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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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쓰홍 - 67번째 천산갑

올 해 초, 천쓰홍 작가의 귀신들의 땅으로 처음 대만 문학을 접하고 대만 문학은 물론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서러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슬픔과 아우성이 나에게도 잘 전달 되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의 땅>은 더운 여름 날 배경으로  한 탓인지 끈적끈적한 촉감이 자주 느껴지는 책이었다면 <67번째 천산갑>은 "촉촉하게 젖은 진흙의 숨결, 미용 제품과 인공 향료가 한데 뒤섞인 따스하고 넓고 직접적인 냄새, 곰팡이 냄새" 등 다양한 냄새에 집중하게 하며 후각을 깨우는 책이다. 제법 날이 쌀쌀해지는 시기에 이 책을 읽어선지 이 냄새의 공격이 싫지 않았다. 

67번째 천산갑 역시 슬프고 억울하고 암울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귀신들의 땅>에서 보여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으로 독자들은 어린 소년과 소녀가 살았던 타이완의 산골 마을로 갔다가 중년이 돼버린 여자와 남자의 흐린 파리로 되돌아온다. 그들의 이야기가 쌓여가면서 독자들은 그들의 아픔을 조금씩 읽어낸다. 

남자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 병든 여자와 자신의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묵묵부답인 채로 사람들로부터 떠나온 남자는 이 책에서 언급한대로 '게이미'의 관계다. 이성애자 여자와 동성애자 남자와의 특별한 친분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짜릿할 수 없어서 당신들을 경시하고 차별하는 거야. 알겠어? 난 한 번도 짜릿해 본 적이 없단 말야." -193p

성적으로 한 번도 만족감을 가지지 못한 채, 혼전 임신으로 혹은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차례 낙태를 거듭해야 했던 그녀의 삶을 생각하면 임신 혹은 매너리즘에 빠진 결혼생활 없이 살아가는 게이 친구가 부러울만하다. 물론 나는 이 외침이 고상한 척하며 선을 긋는 일부 이성애자들의 차별에 항의로 들리기도 했다.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강간 당해 낙태를 해야 할 때도 사랑하는 셋째 딸이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도 지금처럼 아들이 사라지고 잠이 들 수 없던 때마저도 남자는 항상 여자의 옆을 묵묵히 지킨다. 그는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행동 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하다. 낙태약을 먹고 피 흘린 그녀의 속옷을 직접 빨아주고, 셋째 딸의 장례식에서 누구보다 슬퍼해주고, 여자를 협박한 전남자친구에게 끔찍한 복수를 선사한다. 

천산갑이란 동물을 떠올리면 단단한 갑옷을 입으면서도 겁쟁이처럼 항상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여자의 모습이 그랬다. 늘 자는 모습을 쳐다보는 남편의 시선이 못마땅하면서도 기꺼이 잠든 연기를 하고 아들의 비밀을 알면서도 남편이 멋대로 그를 "치유"하게끔 방관했다. 두꺼운 갑옷을 무기로 그냥 몸을 감은 채 묵묵히 공격을 받아낸다. 

그러나 이 소설의 표지는 우리가 보아아 온 몸을 말고 있는 천산갑이 아니라 걸어가는 천산갑이다. 아니, 이미 반 쯤은 떠나버린 천산갑이다. 멸종 위기의 동물 천산갑처럼 보였던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씩씩하게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이 슬픔과 상처를 딛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아프고 잔인한 사건들 속에서 천쓰홍 작가만의 유려한 문장만은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현실은 잔인하지만 여전히 문학이 주는 힘은 크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독자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고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어디로 이어질 지 끊임없이 궁금해 한다. 다음 책장을 쉼없이 넘기게 하고픈 힘이 이 소설에는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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