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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 제1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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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그림자도 묻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정정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 그러했다
- 시집 권두시

나희덕의 「천장호에서」는 고요한 산정호수의 풍경을 통해 일상을 살아내는 각 개인의 지난한 관계맺음을 노래하고 있다. '얼어붙은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는 작은 일탈의 행동이고 그 행동 후에 시적 화자에게 관찰되는 것은 '새떼 대신 메아리만 정정 날아오르'는 쓸쓸한 풍경이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 그러했다'라는 진술은 앞의 풍경과 조응하여, 관계의 단절 뒤에 찾아오는 숙명적인 고독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시적 화자는 삶의 근원적인 고통에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다. 나희덕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가 보여주는 단아하고 알찬 세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별자들의 고독과 그 고독에 대한 차분한 응시에 닿아있다. 풍경과 자아가 구체적 모습을 가지고 조우하는 순간을 시인은 예리한 눈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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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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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에게 있어서도 '눈'은 중요한 시적 모티프이자, 시의 출발점이다.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밭에 기침을 하자'고 말했던 김수영의 간절한 외침처럼, 황지우에게 있어서의 '눈'이라는 자연물은 그 자연물로서의 의미를 넘어, 시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하는, 흡사 게릴라와 같은 모습으로 시의 전면에 부각된다.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는'(「12월의 숲」) 현실 속에서 시인은 '눈 맞는 겨울나무 숲'으로 간다. 이것은 황지우 개인의 실존적 고뇌이자, 반민주적 정권의 군화 아래 짖눌리는 당대 민중들의 모습이다.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나무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버리고
인근 산의 적설량(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 12월의 숲, 부분

눈이 함북히 쌓인 겨울나무숲은 그것 자체로 현실의 알레고리가 되고, 시인은 눈 맞는 겨울나무숲에서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한 냉혹한 현실에서도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 그것을 기다리면서 부단히 '그 기다림의 대상에게로 가는 일'이 황지우가 일궈낸 소중한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황지우에게 있어서의 '눈'의 의미가 보다 극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작품은 「눈보라」라고 할 수 있다. 눈이라는 속성이 그렇듯이, 눈은 그 서늘하도록 느린 움직임으로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세상을 뒤 덮는다. '눈보라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는 동시에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즉, 모순에 찬 우리의 현실을 어떤 모순지점의 꼭대기까지 데려다 놓아준다. '오류 없이 깨달음 없'다는 선언문적인 구절은 지나간 현실, 그냥 쉽게 지나쳐버린, 즉, 소통하지 못한 과거와의 대화를 가능케해서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또다른 '깨달음'을 가능하게 해준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에서의 '무등산'은 '현실'의 등가물로 쓰이고 현실을 뒤엎어 현실을 호도하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눈'의 이미지를 역전시켜 그 눈은,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지나간다. 이성복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아픔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아픔이야말로, 살아있음의 뜨거운 경보 장치로서 작용한다. 그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눈보라는 그런 '아픔'과 같은 의미물로서 작용하는데, '네 몸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라는 '아픈' 인식을 끌어냄으로서, 삶의 괴로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슬픔이 독이 되고, 희망이 광기가 되어버리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시인은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픈 시대를 '눈보라'라는 극적 상황에 의해 전경화 시켜낸다. 눈보라가 훑고 지나간 길, 그 길은 결국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켜주고, 마침내,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라는 비장한 현실 인식을 가능케한다.

