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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강 ㅣ 캐트린 댄스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평점 :

감상
작가 제프리 디버는 세밀한 조사, 교묘한 플롯, 충격적인 반전이 특징인 스릴러계의 거장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은 ‘링컨 라임 시리즈’인데, 디버는 이 ‘링컨 라임 시리즈’ 7권에서 등장했던 캐트린 댄스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추가로 냈다. 시리즈 1권 《잠자는 인형》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후, 작가는 ‘링컨 라임 시리즈’와 ‘캐트린 댄스 시리즈’를 번갈아 출간하고 있다.
1권에서 이미 말한 부분이지만, 다시 캐트린에 대해 소개한다. 캘리포니아 연방 수사국(CBI)의 특별수사관 캐트린 댄스. 그녀는 심문과 동작학의 전문가다. 동작학이란, 주로 비언어적 표현들, 즉 표정, 몸짓, 태도 등을 분석하여 상대의 심리를 간파하는 학문이다. 거짓말은 해도 신체 언어는 통제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때 대상은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는데, 동작학 전문가들은 이 스트레스 반응에서 진실을 감지하고 추적한다. 동작 분석가인 캐트린은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진실을 꿰뚫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 거짓말탐지기’라고도 불린다.

2017년 3권 《XO》가 나온 후, 약 5년 만에 출간된,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네 번째 권, 《고독한 강》. 캐트린은 1권에서 컬트 집단의 리더, 2권에서 사이버 폭력(스포일러라 언급을 자제한다), 3권에서 스토커와 대적했다. 이번에 그녀가 맞닥뜨린 대상은 스너프 필름을 제작하는 이들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캐트린은 CBI의 타 부서 및 DEA(마약 단속국) 등의 타기관들과 함께 ‘파이프라인 소탕 작전’이라는 합동 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작전은 캘리포니아 주 갱단들의 수송망을 무력화시키는 작전이다. 범죄 조직의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 한 정보원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캐트린. 한데 그가 조직의 구성원이자 킬러였다. 캐트린은 그가 조직원인지 간파하지 못했다. 그녀의 동작학이 실패한 것이다.
정보원은 캐트린을 속이고 유유히 탈출한다. 그를 놓친 책임을 지고, 캐트린은 수사과에서 쫓겨나 민사부로 옮기게 된다. 형사 사건을 담당하지 않기 때문에 총기도 지닐 수가 없다. 민사부에 가게 된 캐트린에게 배정된 사건은 다름 아닌 클럽 화재 사건이었다.
사고가 난 곳은 ‘솔리튜드크리크(책 제목과 동일하다)’란 이름의 클럽이다.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이 클럽에서 갑자기 화재가 났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클럽 안은 매캐한 탄내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찬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 비상구로 몰려든다. 그러나 비상구는 막혀 있었고, 사고가 터진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인명 사고가 난 것이다.
탈출하기 위해 한쪽 방향으로 몰리고 몰린 끝에, 사람들은 몸싸움을 하고, 부딪치고, 깔리고, 밟는다. 이 때문에 중상을 입은 부상자에 압사를 당한 사망자까지 생긴다. 캐트린은 곧 이 사건이 평범한 화재 사건이 아니라, 범인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임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범인 안티오크를 추적한다.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범인 대부분이 그렇듯, 4권의 범인 안티오크 또한 지능적이고 교활하다. 조심성 많고 치밀한 성격, 그리고 대담한 행동력을 발휘한다.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인 데다가,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탓에 캐트린도 골머리를 앓는다. 그는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른다. 영화관, 작가 사인회가 열리는 대형 홀, 놀이공원 등. 그가 범행을 시도하는 장소들이다. 다수가 모이는 곳, 밀폐되기 좋은 곳. 사람들의 원초적인 반응을 볼 수 있는 곳. 혼란, 공포, 히스테리, 광기, 폭력, 이기주의를 극한으로, 또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곳.
불특정 다수를 일부러 공포로 몰아넣고,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보며 즐기는 범인. 시리즈마다 다양한 범인들이 나왔지만, 안티오크야말로 시리즈 사상 최악의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분노가 솟구친 장면은 엘리베이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엔 임신부가 있었다. 아이와 임신부를 건드리는 짓은 정말 최악이다……. 이런 일을 저지른 범인도 문제지만, 범인은 고용된 처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후반부에 이 사실이 나와서 스포일러가 아닐까 했는데, 출판사 책소개에서 이미 공개된 부분이다). 저열하고 역겨운 인간의 본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그만큼 이번 책은 가장 짙은 농도의 악의가 깊게 드리운 시리즈였다.


