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권, 안녕, 긴 잠이여.

전작 이후 6년 만에 나왔다고 한다. 하라 료는 집필 속도가 더딘 작가라고 하던데 나는 이제야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고 있는 중이라서……. 시리즈로써, 바로 전작인 내가 죽인 소녀보다 첫 번째 권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과의 연관성이 많다(2권의 등장인물도 출연하여 사건의 후일담을 들려주긴 한다). 전작의 의뢰인 사에키 나오키와 오기 변호사가 출연하는 장면은 반가웠다. 그리고 안녕, 긴 잠이여에서 드디어, 와타나베 사건의 결말이 난다. 책이번 책은 사와자키가 1년이 넘게 사무실을 비웠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탐정업을 관두고 잠적했던 이유는 결말에서야 드러난다. 그 이유가 와타나베와 이어질 지는 짐작도 못했다…….

 

시리즈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

장르는 하드보일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목들은 시적이다. 안녕, 긴 잠이여의 경우 여상스러운 느낌이 드는 제목이라 생각했다. 한데 이 제목에는 의미가 있다. 하라 료가 존경해마지 않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 깊은 잠Big sleep을 오마주한 것이다. 역자 후기에도 깊은 잠에 대한 언급이 있다. “I didn’t mean to be.” 이 문장을 보니까 나도 하라 료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의 매력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하라 료를 이해하려면 첸들러의 소설을 꼭 읽어보라는 말이 있다. 깊은 잠을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모종의 이유로 1년이 넘은 뒤에야 도쿄에 돌아온 사와자키.

그는 자리를 비운 동안 의뢰인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의뢰인은 자신의 연락처를 정확히 남기지 않았다. 사와자키는 언제 평범한 의뢰인을 맞아보나. 그는 의뢰인을 찾는 수사에 착수한다. 의뢰인도 수사를 해서 찾아야 한다니, 사와자키에게는 뭐 하나 수월한 일이 없다.

 

그 뿐인가, 이번 권은 사와자키에게 여러 모로 시련이 많았다.

특히 육체적으로 고생이 많았다. 겨우 찾아낸 의뢰인은 사건을 의뢰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나, 간신히 의뢰인을 설득(?)해서 사건을 맡았더니 목숨을 잃을 뻔하기까지 한다. 탐정은 극한직업이라는 현실(?)을 몸소 체현하고 있는 우리의 사와자키.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정이 들었나 보다. 사와자키가 겪는 고생에 왠지 짠했다…….

 

이번에 그가 맡게 된 수사의 내용은 과거의 진실 추적하기.

의뢰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11년 전 고등학생 때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일이다. 당시 야구 선수였던 그는 승부조작 의혹에 휘말린다. 조사 뒤 무혐의로 판명되었지만,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그의 가족은 루머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나 누나나 회사에서 해고당할 처지에 몰린다. 이 부분에서 안타까웠다. 결백이 밝혀졌는데도, 회사에서는 퇴직 처리를 진행시킨다. 의심하고 비난했다가, 정작 진실이 밝혀지니 무안해진 본인의 입장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누나인 우오즈미 유키가 투신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목격한 증인이 있으므로, 유키의 죽음은 의문 없이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아키라는 누나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그녀가 자살할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유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의뢰. 사와자키는 11년 전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

 

자그마치 11년 전의 사건이다.

거기다가 이미 자살로 확정된 사건. 단지 근거 없는 의혹만으로 수사를 시작하기엔, 불리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사와자키는 차근차근, 뚝심 있게 수사를 해나간다. 증인을 찾고, 증언의 모순과 허점을 찾아낸다. 성실하고 예리한 조사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보고 있으니, 사와자키가 예사로운 탐정은 아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탐문을 할 때 오래 전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능숙하게 유도하는 데에서, 사와자키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무뚝뚝하고 말재주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사람에 따라 대응 방식을 달리하여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람직한 탐문 수사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1권에서부터 잠적한 와타나베를 추적해온, 경찰서의 니시고리 경부, 그리고 조직폭력배 간부 하지즈메와 사가라. 와타나베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라 생각되는 사와자키를 어지간히(?) 괴롭혔다. 그렇다고 해서 사와자키가 순순히 당할 사람도 아니지만. 이번엔 오히려 사와자키가 그들, 특히 야쿠자들을 제대로 물먹인다. 사와자키는 수사 과정에서 괴한들의 침입으로 진짜 죽을 뻔했다. 한데 살해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그를 감시하고 있던 야쿠자들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다. 사와자키는 이 은혜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그들을 이동 셔틀로 이용한다. 야쿠자를 택시 기사로 써먹는 대담함이라니. 돈이 없다고 태연하게 돈을 빌려달라 것을 보면, 확실히 사와자키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 맞다.

 

범인 측은 사와자키의 공습에 맞서 열심히 사전준비를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사와자키의 날카로운 눈썰미 덕분에 정체가 탄로났다. 사와자키 덕분에 아키라는 누나의 억울한 죽음, 그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마터면 진실은 영원히 묻혔을 뻔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사와자키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해결될 수 있었다. 사와자키 아니면 누가 잠적해버린 의뢰인을 굳이 찾겠냐고. 그가 수사를 의뢰할지 안할지 확실하지 않는데.

 

한편 3권은 시리즈로서 1부와 2부를 구분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1권에서부터 시작된 와타나베 사건이 드디어 3권에서 막을 내린다. 이제 묘한 악연이라 할 수 있는 니시고리 경부와 하지즈메, 사가라와의 인연도 종지부를 맺겠지? 야쿠자들은 은근히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는데 안 나온다면 아쉬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1.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는 문구가 있는데, 911테러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각주를 보니 93년에 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2001년 이전에도 한 차례 테러가 있었구나…….

 

 

2.

작중에서 노숙자가 부상을 입는 사건 따위는,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는 신주쿠에서 놀란 일도 아니라고 나온다. 신주쿠가 그런 도시였단 말이야? 신주쿠가 그런 도시임을 고려할 때, 출판사의 소개글은 의미가 깊다. 특히 비정한 도시의 범죄 엔트로피는 끝없이 상승한다.’란 말은 3권뿐만 아니라 시리즈 전체를 정의하는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생각한다.

 

3.

사와자키는 수사만 아니었더라면 평생 몰랐을, 노가쿠 공연을 보게 된다. 노가쿠란 일본의 전통 예술로,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사와자키는 솔직하게 느낀 점을 말한다. 범상치 않았지만 지루했다(졸음과 싸우느라 힘들었다). 노가쿠 공연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의 심정이 딱 사와자키의 심정과 같았다.

 

4.

사와자키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 중 유일한 여자 번호의 주인은 대체 누굴까? 어떤 인연일까? 궁금하다!

 

사와자키 탐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트러블을 밥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p168

 

그들(변호사)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법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우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때로 그저 법을 잘 알 뿐인 예의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p320

 

사와자키 늘 그렇게 탐색하는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면 빤히 보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사실도 놓치고 말죠.” p168

 

마스다 당신은 가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되는군. 분명히 남들에게 자기가 그런 인간으로 비쳐지기를 바라는 걸 테지.” p420

 

마스다 “() 인간을 두 가지 종류로, 이 세상에 요령 있게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함께 후자에 속할 거라는 말이야.”

 

사와자키 당신은 방금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자기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쪽에 넣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당신은 사실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하는 인간인지 모르는 거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분류 방법을 들먹이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드는 게 아닌가. 진짜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써가며 고민하지 않아.”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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