이 시에서의 '눈'의 의미는 일견 세상을 뒤덮어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이미지를 전복시킴으로서, 그 눈이 감싸고 있는(어쩌면 은폐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을 가능케 하는 객관적 상관물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현실 인식 속에서 시인은 진정한 '길'을 추구하게 되고, 그 길의 추구를 '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보편적 인식에 이르게 함으로서 자칫 무디어 지고 무화될 수 있는 우리의 현실 인식을 쇄신시켜준다. 그것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서 지각을 환기시키는 시적인 방법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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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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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의 동두천 연작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눈'이나 허둥대는 '바람 소리', 첩첩이 둘린 '안개'와 같은 비극적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들로 메워져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차는 멎고 눈이 내'린다.(「동두천 1」) 동두천이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표출되는 김명인의 초기 시편들은 사회 역사적 체험과 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혼혈아'나 '배트남'이 등장하는 여러 시편들의 비극적인 정서 속에는 그러한 고통을 '눈'이라는 포근한 이미지로 감싸안으려는 시인의 실존적인 고민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러한 '눈'의 이미지는 '눈'을 순간적인 것, 즉 영원적인 것의 반대물로 인식한 기형도의 시적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보인다.)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동두천 1」)라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시인의 실존적 고뇌는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면서 시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픈 속살 같은 '동두천'이라는 공간은 흔히 시련을 상징하는 '눈'의 이미지와 동시에 폭신하게 쌓인 눈더미의 모순적인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동두천의 시편들에서도 눈의 이미지는 이어진다. 즉, '날마다 눈 덮이고'(「동두천 2」) 그 눈 속에서 잠자고 있는 아픈 현실은 김명인의 실존적 고뇌와 더불어 살아 숨쉬면서 우리에게 지각의 쇄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잠자고 있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한다. 소통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동두천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위에 내리는 눈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고 역사와 개인, 이념과 현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이라는 것이 비교적 가시적인 자연물로서 현실의 아픔을 드러내어 준다면, '안개'의 이미지는 그것보다는 덜 가시적이지만(안개의 속성이 그렇듯이) 그 속곳에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그만두었고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첩첩 안개 속으로 다시 부딪혀 떠나면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 '동두천 3' 부분

위의 구절에서처럼 '안개'라는 자연물은 냉혹한 현실이 그 안에 감추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어주는 역할을 해준다. 이 '안개'의 이미지는 기형도의 안개의 이미지와도 흡사한데, '누구나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개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그 당시 민중들의 불투명하고 불안한 의식을 드러내 주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자연물로 작용한다.

김명인이 발 디디고 있는 시적 공간, '동두천'이라는 공간은 이렇게 추운 겨울 날, '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다. 시인은 이것을 '눈', '안개'라는 자연물로 전경화 시키면서 우리의 나날의 역사적인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길 없음, 집 없음의 우리 현실은 그러한 자연물에 의해서 극적으로 전경화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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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혀 문학과지성 시인선 48
김현 엮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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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 정 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低音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이 되어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앙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꿈의 해저로 내려가는 사다리
그 어딘가에 너는 산다고 했다
그곳에 카메라를 내리고
나는 수백 번의 서터를 눌렀다
너의 가슴을 담기 위하여
너의 아픔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물푸레 사이에서 셔터를 누르고
돌고래떼와 암초 사이에서
찰칵찰칵 셔터를 눌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느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것이다
- 시집 중에서

그리움의 상념은 몰(沒)시간성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고, '울/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스스로' 모든 것을 배운다. '잠드는 법을 배우고' '일어서는 법' '떠오르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부재중'이라는 괴로움이 주는 일종의 에너지다. 문제는 기다림의 방법이다. '低音'으로, '해저'로 가라앉아본 사람만이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을 볼 수 있다, 라고 쓴다. 갑자기, 세상이 너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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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문학동네 포에지 2000 2027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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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관한 독서
이 문 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 시집 중에서

* 98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시창작수업을 듣고 있었고, 암송 과제로서 이 시를 외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초겨울 바람에 떨고 있었다. 오늘, 몇 십년만에 내렸다는 폭설의 흔적을 가늠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이 시를 웅얼거렸다. 이 짧은 시 안에 시인은 얼마나 큰 잠언을 품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걸어간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詩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려야 한다.

내가 부러 문을 만들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할 때. 내 안의, '어둠에도 메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을 조금은 다독여야 할 때. 詩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된다. 나는 다만 그 뜨거움의 때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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