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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맨손문고 2
이지원 지음 / 곳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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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이지원)

지원쌤을 문학의 곳간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합천에서 독서모임을 하러 부산까지 온다고?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대성쌤이 하는 글쓰기 수업에 여러차례 참석을 했고, 곳간에서 나온 <살림문학(2024)>에 징원쌤의 글이 많이 실렸는데, 지원쌤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원쌤 글만 우선적으로 먼저 찾아 읽었다. 다른분들의 글도 좋지만, 지원쌤의 글이 내게는 흥미로워서 더 관심이 갔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소수자성의 이야기에 열려있는 태도가 있는 분이라 오히려 지원쌤의 관점과 이야기가 궁금해서 매번 곳간 모임을 기다렸다. 아버님의 사랑을 흠뻑 받았고 직장암4기를 선고 받고 아버지 곁을 지킨 경험이 있다. 부모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나로서 지원쌤의 경험이 궁금하고 신기했다. (물론 나는 짝지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다. 충만함의 성격으로는 비슷한 거 같다) 대성쌤이 맨손문고 시리즈로 얇은 책을 두 권 내는데, 지원쌤의 책이 한권이라 해서 너무너무 읽고 싶었다.

<살림문학>에서 읽었던 글도 좋았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 분량도 조금 더 긴 글들을 만날수 있어 좋았다. 글을 계속 쓰시다가 또 다음 책이 엮어 나온다면 그 책은 묻지 않고 사서 읽고 싶은 글이었다. 아버님에게서 받은 사랑, 아버님을 향한 애착, 아버님의 마지막을 곁에선 지킨 이야기가 한권의 책으로 엮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일상을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글을 종종 쓴다. 궂이 그런것까지 디테일하게 쓸 필요가 있나 싶을정도로 평범한 일상속의 어떤 이야기들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타인에게 말걸기에 필요한 일상의 디테일 묘사다. 지원샘이 사시는 곳은 합천이고, 살림과 양육을 하고 사각사각이라는 글방을 2017년부터 운영했고, 시골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지원쌤의 글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라 좋았다. 살림의 일상속에서 폄범한 속에서 비범한 것들을 발굴해 내는 시선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활동반경이 그리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글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흥미진진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데 그안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힌다.

중1, 여덟살 딸 두 명과 일곱살 막내아들과의 생활을 읽었다. 그 아이들은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범생이스럽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이들 각자가 자신의 경험으로 삶을 살아갈수 있도록 자녀들과 거리감도 적절히 두려고 한다. 첫째가 지니는 무게감을, 둘째가 중간에 낀 자녀로서의 느끼는 눈치, 긴장감, 그래서 어른스러울수 밖에 없는 것을, 누나들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에겐남 같은 막내의 특성들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맞게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양육방식은 무엇언지 고민하는 양육자다. 아이들이 놀이처럼 책을 읽고 마이쮸와 뒹구는 아이들의 소란함이 있는 독서교실‘사각사각’을 운영한다. 한번도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없이 함께 책을 읽고 즐기고 대화를 나누다가 공감하고 질문하는 선생님이다. 강남 대치동에서 강사로 일할때는 생각할수 없는 시골이기에 가능한 교육방식이지만, 요즘은 시골도 입시의 압박을 무시할수 없기에 그녀의 교육방식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선명한 글도 있고 모호하고 불안정하고 잡히지 않는 글도 있다. 나는 선명한 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 뒤쪽에 실린 불안함과 혼란의 마음들을 잡아보려는 글쓰기도 좋았다.

95p - 무엇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가리고자 하는 글쓰기. 쓰고 싶은 무엇을 쓰려는게 아니라 쓰고 싶지 않은 무엇을 외면하기 위해 쓰는 글.

곳간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외면하는 지원쌤을 만난다. 그런데 아마 지원쌤은 그 주제들을 오랫동안 천착해가며 글로 자기 마음을 잘 퍼올릴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의 지원쌤의 글쓰기도 기다려지고 궁금해진다.

