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부터 탄탄하게, 처음 듣는 의대 강의 - 의대 지망생과 일반인을 위한 의학 수업
안승철 지음 / 궁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의대 지망생과 일반인들을 위한 책이다. 그러니까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의학의 기초에 대한 책이다. 의대가 어떤 곳이고 의학이 어떤 학문인지 잘 모르면서,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의대에 온 학생들. 정작 의대에 와놓고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는 이들이 매해마다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저자는 의대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위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물론 나처럼 의학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일반인들도 대상이다.

 

의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체의 생리현상과 계통을 다루는 학문이다. 나아가 의학은 인간의 병리현상을 예방치료하는, 실용학문이다. 실제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대생들은 6년을 공부한다. 6년간 그들이 배워야할 내용은 타 전공의 평균을 훌쩍 상회하는 수준이다. 법대와 같이 탑을 형성하지 않을까. 이 방대한 의대의 커리큘럼에서, 최소한의 기초 정보를 간추리는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내용의 대부분을 생리학적 시각에서 인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할애(p8)했다고 밝혔다. 책의 주요 얼개는 인체의 계(system)에 대해서 설명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인체는 총 11가지의 계로 구분하는데, 각 계는 다음과 같다.

 

1. 순환계

2. 소화기계

3. 호흡계

4. 비뇨기계

5. 골격계

6. 근계

7. 피부외피계

8. 면역계

9. 신경계

10. 내분비계

11. 생식계

 

의학은 이러한 체계 위에 구성된 학문이며, 이 책에선 순환계, 소화기계, 호흡기계, 비뇨기계, 신경계, 내분비계만 다뤘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알려주길 바란다(p8)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어려웠다. 1장 세포 파트부터 어려웠다. 그렇지만 저자의 탓이 아니다. 저자께선 충분히 쉽게 설명했다. 구어체로 설명하고, 문헌 및 실제 임상 케이스를 통해 내용을 연계시키고, 그림을 싣는 등 노력했다. 단지 내 머리가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용어를 신중하게 선택했겠지만, 넘쳐나는 의학 전문 용어들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용어들을 검색해보려다가 관뒀다. 더 혼란에 빠질 것 같아서. 그냥 체계와 틀만 이해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의대 공부의 90%가 암기라던데 용어 암기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저자는 선대 의학자들의 의학에 대한 연구와 발견에 대해서 소개한다. 각종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각종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온 의학의 역사. 간단하게 언급했음에 불구하고, 현대의학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의학자들의 노고와 분투가 있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이들이 실험할 때의 대상은 주로 동물이다. 유리공 안에 넣고 공기를 빼거나, 각종 기관들을 제거하는 실험.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쓸 수 없으니, 동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긴 하다. 잔인하긴 한데, 실제로 실험을 하지 않고선 의학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동물 친구들아, 고맙다.

 

내가 그나마 가장 재밌게 읽었던 파트는 소화기계였다. 먹고 배출하는 것에 관심 있는 단순한 인간이라……. 몇몇 흥미로웠던 의학적 사실들에 대해 메모해본다.

 

pp46~7 , 51

 

1. 사후강직이 일어나는 이유

 

인체는 고에너지 화합물인 ATP를 이용하여 일을 한다. ATP는 에너지의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흔히 에너지 통화(currency) 즉 돈을 불린다. ATP는 마이오신과 액틴이란 두 단백질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한데 사람이 죽으면 세포는 ATP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한다. 마이오신과 액틴이 더 이상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단백질은 결합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사후강직이 발생한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 단백질이 분해지는 현상에 의해, 사후강직은 풀린다.

