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 IVP 모던 클래식스 010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 IVP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읽고 나서 영성 훈련에 관한 짧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연장선 상에서 읽으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사이더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진 부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세계의 부의 80%를 누리고 있는 5%의 국가 대부분이 소위 기독교 국가인데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10억에 육박하는 현실의 모순에서 부터 나온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정의에 관심한다면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에서 자기 소유를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시대역행적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너무 이 주제를 폄하하고 '좌파'라는 딱지를 붙혀 재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치부해 왔다. 얼마나 치졸한 모습인지...

선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가 단지 우상숭배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은 죄를 물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상숭배문제만 거론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용납하기 쉽게 '영적'인 문제로만 만들어 버렸다.

성서를 조금만 읽어도 분명한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그는 부의 재분배에 있어 원리적으로 참고해야 할 "희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희년은 결국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으로써의 땅의 독점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산자원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였다고 평가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가 현실 경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현재의 가난은 부의 독점으로 인한 원천적인 생산수단을 강탈당해서 조장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인의 나태함으로 빚어진 가난은 논외다. 그것은 분명 죄다.
우리의 관심은 사회구조를 통해 양산되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시대에 만날 수 있는 합리화를 사이더는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구명보트의 윤리다. 부자 나라를 구명보트에 빗대어 결국 가난한 나라를 태우다 보면 공멸할 수 밖에 없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 것도 없는 나라의 가공할 만한 출산률이 이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 밖에 없다.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둘째는 트릭클 다운 논리(trickle down)다. 부한 사람이 소비에 많은 돈을 지출하면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부해진다는 것이다. 사이더는 과연 그러한가 반문한다. 오히려 사치와 향락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돈을 구제로 돌린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빠른 시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째는 부자를 전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내가 부해져야 하는 이유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유에 집착하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건 완전 넌센스다.

개 인적으로 부의 분배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듣는 합리화가 두번째 논리가 아닐까 한다. 부한 사람들의 소비로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가난을 벗어난다는 논리. 소위 돈이 돌아야 한다는 주장 이면의 논리다. 부한 사람의 소비가 사회 약자층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믿으나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신봉하는 과학적 통계를 들여다 보면 이상적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GNP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가난은 더 골이 깊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논리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골프를 치면 캐디가 돈을 벌게 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창출할 수 있는 일자리가 몇개나 될까? 차라리 골프치러 가기 위해 쏟는 비용을 구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지원하면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서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이더의 논리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근사치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구 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세워질 필요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가난의 영성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가난해 지라는 금욕주의적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난의 깊이를 경험하고 나의 소유가운데 '유용성'이 아닌 '사치'를 위한 소비를 줄여 생산수단마저 빼앗겨 '자유'를 동경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머리 속에서는 이미 아프리카에 가있는데 내 지갑은 여전히 닫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고 기독교인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할 때이다.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영과 육을 통전적으로 바라보는 건전한 인간관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다
그의 책 마지막에 필라델피아의 자유의 종에 새겨진 희년적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



후기: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구제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경제질서 전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을 양산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법과 기독교적 대안들을 고민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사이더도 어서 빨리 기독교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맞다고 하지 않는 겸손을 가졌고 얼마든지 대화를 통해서 수정되어야 함을 인정하는 개방적 태도는 참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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