세 아이를 키우며 자기 시간을 내어 글을 계속해서 써내는 것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다. 나도 내 일상속에서 부러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고 그림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일상을 담은 글을 쓴다. 지원쌤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전혀 결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어떤면에서는 만나는 느낌이 든다. 합천이 아니라 양산이나 부산, 경주, 울산에 사셨다면 아마 차한잔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SNS도 안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원쌤을 만나는 기회는 한달에 한번 곳간이 유일하다 그녀가 들려줄 이야기가 기다려져서 한달을 설레며 기다린다. <사각사각>을 읽으니 이지원 유니버스를 조금 만난 것 같아 흡족하다. 자신이 쓰는 글을 누가 읽을까 하는 생각은 글을 쓰는 사람이면 자주 하는 질문이다. 지원쌤에게 독자한명이 있다고, 그러니 누군가 읽는 글이라 생각하고 오래오래 계속 글을 써 달라고 이야기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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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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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박선영)

서평 이벤트를 신청해서 받은 책인데, 읽어보니 좀 난감하다. 내 취향의 책이 아니었다. 서평을 쓰겠다는 약속으로 받은 책이니 서평을 써야겠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별로였던 이유를 길게 나열하기는 좀 그렇다. 그래서 책에서 나온 몇가지 주제에 대한 내 생각들을 적고 마무리 하려고 한다.

저자는 한국일보에서 17년간 근무하셨고, 직장을 그만두고 7년이 흘러서 이 책이 나왔다. 저자는 윤리적 허영이 있다고 인정하고, 건강염려증 환자라 고백하고, 중증 의미병 환자라 고백하고, 있어보일러티 때문에 있어보이고 싶어서 신문기자가 된거 같다고 고백하고,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고, 망상적 자아비대 문학도였음을 고백하고, 한때 여행에 대한 게걸스러운 식탐이 있었음을 고백하고(여행 강박증), 인간으로서 조금은 숭고하고 싶다고 말하고, 성공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분열적인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점을 좋게 보는 독자도 있는 것 같지만, 내게는 맞지 않았다. 솔직하게 이 책의 컨셉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담백하게 쓰는 걸 좋아하고, 자신이 아는 범위안에서만 쓰는 걸 좋아한다. 세상을 분석하거나 한국인을 분석하는 하거나 사람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 보다는 그냥 내가 살아온 삶속에서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 하는 것에 더 마음에 가는 편이다.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챕터가 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슬픔과 힘듦은 수시로 나에게 덥치는 것이다. 29년의 우울증 기간속에서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든 줄 알았다. 아픔속에 깊이 빠져 있으면 자신밖에 보지 못한다. 우울증이 심해질때마다 늘 옥상에 올라갔고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봤다. 몸이 멀쩡한데도 삶이 이렇게 힘든데, 혹여나 자살에 실패하면 그 삶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확실히 죽을게 아니라면 시도할 수 없었다. 무섭기도 했다. 이런 형편없는 나라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느꼈고, 그래서 살아야 겠는데 어떻게 살아야 이 우울증을 벗어날수 있는지 몰랐다. 개인상담과 집단상담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오래 받았어도 우울증은 늘 수시로 찾아왔다. 내가 과연 나아질수 있을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주변에 좋은 어른도 없었고 롤모델도 없었다. 롤모델을 찾기 위해서 생전 책을 읽지 않던 내가 도서관을 찾았다. 롤모델이 어려움을 극복한 극복스토리의 주인공이라 생각지 않았다. 이 우울증이라는게 극복할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걸 인식은 했던거 같다. 평범하지는 않는데 자신의 방법을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당시 우울증 책은 없었지만 우울증 외에도 다양한 소수자의 이야기들을 읽었다. 세상에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겁지만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 이야기들이 위로가 되었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그 많은 힘든 사람 중에 하나라니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우울증이 없어지는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괜찮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초중고 대학 친구가 없고 대학을 중퇴했고 군대에서 손목을 그었고, 미래가 두렵고, 우울증이 있어도 그냥 내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큰 아픔을 겪은 사람과 무난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사람이 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걸 배웠고, 세상에는 소수자로서 부당하게 차별받고 아픔을 겪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내가 지금 누리는 행복이 내 노력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겸손을 배웠고, 내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걸 배웠다. 세상의 멸망을 내가 막을수는 없지만, 무언가라도 내가 할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중요한 것은 멸망하는 세상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임을 배웠다. 29년간의 우울증의 시간이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이 앞으로 남은 생에서의 나에게 엄청난 원동력이 되어주었음을 이제야 그 시간을 끌어안을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아픔과 내 우울증에 한해서 전문가이지,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들을 찾아 읽는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읽는다. 내가 모르는 다른 아픔을 지닌 사람 옆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옆에 있어야하는지 알기 위해 읽는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그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 공부하고 읽는다. 나는 내 아픔만 알 뿐이다.
(서평이벤트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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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시간 - 안희정 몰락의 진실을 통해 본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속성
문상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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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시간(문상철)-안희정 사건을 둘러싼 정치의 속성을 다룬 책

