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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평점 :
김명인의 동두천 연작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눈'이나 허둥대는 '바람 소리', 첩첩이 둘린 '안개'와 같은 비극적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들로 메워져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차는 멎고 눈이 내'린다.(「동두천 1」) 동두천이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표출되는 김명인의 초기 시편들은 사회 역사적 체험과 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혼혈아'나 '배트남'이 등장하는 여러 시편들의 비극적인 정서 속에는 그러한 고통을 '눈'이라는 포근한 이미지로 감싸안으려는 시인의 실존적인 고민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러한 '눈'의 이미지는 '눈'을 순간적인 것, 즉 영원적인 것의 반대물로 인식한 기형도의 시적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보인다.)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동두천 1」)라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시인의 실존적 고뇌는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면서 시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픈 속살 같은 '동두천'이라는 공간은 흔히 시련을 상징하는 '눈'의 이미지와 동시에 폭신하게 쌓인 눈더미의 모순적인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동두천의 시편들에서도 눈의 이미지는 이어진다. 즉, '날마다 눈 덮이고'(「동두천 2」) 그 눈 속에서 잠자고 있는 아픈 현실은 김명인의 실존적 고뇌와 더불어 살아 숨쉬면서 우리에게 지각의 쇄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잠자고 있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한다. 소통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동두천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위에 내리는 눈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고 역사와 개인, 이념과 현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이라는 것이 비교적 가시적인 자연물로서 현실의 아픔을 드러내어 준다면, '안개'의 이미지는 그것보다는 덜 가시적이지만(안개의 속성이 그렇듯이) 그 속곳에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그만두었고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첩첩 안개 속으로 다시 부딪혀 떠나면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 '동두천 3' 부분
위의 구절에서처럼 '안개'라는 자연물은 냉혹한 현실이 그 안에 감추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어주는 역할을 해준다. 이 '안개'의 이미지는 기형도의 안개의 이미지와도 흡사한데, '누구나 안개의 주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개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그 당시 민중들의 불투명하고 불안한 의식을 드러내 주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자연물로 작용한다.
김명인이 발 디디고 있는 시적 공간, '동두천'이라는 공간은 이렇게 추운 겨울 날, '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다. 시인은 이것을 '눈', '안개'라는 자연물로 전경화 시키면서 우리의 나날의 역사적인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길 없음, 집 없음의 우리 현실은 그러한 자연물에 의해서 극적으로 전경화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