 

p170

 

2. 우리가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는 이유

뷔페에 가면 평소보다 많이 먹어도 그게 다 들어가는 이유는 다 위 덕분이다. 위가 늘어나기 때문. 위가 이처럼 잘 늘어나는 것을 두고 위의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표현한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차피 의대에 들어갈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도 않았지만. 호기심에 읽어본 것으로 만족하겠다. 앞으로도 의학 관련 책은 교양서 위주로 읽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의대 지망생이라면 부디 이 책을 통해 의학에 대한 적성을 테스트하는 것이 좋겠다. 저자의 말씀처럼, 공부 잘한다고 해서 의대와 맞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도 실제로 그런 사례를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 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손원호 지음 / 부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처럼 아랍 문화에 친숙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 손원호 씨는 한국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이라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가 현재는 아랍에미리에트에서 석사를 졸업한 뒤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다. 그는 장장 18년 간 5개 아랍 국가에서 지낸 경험을 토대로, 한국인에게는 이색적인 아랍의 진짜 문화와 생활에 대해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5개의 아랍 국가는 다음과 같다. 이집트,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다. 이중 이집트, 아랍에미리트는 개방화서구화가 된 나라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광도 많이 가는 나라라서 그나마 친숙하다. 하지만 나머지 세 나라는 관광은커녕 입국조차 잘 할 수 없는 나라들이다. 예멘과 이라크는 여행금지국가이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철저히 폐쇄적인 국가로 이제껏 관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는 1985년생 젊은 왕세자의 개혁으로 2019년부터 제한적으로 관광을 허용했다(하지만 곧바로 코로나19가 터졌다는……).

 

관심은 있으나 잘 알 수 없었던 중동 국가들과 아랍 문화에 대한 내용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예멘,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세 나라는 극히 생소했던 나라들이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위주로 메모를 남겨본다.

 

1. 예멘

 

이슬람 국가들의 특징.

거의 대부분이 남성우월중심에 가부장적인, 전근대적인 제도 및 문화를 가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멘은 정도가 심하다. 여성은 눈을 제외한 전부를 검은 천으로 가리는 니캅을 착용해야 하며, 외부 활동 또한 거의 할 수 없다. 여성들은 외간 남자에게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결혼식을 할 때에도, 초대된 손님은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오직 신랑만이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혼식을 하는 동안, 손님들은 신랑이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신부 집에 갔다 오는 것을 기다린다.

 

저자가 예멘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당시의 일이다.

아랍어를 가르쳐주던 강사가 자신의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선생님과 두 아들이 식사를 같이 했고, 부인과 딸은 부엌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는 것은 두 아들의 역할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래도 예의상 저자가 사모님께 잘 먹었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꺼냈는데, 그러자 선생님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

 

식사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나에게 하면 되는 거야. 내 처에 관한 이야기나 이름조차 네 입으로 직접 말할 필요는 없어.”p78

 

세상에! 여성 억압과 차별은 아프가니스탄이 으뜸인 줄 알았더니 예멘도 만만치 않잖아? 게다가 예멘은 오랜 내전으로, 외부 세계와 계속 차단된 상태다. 전쟁으로 삶은 더 힘들어지고, 그런 상황 속에 가부장적 문화적 프레임은 더욱 견고해져가는 악순환. 이 프레임에 갇힌 채 속박과 억압에 순응하며 지내온 예멘의 여성들. 내전이 빨리 종식되길 바란다.

 

2. 유럽에 의한 중동의 영토 분할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그 산하에 있던 중동은 프랑스와 영국의 이권 쟁탈 대상이 되었다. 두 나라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아랍 지역을 분열시키고, 임의로 분할된 지역을 차지하기로 합의한다. 오늘날 중동 국가들 대부분의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편하게 먹기 좋게 두 나라가 직선으로 국경을 정해 버렸으니까. 또한 직선 안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국가란 개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인해 같은 민족, 같은 부족이 다른 국가로 갈라져버린 것(p160)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이 참 못할 짓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중동 또한 유럽 열강에 의해 영토가 강제 분할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니.

 

3. 사우디아라비아

 

전제 군주정으로써 국왕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부자 산유국의 대표 국가.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나라. 자국 중심 체제로 철저히 문을 닫아걸었던 사우디아라비아가 경제문화사회 부분에서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개혁개방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현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다. 2017, 사촌형을 몰아내고 왕세자에 책봉된 젊은 왕세자는 4차 산업 육성, 관광 산업 활성화, 여성에 대한 규제 완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왕세자의 개혁이 자국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갑다. 왕세자는 사우디의 강경한 보수적 문화가 비정상적이었다며, 사회를 좀 덕 개방하여 온건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촉구(p204)했다고 한다. 이 왕세자 덕분에 사우디가 바뀌고 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확대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 왕세자의 인식과 대처가 마음에 든다. 그나마 사우디가 절대 왕정 체제라서 이런 변화도 가능한 것이다. 통치자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비록 나라에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온 관습이 쉽사리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제도가 정착되고 관습이 바뀌려면, 저자의 말처럼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래도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왕세자의 현명한 통치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왕세자님, 외국인 관광 허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언젠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여행갈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서요. 헤헤.