부제는 ‘안희정 몰락의 진실을 통해 본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속성’이다. 중반부까지는 저자가 안희정의 참모로 일하며 겪었던 정치판의 풍경을 그렸다.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어떻게 일하는지, 정치인의 취약함을 어떻게 대하고 상대진영으로부터 공격받지 않게 방어하는지, 차기 대선주자라는 말을 들을정도로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때 어떻게 그 권력에 잠식되어 가는지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안희정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 대통령 경선 후보 수행팀장인 문상철씨에게 악역을 맡길 권했다. 의전의 전혀 없는것처럼 보이도록 하되, 의전을 적극적으로 누리고 싶어했다. 안희정을 악마화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권력을 가졌을때 그 권력에 취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 질문을 던진다. 권력이 있는 자리에는 권력을 쫓아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많이 모이게 마련이다. 정치라는 것이 서로의 이익을 쫓아 서로가 원하는 합의점으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항상 생각해야 한다.

중반 이후부터는 안희정의 성폭력 사건과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김지은씨의 미투 직후 안희정의 성폭력 사건을 알게 된다. 자신 또한 이 범죄를 용인한 무수히 많은 공범중 하나다 라는 생각을 하며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197 -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과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힘의 불균형이 눈에 쉽게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제가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것보다는 격리 조치부터 먼저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조치한 것입니다.

많은 것을 함께 했고 안희정과 나은 세상을 만들기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저자이기에 고민이 깊었고 신중할수 밖에 없었고, 안희정에 대한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피해자 편에 서기로 한다. 그러나 안희정은 범죄를 시인한 메세지를 낸후 다시 하루도 안되어 입장을 번복했다. 아마 자신이 그동안 기울였던 노력과 그것으로 인해 누리던 것들을 하루아침에 날리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루도 안되어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태도를 바꾼다. 그리고 안희정 이름세의 이익을 누리려는 자들의 엄청난 2차가해가 이루어지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저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안희정이 죄가 확정되고 복역중 모친상이 있었는데도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스스로 말하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정치권 인사들이 조화를 보내거나 조문을 했다. 그러니깐 정치인들에게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젠더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떨어지는 집단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끝나고 저자는 정치권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안희정의 최측근이었던 저자를 받아주지 않아서 결국은 정치를 그만둘수 밖에 없었다. 정치는 떠나지만, 한국정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가지 정도를 말한다.

첫째는 운동권 세력의 가부장성이다. 장자나 적자라라는 말, 형님, 누나라는 말, 식구라는 말. 모든 것이 가족중심적이고 가부장중심적인 언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민주적이다 말하지만, 젠더적인 부분에서는 자주 가부자성들을 드러내기에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에 과연 진보세력이 있을까. 그들의 이권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보수세력일 뿐이다. 국힘은 너무 오른쪽에 있는 집단이다보니 민주당이 진보적으로 보일 뿐이다. 매일매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살인 사건들이 뉴스에 올라오고 있는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지 남성들의 역차별 문제에 대처라하는 지시를 내리는 이재명 대통령이다. 행정적인 일은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젠더 의식은 배워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정치권에서의 팬덤문화의 위험성이다. 물론 팬덤문화의 장점도 있다. 어느 지점까지 팬덤문화의 영향을 막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박원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때 박원순이 해온일 때문에 형성된 그 팬덤문화가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2차가해를 한 것이다. 박원순지지집단은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며 2차가해를 서슴치 않았다.

세째는 인연, 혈연, 지연이 아닌 정치 지망생들이 정치를 배울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고 깊이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러면 기존에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과 가 닿을려고 한다. 그 연들로 인해 피해자를 지지했던 저자가 공격받았고 결국 정치에서 떠날수 밖에 없었고, 피해자 김지은씨 또한 엄청난 폭력을 당했다.

