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페루 - 신이 숨겨둔 마지막 여행지
이승호 지음 / 리스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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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페루 - 이승호, 활자로 만나는 남미 공부

 

 

 

페루. 서른 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을 감당해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이 국가는 대한민국에서 떠나는 여행지로는 다소 막연한 장소에 속했다. 라틴아메리카. 오랜 역사와 정열을 품은 매력적인 땅이지만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부터 떠나기엔 너무나도 큰 모험처럼 여겨졌던 미지의 세계. 이제 이곳이 그 막연함을 벗고 조금 더 우리들에게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올해 초 어느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그려진 페루 덕분에 이곳은 ‘언젠가는 꼭 가고 싶은 나라’로 여행객의 마음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꽃청춘이라 불리는 세 명의 뮤지션, 윤상, 유희열, 이적. 세 사람이 불현 듯 떠나게 된 페루는 꽤 많이 낯선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죽기 전에는 꼭 들려보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인간이 느껴야 할 거대한 문명의 힘을 배우고 알아가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에서다.

 

저자는 스페인과 영국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보낸 사람. 그의 관심이 라틴아메리카로 쏠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남미학을 공부해 석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 이후에는 국제학 박사과정에 도전하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된 그의 지식 탐구가 빚어낸 책이 바로 <언젠가는, 페루> 이 책인 것. 다섯 가지의 챕터를 통해 페루의 수도 ‘리마’, 사막의 도시 ‘이카’, 나에겐 익숙한 이름 ‘쿠스코’, 태양의 도시 ‘마추픽추’, 그리고 높은 산에 자리 잡은 신비의 호수를 간직한 ‘푸노’를 소개한 글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활자를 통해 페루 여행을 알차게 마친 듯한 기분이 든다.

 

 

 

 

꽃청춘 페루편이 인기를 얻고, 감동 또한 전하면서 뒤늦게 재방송으로 몇 편을 챙겨봤는데, 그 때 방송에서 보았던 페루의 모습이 책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큰 규모의 나라지만 그 나라를 여행하는 데 있어 가장 실속 있는 정보만 빼왔던 예능 프로그램과 <언젠가는, 페루> 이 책이 묘하게 닮아 있어 마치 똑같은 내용을 두 번 공부하는 듯한 효과를 톡톡히 봤던 시간. 마추픽추 앞에서 그곳의 경이로움에 감탄해서 눈물 흘리던 뮤지션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맞추픽추를 소개한 페이지를 읽을 땐 사진에서 다 담을 수 없는 실제 그곳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책 제목처럼 ‘나도 언젠가는 페루에 꼭 가고 싶다’는 마음을 새기기도 했다.

 

한 번쯤은 들어봤던 도시명들을 뒤로 하고,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소는 마지막 챕터에서 소개한 ‘푸노’라는 곳. 특히 이곳의 티티카카 호수는 볼리비아 국경과도 맞닿아 있는 곳이라 더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유럽배낭여행을 통해 10년 전 품었던 프라하의 여행을 이루고 돌아왔을 때, 그 다음 여행지를 고르면서 꼭 죽기 전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몇몇 곳의 여행지 중 한 곳이 바로 볼리비아인데, 여기의 우유니 사막을 여행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 하나를 추가하면서 볼리비아라는 국가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졌다. 그리고 그곳과 맞닿은 국경에 자리한 티티카카 호수, 그리고 호수 위에서 갈대를 엮어 살아가는 우로스 섬은 그래서 왠지 가깝게 느껴진 장소였다. 지속적으로 갈대를 갈아주면서 그 위에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우로스 부족. 삶의 터전인 갈대섬을 관광객들에게 흔쾌히 소개해주는 그들의 너른 마음. 그러나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관광객을 붙잡고 직접 만든 물건을 사게끔 종용하기도 한다는 그들의 삶이 왜 글자로만 만났는데도 짠해지는 건지.