 

 

4. 이라크

 

한때 평화의 도시로 불렸던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산업혁명 이전 세계의 최대 도시였다는 바그다드. 학문과 예술의 도시이자,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곳. 테러에 신음하며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현재의 바그다드와는 너무나도 다른 과거의 모습이다.

 

 

중세 시기, 서양은 이 시기를 암흑기라 불렀지만 정작 중동은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였다. 이슬람의 도시들, 바그다드, 코르도바, 다마스쿠스, 카불, 카이로 등 번성한 대도시들에서 군주들은 학문을 장려했고 발달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등 대부분의 학문이 이슬람 체제 내에서 고도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슬람은 이 지식의 정수를 유럽세계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즉 서양 유럽 문명의 발달은 유럽인들 스스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다. 이슬람 세계의 기여와 전수 덕분에 유럽 문명이 더 발달했음은 확고한 사실이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이슬람 문명이 현대 유럽 사회에 기여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p278). 그런 점에서 저자가 발췌한, 모로코의 이슬람 철학 평론가 무함마드 압델 자브리의 견해는 숙고할 만하다.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아랍인이 그리스 문명과 현대 유럽 문명 사이에서 일시적인 중간자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단순한 전달을 넘어,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의 재생산 작업을 통해 아랍이슬람 문명을 이룩해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유럽 문명도 바로 아랍이슬람 문명을 재생산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p278.

무함마드 압델 자브리, 아랍 이성의 생성

 

 

현재 저자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샤르자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석사까지는 아내가 학비 지원 및 생활비를 감당했다. 하지만 박사과정은 과정도 길고, 학비도 더 비쌌다. 그래서 저자는 방법을 찾아본다. 생각 끝에 샤르자 통치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샤르자 통치자가 누구인가.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인데, 샤르자는 일곱 토후국 중 샤르자란 토후국의 통치자, 즉 왕이다. 왕에게 학비를 달라고? 한낱 외국인이? 이 무모하고 말도 안 될 것 같은 일을 저자는 해낸다. 그렇게 되기까지엔 저자의 끈기와 집념, 그리고 지속적인 도전 정신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저자의 시도는 개인의 이득 뿐만 아니라 국가적 관계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만들었다. 대학간 학술 협력을 체결하는 공로로 통치자에게 장학금을 받게 된 저자. 그는 아랍인 특유의 관대한 선처를 뜻하는 말인 마크루마Makrumah’ 덕분이라고 감사해하지만, 그 마크루마를 불러일으킨 데에는 저자 본인의 노력이 있어서라고 본다. 나도 잠깐이나마 이슬람식 마크루마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낯설지만 황홀한 중동의 매력을 전하고자 노력했던 저자의 용기와 도전을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권, 안녕, 긴 잠이여.

전작 이후 6년 만에 나왔다고 한다. 하라 료는 집필 속도가 더딘 작가라고 하던데 나는 이제야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고 있는 중이라서……. 시리즈로써, 바로 전작인 내가 죽인 소녀보다 첫 번째 권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과의 연관성이 많다(2권의 등장인물도 출연하여 사건의 후일담을 들려주긴 한다). 전작의 의뢰인 사에키 나오키와 오기 변호사가 출연하는 장면은 반가웠다. 그리고 안녕, 긴 잠이여에서 드디어, 와타나베 사건의 결말이 난다. 책이번 책은 사와자키가 1년이 넘게 사무실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탐정업을 관두고 잠적했던 이유는 결말에서야 드러난다. 그 이유가 와타나베와 이어질 지는 짐작도 못했다…….