<김지은 입니다>를 읽어보면 위력에 대한 성폭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폭력” 이 아니라 “위계에 의한”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내 주변인중 가해자가 있거나 피해자가 생겼을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할지 알게 된다. 그런 인식과 공부가 없으면 나또한 누군가의 가해를 방조하거나 2차가해를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김지은씨와 김지은을 지지하는 사람들 모임과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제대로된 진실이 가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다. 나는 그런 가해자가 안될꺼야, 2차가해를 하지 않는 사람이야 라고 확신하지 말았으면 싶다. 성폭력이 이루어지는 속성을 모르면 나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떠났지만, 문상철씨의 삶을 응원하고, 김지은씨 또한 그 어느 곳에서 하루하루 잘 생존해 살아나가시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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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결심 -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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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결심(이화열 지음)

부제는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이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존엄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다. 작가님은 <서재 이혼 시키기> <지지 않는 하루> 등을 쓴 에세이 작가이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시어머니 아를레트와 편안한 습관처럼 30년을 지냈고, 어느날 어머님은 조력사를 원하고 작가님이 그 옆을 지키면서 죽음과 늙음에 대해서 사유한 철학에세이 이다. 작가님은 시어머니와 평어로 대화하는데 존댓말을 쓰지 않고 평어로 표현한 부분이 그들 관계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안락사는 의사의 손을 빌려 죽음에 이르는 것이고, 조력사는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스스로 마지막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다. 프랑스에는 안락사와 조력사 둘 다 혀용되지 않아서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하기로 신청한다. 조력사 비용은 만유로(협회 수수료, 행정비, 화장비 포함)이다. 한국돈으로 1유로가 1674원이니 1600만원 정도가 드는 셈이다. 너무 가난한 사람은 조력사나 안락사도 선택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의 안락사는 스위스에 비해 까다롭다고 한다. 전화로 마지막 결심을 확인하는 인터뷰장면이 등장한다 .스위스에서는 환자 내면의 고통도 죽음에 이르는 ‘충분한 이유’로 간주한다고 하는데, 충분한 이유는 어떤 기준일까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내면의 고통은 워낙 주관적일수 밖에 없는데, 어떤 근거로 그 고통의 크기를 확인하는 것일까하는 궁금함.

<서재 이혼 시키기>에 보면 작가님은 철학책을 자주 읽는 편이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죽음과 늙음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단단하다. 그리고 문장들도 담백하다. 그 담백한 문장을 내기까지 평소에 얼마나 그 주제에 대해 생각했을지 상상해본다.

아를레트는 낙상사고후 등이 점점 굽었고, 황반변성으로 시력이 흐려졌다. 내향적인 성격에 가족을 챙기는 일이 전부였고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는데, 그 독서의 즐거움을 잃는 기분이 어떨까. 그래서 오디오 북을 종일 틀어 놓으신다. 걷는게 버거워서 거의 집에만 있고, 눕고 일어나려면 도움없이는 불편해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고, 듣는 건 희미하고, 보이는 건 어둠일때 혼자 있는 집에서 느끼는 그 적막감과 고립감은 어떨까. 그 밤은 얼마나 길까. 하루는 한 달 같고, 밤은 너무나도 길고, 새벽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어른들이 자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오래 살아온 집에서 머물길 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녀에게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삶은 아직 자신이 결정한다는 감각이 허락되는 공간이다. 식탁위에 무엇을 놓을지, 커튼을 열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곳. 그 일상의 사소한 결정들이 ‘나는 아직 삶의 주인이다’라는 감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작가님과 시어머니 아를레트는 목요일마다 샴페인을 마시는 시간을 가진다. 그녀가 가질수 있는 몇 안되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 같다. 아를레트의 딸 안느는 어린시절 아를레트가 아들 올비를 더 편애했다고 생각한다.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안느가 미워보이는 장면이 종종 있었는데, 안느의 입장에서는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은 든다. 조력사 직전, 아를레트는 손자들과 통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안느는 알았다고 해놓고 할머니를 찾는 자신의 자녀들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에게 손자들 전화를 바꿔준다. 마지막 가는순간에도 어머니 마음의 평온보다 자녀들을 달래는 일이 더 중요한 안느가 안타까웠다. 남편 올비의 무해하고 중립적인 태도가 결국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안느라는 존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를 해왔다는 점에 동의한다.

나의 어머니도 외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미해결 과제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환청이 들리고 혼잣말을 해서 정신과 약을 복용하길 원했지만, 할머니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약을 드시지 않았다. 그모습에 화가 난 엄마는 6개월정도 할머니집을 방문도 하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매번 만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친척들에 대해 욕을 퍼붓는 모습이 엄마는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할머니가 엄마집에 가면 엄마는 자기 방안에 들어가서 앓아 눕는다. 여동생(엄마와 둘이 산다)은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때론 무섭고 공황이 올 것 같았다고 최근에 나에게 말해주었다. 동생이 어린시절 그 둘 사이에서 경험한 감정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나는 그때 우울증으로 내방에만 누워 있었으니 동생은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엄마의 미해결 문제를 왜 여동생이 중간에서 감당해야하는지 좀 속상해서 엄마에게 다시 상담을 받으며 외할머니(엄마에게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어린시절의 분노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며 지나가는 말로 던진 적이 있다. 할머니의 나이가 98세이니 곧 돌아가실텐데, 미해결과제를 풀지 못하고 떠나보낼지도 모르지만 그건 엄마의 몫이다.