이번 책, 《고독한 강》은 유난히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조명한다. 초반 클럽 화재 사고의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사건사람들은 용의자로 의심되는 무고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한다. 죄가 입증되지 않았는데 무작정 비난하고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비상사태에 의한 우발적인 패닉 상황이 아닌 경우인데 집단 광기가 발현된 부분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 《고독한 강(솔리튜드 크리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그래도 작가는 아주 절망적인 메시지만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화재가 났던 클럽, 솔리튜드크리크 클럽의 결말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인간에게는 악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선의가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에서, 위안을 얻었다.
한편 작가는 ‘솔리튜드 크리크’ 지역의 비극적인 역사를 조명하며, 자국의 아픈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이 땅은 2차 세계 대전 시기, 미국 땅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쫓아내 격리시켰던, 수용소가 있던 자리였다. 거기서 그들은 고통 받고 학대받았다. 작중 등장인물인 일본계 미국인, 나시마 하원의원은 캐트린에게 이 사실을 밝히며 이렇게 말한다.
“우린 과거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p537
이 말에 달린 각주를 보니,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죄했다고 한다. 적어도 미국은 과거를 통해 반성하고, 행동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일본은 과거를 통해 어떤 것을 배웠는가? 일본에게 저 나시마 의원의 말을 돌려주고 싶다.
이번 책에선 세 가지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된다. ‘파이프라인 소탕 작전’, ‘클럽 화재 사건’, 그리고 ‘소수계층 혐오 범죄’. 비록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각각의 독립적인 사건이 캐트린을 구심점으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사건의 전환이 자연스럽고 마무리가 깔끔해서, 사건들을 뚜렷하게 구분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노련한 솜씨가 빚어낸 결과다.
한데 마지막 사건 혐오 범죄의 경우, 캐트린의 아들, 웨스가 연루되었다. 웨스가 비뚤어진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를 만큼 타락했나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캐트린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그래도 디버 작가님은 요 네스뵈 작가님처럼 주인공을 아주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는다는 사실(?). 더불어 작가님은 캐트린의 실수, 범인을 놓친 실수에 대한 진상을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알고봤더니 작가님+캐트린의 심모원려가 만들어낸 큰 그물이었다.
《고독한 강》은 자체적으로 진화한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 생각한다. 치밀한 구성과 디테일한 묘사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속도감 있는 진행, 그리고 오늘날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제프리 디버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도 계속, 캐트린 댄스 시리즈는 계속되길.

덧.
1. 시리즈를 연속으로 읽다보니 발견한 사실. 인물간 높임법이 통일되지 못한 경우를 발견했다. 캐트린과 마이클 오닐, 그리고 존 볼링 세 사람의 대화에서 비롯된 문제다. 1, 2권에선 캐트린이 오닐에게 존대를 하고 오닐은 반말을 했다(캐트린이 오닐에게 가르침을 받은 입장을 반영시킨 듯하다). 그러다가 3권에서는 서로 반말을 쓴다. 그런데 4권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또 연인인 캐트린과 존 볼링은 서로 반말을 썼다가, 4권에선 서로 존댓말을 쓴다(친밀도를 생각하면 차라리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번역자가 달라서 생기는 문제겠지?
2. 이번에도 여지없이 돌아온 캐트린 댄스에 따른 동작학의 실용적 사례 4!
찰스 오버비 “동작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스트레스 지표를 찾는 일이야.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은 예외 없이 스트레스를 느끼거든. (…) 지금 캐트린은 세라노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도록 유도하는 거야. (…) (동작학은) 아무 기반이 없는 상태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 (그렇기 때문에) 기준선부터 잡아야 한다고. (…) 몸짓언어의 기준선.”
앨러턴 “그러니까 그의 반응을 기준선과 비교해 그 답변이 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p42
캐트린 “거짓말의 증거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죠. 갑자기 말이 느려지는 것. 머릿속으로 둘러댈 거짓말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거짓말의 신호예요. 스트레스 때문에 성대가 조여들기 때문이죠.” p127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句)는 대개 기만의 신호이다. ‘맹세코’나 ‘솔직히 말하죠’ 같은 말들. p524
3. 작가님이 한국에 대한 호감이 있나? 엑스트라로 아시아인 가족이 나오는데, 비록 범인 안티오크의 시각에서 서술되는 것이지만 호의적으로 묘사된다. 중국인 혹은 한국인일 것이지만 이들은 얼굴 생김새가 (분명히) 다르다고 언급해줬다. 우리나라도 유럽인들을 구별 못하는데, 동양인들을 구별해달라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외국에서 중국인 취급당하면 기분이 은근히 나쁘다……. 과연 작가님은 구별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4. 1~3권부터 이어진 캐트린의 연애사. 그녀의 남자가 드디어 이번에 결정이 난다.
뒤 내용은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캐트린은 2권에서 알게 된 IT 전문가 존 볼링과 사귀고 있었다. 그는 캐트린의 수사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캐트린의 아이들까지 세심하게 잘 돌봐주는 다정다감한 남자친구다. 그런데도 그녀는 갈등한다. 그녀의 가장 신뢰하는 동료, 마이클 오닐 때문이다. 그는 이혼을 하고 혼자가 됐다. 오닐은 캐트린에게 마음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캐트린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지만, 우습게도 두 사람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은 상대방이다. 그녀의 마음이 사실상 오닐에게 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볼링조차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깨끗이 물러난다. 시리즈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존을 택하겠다. 남 좋은 일만 시켜줬어…….
인상깊은 구절
가끔 내부의 실수와 부주의가 그들이 쫓는 범인보다 더 큰 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