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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세계의 연대기
존 맥피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9월
평점 :

감상
서점의 신간 코너들을 구경하다가 알게 된 책, 『이전세계의 연대기』.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표지. 흰 배경에 암석 세 개를 배치한 표지가 깔끔했다.
둘째, 제목. ‘세계’, ‘연대기’.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의 조합에 넘어갔다. 그런데 원제는 『Annals of the Former World』. 알고 봤더니 chronicle은 아니었다.
셋째, 수상작이란 타이틀. 약 20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저명한 논픽션이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내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이 두꺼운 분량의 책을 선택했다. 총 957쪽. 『이전세계의 연대기』를 마침내 완독한 후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겠다.
웬만하면 각오(?) 없이 읽지 말라고 하고 싶다. 이 책을 내는 데 엄청난 노고를 들였을 번역자와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교양서’라기엔 전문성이 강하다. 지질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반되어야, 수월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자는 ‘모호면’이라는 지질학적 용어를 초5도 안다고 전제한다. 또한 ‘멜란지’, ‘오피올라이트’ 등의 지질학적 용어들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에 대해 특별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세계의 연대기』는 양질의 책이다. 디테일한 현장 탐사 및 연구를 통해 탄생한, 방대한 스케일의 인문학적 교양서임은 맞다. 책은 훌륭한데, 독자인 내가 책이 요구하는 수준에 부합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은 북미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을 고찰한 책이다. 지질학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의 내용이 아니라, 상당히 심화된 수준의 전문 교양서다. 이런 경우라면 전공학자가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특이하게도 저자는 지질학자가 아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한 기자 출신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지질학자들과 동행하여 그들의 연구 과정을 함께했다. 광활한 북아메리카 산맥의 노두, 암석, 지각, 단층을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 즉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 및 역사를 서술하는 내용이 이 책에 담겼다. 시간 순서대로 북미의 다른 지역들을 탐사한 총 다섯 편을 한 권으로 엮었다.
지질학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를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이 40억 년의 것이다. 따라서 지질학은 지질이 생긴 이후, 최소 40억 년 이후를 시간적 순서로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득하고 방대한 지질학의 역사만큼 책의 양과 두께도 방대하다.
책에서 가장 중점에 두는 것은 암석이다. 지질학자들은 층서를 통해 암석의 유형, 지층의 연대, 지각의 형성, 지층의 구조, 나아가 대륙의 생성과 소멸을 추적하고 연구한다. 암석의 나이를 통해 땅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부분은 흥미롭다. 현재의 땅,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들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은 땅이었던 곳이 과거에는 바다일 수 있다. 호수, 산간 지방, 평원, 사막, 해안, 늪, 삼각주 그 어떤 모습으로든 있었을 수 있다. 또 어떤 모습으로든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는 언젠가 섬이 될 예정이다. 그 언젠가는 인간의 기준에서 아주 먼 언젠가가 되겠지만.
한편 대륙은 땅이 섞이고 혼재된 결과물이다. 플로리다는 아프리카가 남기고 간 조각이고, 뉴욕은 유럽의 한 조각이며,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했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한 합당한 이유. 땅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땅과 산과 지각이 구부러지고, 으깨지고, 떠밀리고, 눌린다(p69)는 표현은, 대상과 표현의 괴리에 자못 당황스러울 수 있다. 현재의 순간으로 볼 때 매우 견고한 것들이기에 피동적인 연약함을 도저히 연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실을 안다. 지각의 운동과 격변은 수백, 수억만 년에 걸친 장구한 시간과 지구 내부 압력에서 시작한 거대한 작업의 합작이라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지질학에서의 시간관념은 척도가 아예 다르다. 가령 100만 년은 지질학에서 매우 짧은 단위로 인식된다.
지질학의 역사,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는 정말 미미하기 짝이 없는 범위다.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로 축약한다면, 그리스도는 자정이 되기 30분 전에 탄생했고 산업혁명은 40분의 1초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40분의 1초 전에 일어난 일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p129).
이 책만의 특징이 있다면, 땅에 천착하는 사람들, 즉 지질학자들을 주목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지질학자와 다니면서, 지질학자의 연구 활동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력과 성장환경에 주목했다. 그들이 자라서 왜 지질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지, 지질학자 개인의 역사에도 적잖은 비중을 할애했다. 만약 지질학자가 책을 썼더라면 나올 수 없었던 부분이었을 것 같다.
