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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 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손원호 지음 / 부키 / 2021년 8월
평점 :
저자처럼 아랍 문화에 친숙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 손원호 씨는 한국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이라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가 현재는 아랍에미리에트에서 석사를 졸업한 뒤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다. 그는 장장 18년 간 5개 아랍 국가에서 지낸 경험을 토대로, 한국인에게는 이색적인 아랍의 진짜 문화와 생활에 대해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5개의 아랍 국가는 다음과 같다. 이집트,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다. 이중 이집트, 아랍에미리트는 개방화〮서구화가 된 나라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광도 많이 가는 나라라서 그나마 친숙하다. 하지만 나머지 세 나라는 관광은커녕 입국조차 잘 할 수 없는 나라들이다. 예멘과 이라크는 여행금지국가이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철저히 폐쇄적인 국가로 이제껏 관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는 1985년생 젊은 왕세자의 개혁으로 2019년부터 제한적으로 관광을 허용했다(하지만 곧바로 코로나19가 터졌다는……).
관심은 있으나 잘 알 수 없었던 중동 국가들과 아랍 문화에 대한 내용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예멘,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세 나라는 극히 생소했던 나라들이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위주로 메모를 남겨본다.
1. 예멘
이슬람 국가들의 특징.
거의 대부분이 남성우월중심에 가부장적인, 전근대적인 제도 및 문화를 가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예멘은 정도가 심하다. 여성은 눈을 제외한 전부를 검은 천으로 가리는 니캅을 착용해야 하며, 외부 활동 또한 거의 할 수 없다. 여성들은 외간 남자에게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결혼식을 할 때에도, 초대된 손님은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오직 신랑만이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혼식을 하는 동안, 손님들은 신랑이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신부 집에 갔다 오는 것을 기다린다.
저자가 예멘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당시의 일이다.
아랍어를 가르쳐주던 강사가 자신의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선생님과 두 아들이 식사를 같이 했고, 부인과 딸은 부엌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는 것은 두 아들의 역할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래도 예의상 저자가 사모님께 잘 먹었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꺼냈는데, 그러자 선생님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
“식사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나에게 하면 되는 거야. 내 처에 관한 이야기나 이름조차 네 입으로 직접 말할 필요는 없어.”p78
세상에! 여성 억압과 차별은 아프가니스탄이 으뜸인 줄 알았더니 예멘도 만만치 않잖아? 게다가 예멘은 오랜 내전으로, 외부 세계와 계속 차단된 상태다. 전쟁으로 삶은 더 힘들어지고, 그런 상황 속에 가부장적 문화적 프레임은 더욱 견고해져가는 악순환. 이 프레임에 갇힌 채 속박과 억압에 순응하며 지내온 예멘의 여성들. 내전이 빨리 종식되길 바란다.
2. 유럽에 의한 중동의 영토 분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그 산하에 있던 중동은 프랑스와 영국의 이권 쟁탈 대상이 되었다. 두 나라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아랍 지역을 분열시키고, 임의로 분할된 지역을 차지하기로 합의한다. 오늘날 중동 국가들 대부분의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편하게 먹기 좋게 두 나라가 직선으로 국경을 정해 버렸으니까. 또한 직선 안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국가’란 개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인해 같은 민족, 같은 부족이 다른 국가로 갈라져버린 것(p160)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이 참 못할 짓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중동 또한 유럽 열강에 의해 영토가 강제 분할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니.
3. 사우디아라비아
전제 군주정으로써 국왕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부자 산유국의 대표 국가.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나라. 자국 중심 체제로 철저히 문을 닫아걸었던 사우디아라비아가 경제〮문화‥사회 부분에서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개혁〮개방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현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다. 2017년, 사촌형을 몰아내고 왕세자에 책봉된 젊은 왕세자는 4차 산업 육성, 관광 산업 활성화, 여성에 대한 규제 완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왕세자의 개혁이 자국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갑다. 왕세자는 사우디의 강경한 보수적 문화가 비정상적이었다며, 사회를 좀 덕 개방하여 ‘온건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촉구(p204)했다고 한다. 이 왕세자 덕분에 사우디가 바뀌고 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확대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 왕세자의 인식과 대처가 마음에 든다. 그나마 사우디가 절대 왕정 체제라서 이런 변화도 가능한 것이다. 통치자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비록 나라에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온 관습이 쉽사리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제도가 정착되고 관습이 바뀌려면, 저자의 말처럼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래도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왕세자의 현명한 통치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왕세자님, 외국인 관광 허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언젠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여행갈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서요. 헤헤.
4. 이라크
한때 ‘평화의 도시’로 불렸던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산업혁명 이전 세계의 최대 도시였다는 바그다드. 학문과 예술의 도시이자,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곳. 테러에 신음하며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현재의 바그다드와는 너무나도 다른 과거의 모습이다.
중세 시기, 서양은 이 시기를 암흑기라 불렀지만 정작 중동은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였다. 이슬람의 도시들, 바그다드, 코르도바, 다마스쿠스, 카불, 카이로 등 번성한 대도시들에서 군주들은 학문을 장려했고 발달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등 대부분의 학문이 이슬람 체제 내에서 고도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슬람은 이 지식의 정수를 유럽세계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즉 서양 유럽 문명의 발달은 유럽인들 스스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다. 이슬람 세계의 기여와 전수 덕분에 유럽 문명이 더 발달했음은 확고한 사실이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이슬람 문명이 현대 유럽 사회에 기여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p278). 그런 점에서 저자가 발췌한, 모로코의 이슬람 철학 평론가 무함마드 압델 자브리의 견해는 숙고할 만하다.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아랍인이 그리스 문명과 현대 유럽 문명 사이에서 일시적인 중간자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단순한 전달을 넘어,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의 재생산 작업을 통해 아랍〮이슬람 문명을 이룩해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유럽 문명도 바로 아랍〮이슬람 문명을 재생산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p278.
무함마드 압델 자브리, 『아랍 이성의 생성』
현재 저자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샤르자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석사까지는 아내가 학비 지원 및 생활비를 감당했다. 하지만 박사과정은 과정도 길고, 학비도 더 비쌌다. 그래서 저자는 방법을 찾아본다. 생각 끝에 샤르자 통치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샤르자 통치자가 누구인가.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인데, 샤르자는 일곱 토후국 중 샤르자란 토후국의 통치자, 즉 왕이다. 왕에게 학비를 달라고? 한낱 외국인이? 이 무모하고 말도 안 될 것 같은 일을 저자는 해낸다. 그렇게 되기까지엔 저자의 끈기와 집념, 그리고 지속적인 도전 정신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저자의 시도는 개인의 이득 뿐만 아니라 국가적 관계 향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만들었다. 대학간 학술 협력을 체결하는 공로로 통치자에게 장학금을 받게 된 저자. 그는 아랍인 특유의 관대한 선처를 뜻하는 말인 ‘마크루마Makrumah’ 덕분이라고 감사해하지만, 그 마크루마를 불러일으킨 데에는 저자 본인의 노력이 있어서라고 본다. 나도 잠깐이나마 이슬람식 마크루마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낯설지만 황홀한 중동의 매력을 전하고자 노력했던 저자의 용기와 도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