위대한 문명이 잠들어 있는 위대한 역사의 나라, 페루. 하지만 이곳에 깃든 이면들은 많이 열악해보였고 어려워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불행해보이지는 또 않은. 묘한 매력을 지닌 곳 같았다. 짠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페루에서 산다면 꽤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생각을 가져보며. <언젠가는, 페루>라는 책 제목대로, 그렇게, 언젠가는, 진짜 이곳을, 특히 티티카카 호수 위를 유유히 여행하고픈 계획 한 가지를 추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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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 - The EDIYA Story
김대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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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YA, 사람을 먼저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Ⅰ. 이디야, 내 발걸음이 여기에 머무르다.


내가 근무하던 직장은 번화가와 지하철 한 코스 정도의 거리에 위치했다. 퇴근길, 시내로 나갈 일이 생길 때는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이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카페와 맛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카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제법 규모가 큰 카페들이 몇 곳 들어섰고, 또 그 사이를 비집고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생겼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마실지는 전적으로 소비자의 몫이었지만, 구미가 당길 만큼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값 때문에 나도 모르게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말했다.
- 우리 회사 주변에는 이디야 커피 안 들어오려나?
이디야 커피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스타벅스나 투썸플레이스 등 이미 대규모의 시장을 형성한 브랜드 카페는 아니지만 그곳과 비슷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면서도 커피가격은 부담없는 장소, 뭐 이렇게 소문이 돌고 있을 때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매장들을 꽤 많이 봐 왔지만 회사처럼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 근처엔 없었기에 실질적으로 이용해보진 못하던 커피전문점이었다.
- 그러게요. 조금 걷더라도 이 근처에 있으면 이디야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이 근처에 이제 카페 들어올 자리 없지 않아요?
점심시간 흔히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의 대화였다. 큰 기대 없이, 커피를 마실 방법은 다양하니깐 괜찮은, 그러나 생긴다면 애용할 마음은 충분했던, 그런 우리들의 대화 말이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지 한 달 즈음 지났을 땐가. 회사가 위치한 곳에서 반대편을 향하는 대각선 위치에 이디야 커피가 개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유소 옆에 작은 부지를 점포로 만들어서 오픈한 곳이었다. 손님이 가득 차면 4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크기였다. 커피 종류가 적은 편도 아닌데 대부분 메뉴들은 모두 2~3천 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기에 이디야 커피는 금새 점심시간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다른 커피전문점과 마찬가지로 음료 외에도 블랜딩을 마친 원두 판매, 로고를 이용해서 만든 머그잔과 텀블러 판매 등 다양한 제품도 매장에서 만날 수 있어서 이디야 카페를 방문할 때마다 이곳만의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었다.


‘생겼으면’하고 바라던 이디야 매장은 어느새 우리 회사 직원들의 점심시간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쿠폰에 도장을 다 채운 사람은 ‘오늘은 내가 이디야 쏠게’하고 직원들을 우르르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생기자 서로 커피를 통해 ‘인심’을 쓰기 시작했다. 비싼 커피 한 잔에 매장값, 서비스값, 분위기값을 다 따져가며 자기합리화를 시키던 커피마니아들은 이제 가고 없었다. 기호식품이었던 커피가 어느새 생활의 필수품처럼 다가온 요즘, 커피는 실속 있게 즐길수록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는 ‘잇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 언니의 ‘오늘은 내가 이디야 쏠게’라고 하는 말이 직원들 간의 유대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었다. 작은 커피전문점이 회사 주변에 들어와서 직원들 유대관계까지 움직일 줄이야.


근데 예상하지 못한 이 에피소드가 그저 에피소드로만 끝나지는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를 읽고 부터다. 이디야를 시작한 문 대표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비단 많이 팔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음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커피 한 잔을 통해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가 결속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걸 예견하고 있었던 걸까.

작은 매장 하나가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준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쭉 그럴테고. 커피를 통해서 결국은 ‘돈’이 아닌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또 ‘물질’보다 커피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값지다는 걸 깨닫게 해준 이디야 커피는 나에게 어느새 아주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Ⅱ. 겉보다 속을 생각하는 커피마니아들, 그들이 늘어났다.


