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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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면 생생하게 풍경이 다가오고, 투명인간이 되어 오필리아와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원문이 좋기도 하겠지만,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가님의 수고로움과 탁월한 글쓰기에 놀라울 때가 많았습니다. 번역된 글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원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오랜만이네요. 저는 이번에 엘리자베스 문 작가님의 책이 처음인데, 정말 좋아서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번역가님이 번역한 엘리자베스 문 작가님의 글을 읽어도 지금 받은 인상과 느낌일지 궁금해지네요...^^;;; )

이 책의 첫문장,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축축한 흙은 시원했지만 두피는 이미 땀으로 스멀거렸다.' 정말 기가 막힌 첫 문장 아닌가요?! ^^ 여과되는 것 없이 감각이 바로 피부로 투과되는 거 같더라구요. 매 장 넘기며 슥슥 적어내려가는 필사 역시 쉽게 다음 장 다음 장으로 넘어갔어요. 그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힘이 느껴지는 구절이 많았어요.

레이어를 쌓아올리듯이, 씹고, 곱씹는 듯한 표현은 감정을 점점 짙고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의 '오래된 목소리'VS '새소리'와 외부의 '괴동물' VS'인간들'이 오필리아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를 대비시킴으로써 우리가 가진 '늙고, 피지배계층의 여성'에 대한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시선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이어떻게 내면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자아는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지도 알 수 있어요. 결국 오필리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한 세계와 한 세계를 평화롭게 이어주지요. 책을 덮고는 '와~!! 이 책 SF히어로물이었네요... '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가 그동안 봐온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는 힘이 세고, 잘 싸우잖아요. 그리고 미지의 악당은 늘 나쁘고, 뭔가를 파괴하는데, 실은 싸우면서 더 파괴되는 세상을 보며, '이렇게 싸워서 이겨봤자, 저 망가진 세상에 살아가는 것도 끔찍하겠어.'란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들(그런 작품을 만든 이들)의 논리는 "망가져도 멸망하진 않았잖아.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아?!"인데...

이 책은 미지의 악당은 악당이 아니고, 그냥 미지의 괴동물인거죠. 그리고 수용과 소통을 통해 '오필리아'라는 여성이 한 세계와 한 세계를 '조용하고 평화롭게' 이어주죠. 그 어떤 폭력을 용납하지 않아요. 오필리아는 기다리고, 설득하고, 인정하고, 수용하죠. 그 가운데, 괴동물들에게는 존경과 신뢰를 받는 둥지수호자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괴동물과 처음 만나 소통하여 두 세게를 잇는 대사가 되지요. 또 암석 해변의 모든 도시들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됐지요. 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결말인가요? 그 결말로 다가가는 과정 역시 감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오필리아가 가진 외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지혜와 수용, 평온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단호한 용기에 빠지게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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