 

시리즈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

장르는 하드보일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목들은 시적이다. 안녕, 긴 잠이여의 경우 여상스러운 느낌이 드는 제목이라 생각했다. 한데 이 제목에는 의미가 있다. 하라 료가 존경해마지 않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 깊은 잠Big sleep을 오마주한 것이다. 역자 후기에도 깊은 잠에 대한 언급이 있다. “I didn’t mean to be.” 이 문장을 보니까 나도 하라 료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의 매력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하라 료를 이해하려면 첸들러의 소설을 꼭 읽어보라는 말이 있다. 깊은 잠을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모종의 이유로 1년이 넘은 뒤에야 도쿄에 돌아온 사와자키.

그는 자리를 비운 동안 의뢰인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의뢰인은 자신의 연락처를 정확히 남기지 않았다. 사와자키는 언제 평범한 의뢰인을 맞아보나. 그는 의뢰인을 찾는 수사에 착수한다. 의뢰인도 수사를 해서 찾아야 한다니, 사와자키에게는 뭐 하나 수월한 일이 없다.

 

그 뿐인가, 이번 권은 사와자키에게 여러 모로 시련이 많았다.

특히 육체적으로 고생이 많았다. 겨우 찾아낸 의뢰인은 사건을 의뢰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나, 간신히 의뢰인을 설득(?)해서 사건을 맡았더니 목숨을 잃을 뻔하기까지 한다. 탐정은 극한직업이라는 현실(?)을 몸소 체현하고 있는 우리의 사와자키.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정이 들었나 보다. 사와자키가 겪는 고생에 왠지 짠했다…….

 

이번에 그가 맡게 된 수사의 내용은 과거의 진실 추적하기.

의뢰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11년 전 고등학생 때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일이다. 당시 야구 선수였던 그는 승부조작 의혹에 휘말린다. 조사 뒤 무혐의로 판명되었지만,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그의 가족은 루머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나 누나나 회사에서 해고당할 처지에 몰린다. 이 부분에서 안타까웠다. 결백이 밝혀졌는데도, 회사에서는 퇴직 처리를 진행시킨다. 의심하고 비난했다가, 정작 진실이 밝혀지니 무안해진 본인의 입장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누나인 우오즈미 유키가 투신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목격한 증인이 있으므로, 유키의 죽음은 의문 없이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아키라는 누나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그녀가 자살할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유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의뢰. 사와자키는 11년 전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

 

자그마치 11년 전의 사건이다.

거기다가 이미 자살로 확정된 사건. 단지 근거 없는 의혹만으로 수사를 시작하기엔, 불리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사와자키는 차근차근, 뚝심 있게 수사를 해나간다. 증인을 찾고, 증언의 모순과 허점을 찾아낸다. 성실하고 예리한 조사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보고 있으니, 사와자키가 예사로운 탐정은 아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탐문을 할 때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능숙하게 유도하는 데에서, 사와자키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무뚝뚝하고 말재주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사람에 따라 대응 방식을 달리하여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람직한 탐문 수사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1권에서부터 잠적한 와타나베를 추적해온, 경찰서의 니시고리 경부, 그리고 조직폭력배 간부 하지즈메와 사가라. 와타나베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라 생각되는 사와자키를 어지간히(?) 괴롭혔다. 그렇다고 해서 사와자키가 순순히 당할 사람도 아니지만. 이번엔 오히려 사와자키가 그들, 특히 야쿠자들을 제대로 물먹인다. 사와자키는 수사 과정에서 괴한들의 침입으로 진짜 죽을 뻔했다. 한데 살해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그를 감시하고 있던 야쿠자들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다. 사와자키는 이 은혜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그들을 이동 셔틀로 이용한다. 야쿠자를 택시 기사로 써먹는 대담함이라니. 돈이 없다고 태연하게 돈을 빌려달라 것을 보면, 확실히 사와자키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 맞다.

 

범인 측은 사와자키의 공습에 맞서 열심히 사전준비를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사와자키의 날카로운 눈썰미 덕분에 정체가 탄로났다. 사와자키 덕분에 아키라는 누나의 억울한 죽음, 그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마터면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 뻔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사와자키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해결될 수 있었다. 사와자키 아니면 누가 잠적해버린 의뢰인을 굳이 찾겠냐고. 그가 수사를 의뢰할지 안할지 확실하지 않는데.