대규모 프랜차이즈 카페의 안일함에 지쳐있던 소비자들에게 이디야는 신선한 장소였다. 직장인들에게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커피가격은 늘 큰 부담이었는데 이디야 커피가 들어서면서 그 부담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디야 커피가 어떤 이유로 합리적인 가격에 타 커피전문점과 동일한 서비스를 펼칠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책을 통해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좋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저 정이 가고 좋아하게 되는 친구처럼 이디야는 편한 공간이기만 했는데, 책을 통해서 그 처음부터 현재를 살펴보게 되니깐 진짜 절친한 친구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인류애를 실현하는 기업’이 되고픈 이디야의 꿈, 그 꿈의 시작은 바로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제공하고, 또 그런 분위기로 똘똘 뭉친 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가겠다는 문 대표의 다부진 비전이 전국에 분포한 이디야 커피의 작은 매장 사이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었던 거다. 대표의 비전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표의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이디야 커피를 통해 적중한 것이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애용했던 이디야 커피를 이제는 좀 더 알 것 같다. 그리고 더 애용하게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커피전문점 브랜드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 그 가슴벅참에 내가 이디야 커피를 찾음으로써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커피전문점을 옮기고 또 옮기며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아내고, 또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장소를 물색하는 것. 그건 소비자가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런 권리를 부담 없이 누릴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이디야 커피는 그런 곳이었다. 식사 후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이제는 여유가 아닌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아니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디야 커피는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제공했다. 합리적이면서도 튼튼한 다리를 말이다.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우체부 프레드의 이야기를 다룬 자기계발서적 <우체부 프레드>에는 2달러의 커피 한 잔이 주는 가치에 대한 일화가 담겨 있다.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었던 2달러의 돈을 회상하며 ‘하루 중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쓴 돈’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이디야 커피를 시작할 때의 마음이 이 마음을 닮았다. 이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평화로운 한 때에 마시는 커피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자신의 기쁨을 타인과 나눌 땐 또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이디야는 고객에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문 대표도 이 나눔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로는 그가 더욱 사회공헌활동에 힘쓰는 이유이다.”


안주하지 않는 기업, 이디야. 음료사업이니깐 마실 것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데만 주력하지 않고 기업의 가치를 확장할 수 있는 더 넓은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 이디야. 이 책이 이디야를 홍보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인류애를 실현하는 기업’의 지침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Ⅲ. 조용한 혁명을 응원할 이들, 나 그리고 우리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디야의 시작이 실은 꽤 오래전이었다는 점이다. 2001년에 첫 매장을 시작으로 그야말로 ‘조용한 성장’ ‘조용한 혁명’을 차근차근 일으켜 온 이디야는 이제 국내에 유치한 점포수가 상당한 중견 브랜드로 자리매김에 성공했다.
커피전문점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곤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커피를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커피에만 100% 필요도를 느껴 커피전문점으로 향하는 건 결코 아니다. ‘분위기’를 더하고 좋은 원두의 ‘맛’을 더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간’을 더할 수 있는 그런 3박자가 모두 갖춰진 장소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이디야는 단순히 좋은 커피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카페 그 이상의 의미를 확고히 다지는 데 성공했다.


순간순간 판도가 뒤바뀌는 음료시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분하게, 그렇게, 내실을 다져온 브랜드, 이디야 커피.
‘헤이하치차야’처럼 성장하기를! 여유를 선물받은 고객들이 내일을 기대하며 다시 이디야로 발걸음을 옮기기를! 더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을 추려낼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빼고’, 또 ‘빼고’, 그래서 기업의 가치에 주력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승승장구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이 기업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어느 독자가 애정을 가득 담아 전한다.

<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로 시작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그러니깐 열광할 수밖에 없다’로 끝맺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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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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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끌림> 표지4에 서평을 싣게 된다면.