불완전한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추론과 추측이 많을 수밖에 없는 학문. 그래서 극히 일부의 조각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예상해야 하는 사람들.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분투 덕에 45억 년이라는 지질학의 장대한 조형도가 완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도 부지런히 도로의 절개면과 노두를 보고, 시간에 따른 층서의 관계를 확립하고, 조각을 통해 지구의 일부를 느끼고 있을,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 이 책은 북미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을 고찰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 지질학적 특성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지질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덧.
1. 미국 지질조사소는 인력난(?)에 시달린다. 미국 지질조사소에는 1,500명이 있다. 반면 중국 지질조사소에는 40만 명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지질학자는 결코 중국 지질 조사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선 노출된 암석을 보기 위해 강둑이나 도로 절개면에 의존한다. 한데 중국의 ‘대단한 조직’은 어떤 암석의 횡단면을 보기 위해 산비탈을 파헤친다. 그래서 미국의 지질학자는 말한다. 중국 지질조사소에서 지질학적 농노가 되느니 미국 내에서 패배자로 있는 편이 낫다(p249)고.
또 이와 연계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미국에서는 석유 회사가 시추를 할 때, 지질학자들이 암석 조각을 구하러 나타나곤 한다. 지질학자들이 작업을 계속해달라고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산업계와 학계의 이 화기애애한 장면은 목말타기 시추(p933)라고 알려져 있다. 때로는 서비스로 석유 회사가 한 시간 더 시추를 해주기도 한다고. 미국 지질학자들의 삶의 애환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2. 책에서는 판구조론을 절대적으로 맹신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나온다. 어떤 경우엔 판구조론의 해석이 잘못되었고, 지질은 종종 판구조론을 반박한다(p390)고 한다. 판구조론은 사실을 왜곡하고,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는 탓에 국지적인 혹은 세세한 부분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륙이 맞부딪치거나 충돌하기보단, 대륙의 확장을 믿는 지질학자들. 판구조론을 믿지 않는 지질학자들이 꽤 많다는 언급은 신선했다. 교과서에 배웠을 땐 판구조론이 공인된 이론으로, 정설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3. 미국은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질 좋은 목재뿐만 아니라 석탄, 석유, 금 등의 연료 및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저자의 멘트가 인상적이다. ‘이 땅에 자연적으로 저장된 석유의 양이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인정된 사실이다.’ p435
4. 키프로스에서 현장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내가 자신이 키프로스의 장관이라고 밝히며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냐고. 지질학자들은 답했다. 미국 과학재단의 지원을 받고 암석 시료를 얻기 위해 암석에 구멍을 뚫고 있다고. 이 답을 듣고 장관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럼 정부에서 돈을 대면서 두 분에게 우리 섬에 와서 바위에 구멍을 뚫으라고 했다는 뜻인가요?”
여기까진 읽었을 때 훈훈한 에피소드인 줄 알았다. 이후 바로 이어진 저자의 멘트. 1년 반 후, 장관은 암살을 당했다(p736). 뭔가 섬뜩하다.
5. 일본은 1년에 1센티미터씩 북아메리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8억 년 후에는 어쩌면 알래스카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p793). 그래, 제발 가버려라!
6.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암석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게 나온다.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을 배우던 생각이 났다. 책에 나온 암석을 기재해본다. 화성암, 변성암, 퇴적암, 백운암, 석회암, 대리암, 점판암, 반려암, 휘록암, 규암, 사암, 점판암, 사장석, 휘석, 점토암, 화강암, 안산암, 각력암, 사문암, 감람암, 심성암, 기반암, 빙퇴석, 섬록암, 응회암, 사회암 등…….
인상깊은 구절
전 세계 대부분의 산악 지대는 압축의 결과물이다. p69
지형은 성장하고, 쇠퇴하고, 압축되고, 펼쳐지고, 해체되고, 사라진다. 모든 풍경은 일시적이며, 다른 풍경의 조각들로 이뤄진다. p422
이 모든 일은 지구 역사의 처음 88퍼센트에 해당되는 선캄브리아 시대에 일어났다. 종종 선캄브리아 시대의 암석을 뭉뚱그려서 “기반암”이라고 부른다. 대륙의 기반, 즉 세상의 경이로운 것들이 그 위에 놓이기 위해 먼저 마련된 자리라는 뜻이다. p441
산들은 항상 허물어진다. 솟아오르고 있는 동안에도 당연히 허물어지고 있다. 침식과 조산운동이 경쟁을 벌일 때, 침식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p443
그것은 수많은 시대의 연대기였다. p449
“문명은 지질학을 반영하는군요.” p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