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문학동네 포에지 2000 2027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길에 관한 독서
이 문 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 시집 중에서

* 98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시창작수업을 듣고 있었고, 암송 과제로서 이 시를 외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초겨울 바람에 떨고 있었다. 오늘, 몇 십년만에 내렸다는 폭설의 흔적을 가늠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이 시를 웅얼거렸다. 이 짧은 시 안에 시인은 얼마나 큰 잠언을 품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걸어간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詩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려야 한다.

내가 부러 문을 만들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할 때. 내 안의, '어둠에도 메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을 조금은 다독여야 할 때. 詩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된다. 나는 다만 그 뜨거움의 때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