 

 

 

 

심야시간, 내 머리맡을 책임진 책

짧은 글 한 구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책

읽고 멈추고 울고 웃고 다시 읽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풀이하게 만드는 책

이병률이라는 작가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책

여행은 장소보단 결국 사람을 만나는 도전의 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한 책

작가가 언급한 작은 지명 하나 하나를 손수 찾아보게 만드는 책

그래서 그 찾아본 장소들을 꿈 속에서 여행하게 만드는 책

사람, 결국은 사람, 사람만이 가장 값진 선물이라는 걸 알게 만든 책

 

끌림에 끌렸다.

영원히 끌릴 책이다.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끌림>을 읽고.

 

 

 

 

 

● 서평


이병률 – 끌림, 내 심장이 뛴다, 당신의 글 때문에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이 단단해질 줄 알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모진 풍파를 견뎌 온 사람들이 드세게 변한다는 말을 나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때로는 못 먹고, 또 때로는 억수같은 비를 맞았고, 또 때로는 낯선 곳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처럼. 그렇게 힘들고 고된, 그렇지만 또 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이전의 나보다는 더 지독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오히려 먼 여행을 다녀온 지금, 나는 더 작은 일에도 울컥, 뭉클한 사람이 된 듯하다. ‘진짜 여행’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은 지금, 나는 나보다 훨씬 여행을 사랑하고, 또 여행을 많이 즐긴 어느 선배의 글을 읽으며 자주 눈물을 글썽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단해지기는 무슨. 이병률 작가의 한 문장, 한 마디에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가 다시 뻥 뚫리기도 하고, 내 마음을 대변하는 그의 글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도 했다가 더 이상 글을 읽기가 아까워 책을 가슴에 안고선 한숨만 푹푹 내쉬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여행에세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책. 이 책이 내 책장에 찾아온 건 2년 전 봄이었다. 업무 상 책을 소개하는 글을 작성해야 했고, 그래서 이 책을 출판사측으로부터 받았다. 몇 개의 에피소드만 읽고 책이 주는 느낌을 짧은 글로 풀었다. 그리곤 읽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책이었는데 갑자기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이 책을 아끼듯이 읽었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은 예순일곱개의 에피소드 모두에 들어있었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뽑아서 마치 작가가 된 것 마냥 천천히 자판을 두들기며 그 글들을 옮겨 적어보기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어떠한 상황이든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상황을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몸이 간지럽다는 걸.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다녀왔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자신만의 문장력에 투영시키는 행위, 글쓰기. 그걸 하지 않으면 답답한 사람들은 분명 이병률 작가의 책을 읽으며 감탄할 거다. 좋아할 거다. 두고두고 그의 글을 곱씹을 거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그 공통점이 바로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글로 풀어내려는 마음이라는 걸 나는 알기 때문이다. 

 

 

 

 

 

 

 

 

 

 

마음에 새긴 에피소드 속 문장들

 

 

 

 

7번째 이야기,
당신에게

 

청춘을 가만 두라. 흘러가는 대로. 혹은 그냥 닥치는 그대로.
청춘에 있어서만큼 사용법이란 없다. 파도처럼 닥치면 온 몸으로 받을 것이며 비갠 뒤의 푸른 하늘처럼 눈이 시리면 그냥 거기다 온 몸을 푹 담그면 그만이다.
주저하면 청춘이 아니다. 생각의 벽 안쪽에 갇혀 지내는 것도 청춘이 아니다. 괜히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을 탓하는 것도 청춘의 임무가 아니다. 청춘은 운동장이다. 눈길 줄 데가 많은 번화가이며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11번째 이야기,
어쩌면 탱고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34번째 이야기,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44번째 이야기,
영국인 택시 드라이버


상대를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다면 아무리 늦었다 해도,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건 분명 사랑인 거다.