 

한편 3권은 시리즈로서 1부와 2부를 구분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1권에서부터 시작된 와타나베 사건이 드디어 3권에서 막을 내린다. 이제 묘한 악연이라 할 수 있는 니시고리 경부와 하지즈메, 사가라와의 인연도 종지부를 맺겠지? 야쿠자들은 은근히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는데 안 나온다면 아쉬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1.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는 문구가 있는데, 911테러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각주를 보니 93년에 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2001년 이전에도 한 차례 테러가 있었구나…….

 

 

2.

작중에서 노숙자가 부상을 입는 사건 따위는,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는 신주쿠에서 놀란 일도 아니라고 나온다. 신주쿠가 그런 도시였단 말이야? 신주쿠가 그런 도시임을 고려할 때, 출판사의 소개글은 의미가 깊다. 특히 비정한 도시의 범죄 엔트로피는 끝없이 상승한다.’란 말은 3권뿐만 아니라 시리즈 전체를 정의하는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생각한다.

 

3.

사와자키는 수사만 아니었더라면 평생 몰랐을, 노가쿠 공연을 보게 된다. 노가쿠란 일본의 전통 예술로,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사와자키는 솔직하게 느낀 점을 말한다. 범상치 않았지만 지루했다(졸음과 싸우느라 힘들었다). 노가쿠 공연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의 심정이 딱 사와자키의 심정과 같았다.

 

4.

사와자키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 중 유일한 여자 번호의 주인은 대체 누굴까? 어떤 인연일까? 궁금하다!

 

사와자키 탐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트러블을 밥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p168

 

그들(변호사)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법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우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때로 그저 법을 잘 알 뿐인 예의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p320

 

사와자키 늘 그렇게 탐색하는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면 빤히 보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사실도 놓치고 말죠.” p168

 

마스다 당신은 가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되는군. 분명히 남들에게 자기가 그런 인간으로 비쳐지기를 바라는 걸 테지.” p420

 

마스다 “() 인간을 두 가지 종류로, 이 세상에 요령 있게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함께 후자에 속할 거라는 말이야.”

 

사와자키 당신은 방금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자기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쪽에 넣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당신은 사실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하는 인간인지 모르는 거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분류 방법을 들먹이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드는 게 아닌가. 진짜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써가며 고민하지 않아.” p4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1권《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작가의 데뷔작이다.

나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2권부터 접했다.

《내가 죽인 소녀》 개정판이 최근(22. 5.) 발간됨으로 인해 이 시리즈를 알게 된 것. 《내가 죽인 소녀》가 재밌지 않았더라면 아마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권에 이어서 지금 1권 리뷰를 한다는 것은 시리즈가 괜찮았다는 얘기. 시리즈를 다 읽을 생각이다.

2권을 읽었기 때문에 사와자키 탐정, 그리고 몇몇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정보가 있는 상태였다. 

다만 2권에서 언급되었던 와타나베 사건이 1권에 주요 사건으로 다뤄질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와타나베의 밀수 사건은 1권에서도 과거였다(더 자세하게 사정이 나오긴 한다). 사와자키는 1권에서부터 꿋꿋이 와타나베 없는 사와자키의 ‘와타나베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가이후라 이름을 밝힌 의문의 사내가 사와자키의 사무실을 방문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르포라이터 사에키의 행방을 찾는 한편, 거액의 현금을 놔둔 채 사라진 가이후. 사와자키는 가이후가 찾는 사에키란 사람이 실종 상태임을 알게 된다. 또한 사에키의 행방을 찾는 또다른 사람들이 사와자키를 찾아온다. 이혼 직전이었던 사에키의 아내, 그리고 저명한 미술평론가로서 재벌가의 딸을 후처로 맞이한 그녀의 아버지. 그들의 의뢰에 따라 사와자키는 사에키를 찾는데 나선다.

사라진 르포라이터만 찾으면 될 줄 알았던 사건. 

사와자키가 조사에 임할수록 사건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며 여러 사건들과 맞물린다. 실종, 유괴, 살인……그리고 르포라이터가 쫓던 숨겨진 진실. 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와 공작을 밝혀내는 것이 1권의 주요 내용이다. 

