 지나고 난 뒤의 소녀를 두고 작가는 말한다.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하고, 결코 물어본 적도 없다. 다만 가장 싱그러운 젊은 날을, 생애에서 가장 축복 받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따금 충격적인 시간들이 후려치곤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소녀는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여자들을 두고 말한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녀는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알고 있다. 결코 그와 결혼을 한다거나 오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식당에 앉아 남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 깨달음을 다시 느낀다.

 "갑자기 고통이 느껴진다. 아주 경미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에게 입힌 생생하고 신선한 상처에서 느껴지는, 빗나간 심장의 고동이다.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는 이 사람, 오늘 오후 내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이 사람이 나에게 입힌 상처."
 
 마르그리트 뒤라스, 본명 마르그맅리트 도나디외는 70세에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등을 썼고,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연인>을 두고 자전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어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비평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은 없지만, 내 작품은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것들입니다." 고 레이먼드 카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창작물은 결국 창작자의 삶의 결과물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예전에 샀던 책을 못찾아 2011년에 다시 사두고 끝까지 읽지 못했다. 책의 마지막 뒷표지를 덮고 내다본 창밖 5월의 연초록이 내 몸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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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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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를 걸쳐 이십 대까지 사랑한 - '사랑'이었다 - 작가는 헤세와 도스토옙스키, 까뮈 등이었다. 까뮈의 스승이기도 한 장그르니에의 <섬>이 서문은 까뮈의 글로 시작한다. 알제에서 스무 살에 처음 이 책을 읽고 받은 충격을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환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이십 대,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도 그 낯모르는 젊은 사람이었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읽은 책이다. 이십 대에 이 책을 읽고 기억하는 구절은 없다. 하지만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 책을 읽은 이후 '섬'이라는 말을 듣거나 글자만 봐도 숨이 멎고 발걸음이 멎었다. 여행중이었던 어느 낯선 도시의 거리 간판 이름 <섬>을 발견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걸 기억한다.

 기차 여행길에 다시 읽으면서, 글의 시작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저마다의 일생에서,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8개의 꼭지글 중에 처음의 '공의 매혹'이 좋았다.

 서문 중 옮긴 이 김화영은 이렇게 썼다.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을 '가만히 일어서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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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 인생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열 명의 그녀들
이화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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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던 버지니아 울프의 두꺼운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버렸는데, 다시 얇은 책으로 두 권을 사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을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저자인 이화경은 "인생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이 되어준 열 명의 그녀들"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녀들은 제인 오스틴, 조르주 상드, 실비라 플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버지니아 울프, 잉케보르크 바하만, 로자룩셈부르크,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이다.

 책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로 시작된다. 그리고 '머리말'에서 "...친구는 우리가 선택한 가족이라던가."라고 말한다.

 밑줄이 가장 많이 그어져 있는 부분은 한나 아렌트에 대한 글이었다.

 

"...말하기의 무능함, 생각의 무능함,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판단의 무능함)이 결합되면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가 부활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녀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사유가 멀마나 즁요한지를, 인간이라면 목숨 걸고 사유해야한다는 진실을 담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그녀에게 "사회적 불복종은 지적 성취의 필수요건"이었기 때문이다...평전 작가 김상웅은 "지식인知識人의 글자에는 화살 시자와 창 과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은 지식인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철학자로 불리는 대신 정치사상가로 호명받기를 원했던 한나 아렌트. 국외자인 유대인이자 세계 내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이며, 정치적 참여를 가장 치열하게 했던 무국적자 한나 아렌트는 "세계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진한다"라는 괴테의 말을 철저히 실천했던 정치사상가이자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진정한 '앎'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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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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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음이 공포로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연고를 바르기 전에 연고에 적힌 깨알보다 작은 '주의사항'을 읽어보려는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악몽을 꿀 때, 아무리 발버둥치고 소리를 질러도 꼼짝 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다초점 안경을 쓰고도 선명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특히 시력이 좋았던 나로서는 불가해한 일이었다.

 이 책의 저자 장 아메리는 그 '늙어감'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쓰고 있다. '4판 서문'에는 앞서 책을 출간했을 때, "고작 쉰다섯 살의 이 '젊은 인간 J.A.가 늙어감이, 나이를 먹는다는 일이 뭔지 대체 알기는 하겠어? 그런데도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겠다는 거야?"하고 '정말 고령의 신사'가 엄혹하게 비판했던 일을 두고 말한다.

 

 "나는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유쾌한 노인의 이 말이 심히 유감스럽지만 틀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옳았다. 아, 이런! 나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경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말했던 것을 강조했으면 강조했지 축소하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다. 모든 게 내가 예견했던 것보다 더욱 나빠졌을 따름이다. 몸의 늙어감, 문화적 늙어감, 음울한 표정의 사내가 다가오는 게 매일 더욱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일 등등. 그 음울한 사내는 내 곁을 스쳐지나가며 마치 저 라이문트 발렌틴처럼 기괴할 정도로 음산하게 나를 부르곤 했다. "친구, 어서 오게...""

 

 그러니까 저자는 이 책을 1968년에 출판하고, 그 후 10년이 지난 1977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살아있음과 덧음이 흐르는 시간...일단 반항을 시작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없다."(P.51)

 

 "이로써 생각함이라는 위험지대를 벗어나 습관이라는 편안함으로 후퇴하는 것일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치 시간을 잘 아는 양 행동하는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하리라."(P.52)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P53)

 

 "곧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소름끼침은, 우리 인간의 근본 정서 가운데 일부인 소름끼침은 거울 앞에서 물러나 평소 일상에 뒤덮여 하루 일과를 감당하느라 잊힐 따름이다...그럼 돌연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것, 곧 '나 아닌 나'가 평소 익숙한 나를 문제 삼으면서 충격과 경악이 고개를 든다."(P. 61)

 

 "늙어감의 기본 상태라는 게 있다면 이 상태는 비참함과 불행함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비참하다는 말은 어떤 고통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렴풋함 의식이 가져다 주는 답답함이다. 그리고 불행함이란,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실존의 공간을 채우는 어떤 '확신'이다.

 

 2년 전, 이 책을 읽고 수첩에 옮겨 둔 글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는 '늙음'과 '죽음'이 아닌가. 외면하지 않고 직면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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