 

 

 

 

 

 

 

 


50번째 이야기,
환상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젊은 여행자들 중에는 상상력으로 단련되어 있는 친구들이 많다. 나천 것에 온 몸을 빠뜨려 흠씬 몸을 적실 준비를 하고 상상할 꺼리들을 채집하러, 머리와 어깨에 힘을 빼고 상상력을 배우러 기차를 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잣대’나 ‘기준’들이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과 풍경으로 끊어 넘치는 세상의 순간순간들을 잘 기워내 세상 풍파를 막아낼 양탄자를 만든다. 상상력은 한 뼘의 사고를 한 품의 사고로 확장시키며 사람을 단단하게 한다. 상상력만으로 아픈 사람 앞에 바다를 데려다 보여줄 수도 있으며, 힘겨운 하루하루의 창 밖에 소나무 한 그루씩을 심을 수 있다.
그러니 떠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기갈 들린 사람처럼 천박해 보여도 좋다. 떠나서만큼은 닥치는 일들을 받아내기 위해 조금 무모해져도 좋다. 세상은 눈을 맞추기만 해도 눈 속으로 번져들 설렘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54번째 이야기,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57번째 이야기,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그 찬란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픈 뒤에 일어난 몸은 금방이라도 날 것처럼 등등해 있었고, 눈은 가장 멀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씻겨져 있었으며 심장은 모든 풍경 위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처럼 이완되어 있었다. 장염을 겪은 자격 때문인지, 아니면 밤새 꿈속에서 들었던 ‘티베트에 들어오는 모든 이는 아파야 한다’는 말 때문인지 훌쩍 고산병을 뛰어넘은 아침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눈물을 쏟아야 할 것만 같은 아침.

 

 

 

 

 

 

 

 


66번째 이야기,
나는 뭔가를, 세상에 가져오는 사람입니까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게 뭔가를 줄 수도 있는 사람입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믿어도 되는 겁니까.

그 한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는 세상에 뭔가
어떤 식으로든 보탬을 주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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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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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만 남긴, 울부짖는 사형제도



피해자와 가해자. 하나의 글자가 빚어내는 전혀 다른 운명의 갈림길. 그게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들이 살아가게 될 판이한 삶의 모습이다.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평생을 상처와 고독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 그들은 자신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세상과 격리되거나 혹은 마음에 커다란 짐을 떠안은 채 전전긍긍하며 세상 속으로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고 아웃사이드에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펴낸 이번 신간 <공허한 십자가>는 가해자 중에서도 가해자인 살인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살인자의 사형집행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처절하게 싸웠던 사요코라는 여성의 갑작스런 의문사, 그리고 그 사건을 파헤치는 전남편 나카하라. 그를 통해 밝혀지는 이들 부부의 과거 상처, 그리고 사요코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 각기 다른 에피소드인줄 알았는데 결국은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귀결되는 그 흐름을 통해 '살인자의 사형'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이있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작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범죄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는데, 대놓고 물어보진 않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쯤은 '당신은 그래서 사형제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넌지시 물어보는 것만 같다.


여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사형제도’라는 법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도대체 사형제도를 쉽게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악질 범죄자에 대한 갱생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등 무성한 외침뿐인 사형제도에 대한 쓴 소리를 마구 뱉어내는 사요코의 목소리는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건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대부분이 살인자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사실 우리는 얼마든지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인 것 마냥 가져와 함께 통곡해줄 수 있지 않는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공허한 십자가’란 말은 살인자가 구형받은 법의 심판, 즉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그의 범행의 재발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함은 물론,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죽지 못해 간신히 살아갈 때에도 범죄자들은 여전히 목숨이 붙은 채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모순 속에 사요코가 붙인 의미였다.
‘살려만 준다면 사회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라든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든지,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될 건 알지만, 정말 잘못했습니다’라든지 이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며 피해자의 유족에게 호소하는 가해자.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든 변호해야만 하는 변호인의 적극적인 보호 속에서 사형은커녕 살인자들의 징역 기간이 더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현실.