2권을 먼저 읽고 1권을 읽어서 그런가, 1권은 다소 산만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사건들이 진행되며 과거의 사건들과 연계되는데, 적어도 내게는 사건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지는 않았다. 사건의 흐름과 배치, 그리고 인물들의 연결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드보일드란 장르적 면에서도 미흡한 부분이 보였다. 하지만 2권에서는 플롯과 구성, 장르적 특성이 1권보다 더 진일보하게 발전한다. 데뷔작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주인공 사와자키의 개성은 1권에서부터 빛을 발한다.

평범한 중년의 탐정인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는 독특한 개성의 인물. 보수에 우선하지 않고, 의뢰인의 신분이나 지위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말투는 무심한데 그의 행동을 보면 어딘가 정이 느껴진다. 천재적인 타입의 탐정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성실하게, 차근차근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사와자키의 인간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정도가 마음에 들었다. 

여성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여자들이 먼저 원했으니 사와자키로서는 순간의 유희를 즐겨도 그만일 텐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그렇다고 육체적 쾌락을 쫓지도 않는 고독한 남자……. 탐정의 업에 성실하게 임하는 전문 직업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와자키 외의 다른 인물들은 크게 개성적인 면모가 없었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사에키, 그리고 가이후의 매력을 크게 찾아볼 수 없었다. 사건의 진상, 반전도 크게 임팩트가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1권은 시리즈의 스타트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하지만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적 특성의 구현, 그리고 사와자키라는 걸출한 캐릭터의 구축은, ‘사와자키 시리즈’의 출발을 알리는 성공적인 표지라고 본다.


덧.


1. 2권에서 약간 두루뭉술했던, 니시고리 형사와의 관계를 1권에서 알 것 같았다. 와타나베로 인해 맺어진 악연(?)이랄까. 와타나베에게 애증을 느끼는 묘한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를 싫어하는 둘의 콤비가 의외로 괜찮았다.

2. 사와자키는 의외로(?) 싸움 실력이 괜찮다.


3. 사에키는 실종 직전 아내 나오코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정작 남편이 실종된 후 나오코는 탐정을 고용하면서까지 남편을 애타게 찾는다. 다행히도 사에키는 돌아왔지만, 결국 그들은 이전에 협의했던 대로 이혼한다. 그들은 사와자키에게 이혼의 이유를 밝힌다. 이유는 나오코의 외도, 혼전 임신이었다. 그러나 사에키가 알고 있었던 진실은 달랐다. 다른 남자의 아이로 알고 있었던, 나오코가 결혼하기 전 지운 아이는 사에키의 아이였다. 그녀는 사에키의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아기를 지운다. 또한 남편의 오해를 굳이 풀어주지 않은 채, 이혼에 합의한다. 나는 도통 이 여자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굳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받는 길을 선택한 여자의 마음(p397). 도대체 왜 그랬을까?

4. 한국인이 등장한다. 정윤홍. 외국인이 알기엔 흔한 한국 이름이 아니다. 고심해서 지은 이름일 것 같기도 한데 단역에 불과한 악인이라니 살짝 아쉽다.

5. 책의 뒤에는 단편 <말로라는 사나이>가 수록되었다. 역자님 말씀대로 챈들러에 대한 동경과 경의를 고스란히 담은 단편. 더불어 하드보일드에 대한 한없이 긍정적인 희망의 찬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전 세계의 연대기
존 맥피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상

 

서점의 신간 코너들을 구경하다가 알게 된 책, 이전세계의 연대기.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표지. 흰 배경에 암석 세 개를 배치한 표지가 깔끔했다.

둘째, 제목. ‘세계’, ‘연대기’.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의 조합에 넘어갔다. 그런데 원제는 Annals of the Former World. 알고 봤더니 chronicle은 아니었다.

셋째, 수상작이란 타이틀. 20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저명한 논픽션이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내 지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이 두꺼운 분량의 책을 선택했다. 957. 이전세계의 연대기를 마침내 완독한 후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겠다.