물어 뜯고 싶어도 '정상참작'이라는 이름의 갖가지 이유들이 범죄자들의 최후 인권만큼은 보호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사요코는 시종일관 사형제도의 찬성을 주장한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살인자의 사형집행은 그녀가 겪은 뼈저린 아픔을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기에 '인간의 죽음은 인간 밖의 권리'라고만 생각하던 내 마음마저 움직일 정도였다. 
사요코가 사형제도를 도입해야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자 마지막 근거로 밝힌(그녀가 책으로 완성하고 싶어했던 글의 마지막 부분) 글은, 사실 그 누구라도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기도 하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간 범죄자. 하지만 갱생의 태도가 보여 가석방되었고, 그 가석방 기간 중에 그는 또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것도 8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리디 어린 소녀를. 그런 범죄자들을 위해 국가는 길면 30년 정도 남짓한 구형을 선고하고 가해자를 세상에서 격리시켰다 말하지만, 실상은 그런 중한 범죄를 저지른 살인자를 교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 따위는 나라에서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는 범의 심판이 재판정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져도 사실 유족들에겐 그 외치는 소리 말고는 남는 게 없다. 얻는 것도 없다.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저 죽음을 죽음으로 갚고 싶은 단순한 앙갚음을 해서라도, '사형'이라는 그 공허한 울림이라도 들어서 한을 풀고 싶은 마음인 거다.
작가는 이야기의 매듭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진 않다. 그저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제법 큰 몫을 맡기고 있는 듯하다. 마치 사형제도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을 한번 돌아보라는 뜻처럼. 등장인물의 심정에 나를 반영시켜보자. 우리가 그토록 뜨거운 감자로 삼았던 사형제도 문제가 이전보다 더욱 더 진지하게 다가올 것이다.






책 속 문장


ㅡ 이혼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뜻밖의 연락 앞에선 나카하라

"그때 사요코와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야마를 향해 덧붙였다. 
"만약에 이혼하지 않았다면 또 유족이 될 뻔했으니까요."




ㅡ 딸의 죽음 후, 살인자에 대한 사형을 주장하며 남몰래 써왔던 사요코의 글 중에서

"만약 최초의 사건에서 히루카와를 사형에 처했다면 내 딸은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히루카와지만, 그를 살려서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것은 국가다.
즉, 내 딸은 국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획적이든 아니든, 충동적이든 아니든, 또 사람을 죽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기형을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징역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재범률이 높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갱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완벽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면, 갱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형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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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년 지음 / IVP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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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책을 1년이 넘어서야 읽었다. 마음은 읽고 싶다는 쪽으로 굴뚝인데 막상 구매해서 보려니 다른 책이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지난주에 이 책을 손에 넣었다. 갑자기 쓰러진 아내를 간병하며 지내온 8년의 삶, 그 삶을 통해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김병년 목사님의 자전적 이야기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죄송스러운 마음까지도 느끼게 만들었다.
세상 모든 책이 다 해당되진 않겠다만은 적어도 신앙서적은 읽을 시기가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 그 타이밍에 나는 이 책을 만났다.

김병년 목사님의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글에 위로를, 그런 목사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통해 감사를 절로 느꼈으니깐.
내 버거운 삶에 탈출구만을 찾았는데 버거움이라 부르던 그 고통이 실은 나를 살게 만드는 희망이 된다는 말에, 주어지는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이유는 다 깃들어 있다는 말에 갑갑했던 마음이 많이 느슨해졌다. 책 55쪽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너무 마음에 와 닿아서 밑줄을 진하게 그어 둔 부분이었다.


너무나 약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더라도, 역설적이게도 그 흔들림이 나를 온전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때 묻지 않게 한다.


내가 흔들리기 때문에 지금껏 온전할 수 있었다는 말. 내가 자주 넘어지고 낙심했기 때문에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부터 때 묻지 않았다는 말. 물론, 그렇게 연약한 삶으로 살았기에 지금 내가 정결하고 착한, 바른 사람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고통이 나를 온전하게 만드는 갈대 위에 불어대는 바람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한마디가 어려움을 견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누군가가 쓴 한 줄의 문장이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는 역할을 하다니. 감사하고 놀라운 문장의 힘. 간증의 힘.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표현한 길이 없다.
고통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서운 바람이 오늘도 불었고 앞으로의 내 삶에도 수없이 불어올 테다. 대답하지 않으시고 묵묵하게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그래도 경외하며, 아픔 속에서 이겨내고 일어설 힘을 깨달아야 할테다. 그래도 좋다. 그 고통 너머의 의미를 기억하며 나를 단련시키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매 순간순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내가 만난 문장

 

 

그렇다. 우리의 아픔은 신비다. 하나님의 신비 안에 거하면,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다. 신비를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인생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
22~23쪽

 

 

소설가 유영갑의 산문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를 보면, “흔들리는 갈대에 눈이 쌓이지 않듯 그들 마음의 거울에 때가 낄 틈이 없을 것이다.”라는 설명이 덧붙은 사진이 나온다. 그는 흔들리는 갈대를 선방에서 도를 닦는 남자들의 마음으로 표현한다. 흔들리기에 눈이 쌓일 수 없고, 흔들리기에 무엇이든지 머물지 못한다. 흔들리기에 깨끗하다. 너무나 약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더라도, 역설적이게도 그 흔들림이 나를 온전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때 묻지 않게 한다.
55쪽

 

 

눈은 거의 실명하고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유방암으로 고생했던 마르바 던은 이렇게 말했다. “일상의 삶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엄청난 상실을 겪는다. 하지만 다가가는 사랑을 가진 한 사람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장애인으로 살지 않는다.” 내 아내도 그렇게 다가가는 사랑, 임마누엘 사랑을 받을 때, 비로소 환자가 아닌 인간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임마누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 사랑이 몸에 배어들어 완전함에 이를 것을 기대할 뿐이다.
71쪽

 

 

생명을 살렸으나 인생의 짐은 너무도 무거웠다. 인생은 참 냉정하다. 선한 선택을 했다고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 바른 선택을 했다고 칭찬해 주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했든 그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한다.
79쪽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라고 하시는 장모님은 밤새 자고 깨고를 반복하며 딸을 간호하신다. 중간 중간 “으!”하고 탄식하면서도 다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모습을 보면, ‘감사합니다’는 감사의 고백이 아닌 삶의 버거움에 지친 깊은 탄식으로 들린다. 그 말은 밤이 되면 멈출 수 없는 눈물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인생의 밑바닥에는 고통, 무질서, 혼란, 당혹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감사란 결코 생각처럼 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115쪽

 

 

감사는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은 이런 식의 감사가 폭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를 통한 감사는 쉽게 좌절하게 한다. 남과의 비교를 통한 감사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부실하다. 순식간에 무너진다. 자신의 삶을 허구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억지 감사는 위선이다. 비교하는 삶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만족 없이 어떻게 감사가 가능할까. ~
감사가 솟을 때까지 기다리자. 잘 견디기 위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 각자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다.
119쪽

 

 

감사의 제사는 이전에 드리지 못한 것을 일시불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삶의 태도와 방식을 우선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감사의 제사’는 말의 반복이 아니라 옳은 행위로 돌이키는 것이다.(시 50:23)
129쪽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고통받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함 가운데로 오신 것이다.
159~160쪽

 

 

구원하는 능력의 거대함을 실제로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죄의 거대함과 깊이를 깨달을 때다. 미움과 분노, 음란과 외로움, 그리고 정죄와 무례함, 낙심과 허무함 등 숱한 죄악들이 내 영혼 깊숙이 박혀 있다. 사실, 질병이 가져다주는 고통보다 죄로 인한 고통이 더 괴롭다. 죄는 양심을 부패하게 하고 영원토록 사람을 병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내 죄로 인해 깊이 상처받고 고통받으시기 때문이다.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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