웬만하면 각오(?) 없이 읽지 말라고 하고 싶다. 이 책을 내는 데 엄청난 노고를 들였을 번역자와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교양서라기엔 전문성이 강하다. 지질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반되어야, 수월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자는 모호면이라는 지질학적 용어를 초5도 안다고 전제한다. 또한 멜란지’, ‘오피올라이트등의 지질학적 용어들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에 대해 특별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세계의 연대기는 양질의 책이다. 디테일한 현장 탐사 및 연구를 통해 탄생한, 방대한 스케일의 인문학적 교양서임은 맞다. 책은 훌륭한데, 독자인 내가 책이 요구하는 수준에 부합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은 북미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을 고찰한 책이다. 지질학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의 내용이 아니라, 상당히 심화된 수준의 전문 교양서다. 이런 경우라면 전공학자가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특이하게도 저자는 지질학자가 아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한 기자 출신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지질학자들과 동행하여 그들의 연구 과정을 함께했다. 광활한 북아메리카 산맥의 노두, 암석, 지각, 단층을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 즉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 및 역사를 서술하는 내용이 이 책에 담겼다. 시간 순서대로 북미의 다른 지역들을 탐사한 총 다섯 편을 한 권으로 엮었다.

 

지질학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를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이 40억 년의 것이다. 따라서 지질학은 지질이 생긴 이후, 최소 40억 년 이후를 시간적 순서로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득하고 방대한 지질학의 역사만큼 책의 양과 두께도 방대하다.

 

책에서 가장 중점에 두는 것은 암석이다. 지질학자들은 층서를 통해 암석의 유형, 지층의 연대, 지각의 형성, 지층의 구조, 나아가 대륙의 생성과 소멸을 추적하고 연구한다. 암석의 나이를 통해 땅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부분은 흥미롭다. 현재의 땅,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들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은 땅이었던 곳이 과거에는 바다일 수 있다. 호수, 산간 지방, 평원, 사막, 해안, , 삼각주 그 어떤 모습으로든 있었을 수 있다. 또 어떤 모습으로든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는 언젠가 섬이 될 예정이다. 그 언젠가는 인간의 기준에서 아주 먼 언젠가가 되겠지만.

 

한편 대륙은 땅이 섞이고 혼재된 결과물이다. 플로리다는 아프리카가 남기고 간 조각이고, 뉴욕은 유럽의 한 조각이며,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했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한 합당한 이유. 땅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땅과 산과 지각이 구부러지고, 으깨지고, 떠밀리고, 눌린다(p69)는 표현은, 대상과 표현의 괴리에 자못 당황스러울 수 있다. 현재의 순간으로 볼 때 매우 견고한 것들이기에 피동적인 연약함을 도저히 연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실을 안다. 지각의 운동과 격변은 수백, 수억만 년에 걸친 장구한 시간과 지구 내부 압력에서 시작한 거대한 작업의 합작이라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지질학에서의 시간관념은 척도가 아예 다르다. 가령 100만 년은 지질학에서 매우 짧은 단위로 인식된다.

 

지질학의 역사,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는 정말 미미하기 짝이 없는 범위다.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로 축약한다면, 그리스도는 자정이 되기 30분 전에 탄생했고 산업혁명은 40분의 1초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40분의 1초 전에 일어난 일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p129).

이 책만의 특징이 있다면, 땅에 천착하는 사람들, 즉 지질학자들을 주목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지질학자와 다니면서, 지질학자의 연구 활동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력과 성장환경에 주목했다. 그들이 자라서 왜 지질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지, 지질학자 개인의 역사에도 적잖은 비중을 할애했다. 만약 지질학자가 책을 썼더라면 나올 수 없었던 부분이었을 것 같다.

 

불완전한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추론과 추측이 많을 수밖에 없는 학문. 그래서 극히 일부의 조각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예상해야 하는 사람들.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분투 덕에 45억 년이라는 지질학의 장대한 조형도가 완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도 부지런히 도로의 절개면과 노두를 보고, 시간에 따른 층서의 관계를 확립하고, 조각을 통해 지구의 일부를 느끼고 있을,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 이 책은 북미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을 고찰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 지질학적 특성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지질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

 

1. 미국 지질조사소는 인력난(?)에 시달린다. 미국 지질조사소에는 1,500명이 있다. 반면 중국 지질조사소에는 40만 명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지질학자는 결코 중국 지질 조사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선 노출된 암석을 보기 위해 강둑이나 도로 절개면에 의존한다. 한데 중국의 대단한 조직은 어떤 암석의 횡단면을 보기 위해 산비탈을 파헤친다. 그래서 미국의 지질학자는 말한다. 중국 지질조사소에서 지질학적 농노가 되느니 미국 내에서 패배자로 있는 편이 낫다(p249).

 

또 이와 연계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미국에서는 석유 회사가 시추를 할 때, 지질학자들이 암석 조각을 구하러 나타나곤 한다. 지질학자들이 작업을 계속해달라고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산업계와 학계의 이 화기애애한 장면은 목말타기 시추(p933)라고 알려져 있다. 때로는 서비스로 석유 회사가 한 시간 더 시추를 해주기도 한다고. 미국 지질학자들의 삶의 애환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2. 책에서는 판구조론을 절대적으로 맹신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나온다. 어떤 경우엔 판구조론의 해석이 잘못되었고, 지질은 종종 판구조론을 반박한다(p390)고 한다. 판구조론은 사실을 왜곡하고,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는 탓에 국지적인 혹은 세세한 부분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륙이 맞부딪치거나 충돌하기보단, 대륙의 확장을 믿는 지질학자들. 판구조론을 믿지 않는 지질학자들이 꽤 많다는 언급은 신선했다. 교과서에 배웠을 땐 판구조론이 공인된 이론으로, 정설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3. 미국은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질 좋은 목재뿐만 아니라 석탄, 석유, 금 등의 연료 및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저자의 멘트가 인상적이다. ‘이 땅에 자연적으로 저장된 석유의 양이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인정된 사실이다.’ p435

 

4. 키프로스에서 현장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내가 자신이 키프로스의 장관이라고 밝히며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냐고. 지질학자들은 답했다. 미국 과학재단의 지원을 받고 암석 시료를 얻기 위해 암석에 구멍을 뚫고 있다고. 이 답을 듣고 장관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럼 정부에서 돈을 대면서 두 분에게 우리 섬에 와서 바위에 구멍을 뚫으라고 했다는 뜻인가요?”

여기까진 읽었을 때 훈훈한 에피소드인 줄 알았다. 이후 바로 이어진 저자의 멘트. 1년 반 후, 장관은 암살을 당했다(p736). 뭔가 섬뜩하다.

 

5. 일본은 1년에 1센티미터씩 북아메리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8억 년 후에는 어쩌면 알래스카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p793). 그래, 제발 가버려라!

 

6.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암석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게 나온다.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을 배우던 생각이 났다. 책에 나온 암석을 기재해본다. 화성암, 변성암, 퇴적암, 백운암, 석회암, 대리암, 점판암, 반려암, 휘록암, 규암, 사암, 점판암, 사장석, 휘석, 점토암, 화강암, 안산암, 각력암, 사문암, 감람암, 심성암, 기반암, 빙퇴석, 섬록암, 응회암, 사회암 등…….

 

인상깊은 구절

 

전 세계 대부분의 산악 지대는 압축의 결과물이다. p69

 

지형은 성장하고, 쇠퇴하고, 압축되고, 펼쳐지고, 해체되고, 사라진다. 모든 풍경은 일시적이며, 다른 풍경의 조각들로 이뤄진다. p422

 

이 모든 일은 지구 역사의 처음 88퍼센트에 해당되는 선캄브리아 시대에 일어났다. 종종 선캄브리아 시대의 암석을 뭉뚱그려서 기반암이라고 부른다. 대륙의 기반, 즉 세상의 경이로운 것들이 그 위에 놓이기 위해 먼저 마련된 자리라는 뜻이다. p441

 

산들은 항상 허물어진다. 솟아오르고 있는 동안에도 당연히 허물어지고 있다. 침식과 조산운동이 경쟁을 벌일 때, 침식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p443

 

그것은 수많은 시대의 연대기였다. p449

 

문명은 지질학을 반영하는군요.” p7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