돕는다는 건, 돕지 않는 법을 아는 일이기도 하고, 소통은 말이나 기술이 아니라 늙음을 이해하고 침묵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삶은 과정이고 슬픈 건 고독한 죽음이 아니라 어쩌면 외로운 삶일지 모른다. 작가님은 사람은 결국 살아온대로 죽는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죽고, 단호한 사람은 단호하게 죽는다. 관계의 단절로 외로운 사람은 죽음조차 외로울수 밖에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책속에 영화 <씨 인사이드> 이야기가 나온다. 2007년 영화다. 안락사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존엄한 삶은 무엇인지 죽음조차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존엄하게 마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원칙이 없기에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평소 죽음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늙음으로 인한 삶의 주도권을 점점 잃어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공부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98세의 외할머니도 77세의 어머니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지지 않는 하루>에는 작가님의 암투병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잠식한다고 본다. 나의 죽음을 떠올렸을때, 나의 부모의 죽음을 떠 올렸을때 나는 어떻게 준비를하고 어떻게 떠나 보낼것인가(떠날 것인가). 어떤 감정들이 들까. 두려움, 공포, 슬픔, 분노 등등 그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감정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오랜시간 충분히 한다면 우리는 어느날 죽음이 왔을때 생각보다는 덜 당황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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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멜버른의 케어러 - 이민, 장애, 나이듦, 그리고 돌봄의 세계에서 내가 배운 것
루아나 지음 / 메멘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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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멜버른의 케어러(루아나 지음)

부제는 이민, 장애, 나이듦, 그리고 돌봄의 세계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교사셨고 , 현재는 호주에서 살고 계시며 요양보호사와 장애인지원사 일을 하고 계신다. 신경 다양인 아들이 태어나면서 돌봄과 장애 분야에 관심이 생기셨다고 한다. 여기서 “신경다양인”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발달장애나 자페를 장애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사람이 2층 식당에 가지 못하면 한국에서는 자신의 장애를 탓하지만, 휠체어 이용자가 갈수 있도록 만들지 않은 가게와 그것에 대한 배려나 정책이 없는 한국사회의 문화를 문제시 삼으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깐 발달장애인이나 자폐인, ADHD가 있는 사람을 기존사회에 녹여 사회성을 키우도록만 교육할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은 그들과 어떤식으로 소통할지 고민하고 그들의 사고로 대화하는 것도 공부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주가 한국과 이렇게 다르구나 충격을 받는다. 호주에서는 모든 사람이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도 대학을 간 사람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한다.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돌봄노동이 중요해지는 사회(노령화 사회)가 되어가건만 여전히 그들의 급여는 낮고 소모품 취급받고 일하는 환경도 너무 열악하다. 작가님은 한국에서 교사일을 하시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건강을 잃어 다시는 노동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짧은 시간 근무하는 조건의 일도 많았고 비정규직도 정규직 못지 않게 월급을 받는 문화이기에 조금씩 요양보호사 일과 장애인 지원일을 하면서 시간을 점점 늘여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긴 시간 여행을 떠나더라도 미리 공지만 해주면 대체인력이 있고,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다시 원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양보호사 일과 장애인지원일을 하며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건 제대로 된 급여가 책정되기에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북토크를 들으면서 이나라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을까 싶었다.

물론 호주가 판타지 같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호주는 느리고, 사람들이 불편함을 견디는 인내심이 크다고 했다. 한국의 다이나믹함이 맞는 사람은 호주가 심심할 수도 있을것 같다. 장애인들이 그들의 이동권 투쟁을 위해 아침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탄 것만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불편하다며 장애인 투쟁자들을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나라이다.

과연 선진국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느린 것을 수용하고 다른 것을 수용하고 불편함을 인내할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약자들이 행복할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어느 위치에서는 약자인 것을 우리들은 망각하고 있거나 자신은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 행복을 찾아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 쉬는 시간도 스펙이 되는 것들만 하려는 강박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해질수 있을까. 행복은 무언가를 가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속에서 이미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시선과 철학으로 얻을수 있는, 부단히 노력하는 어떤 태도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호주의 노동자를 대하는 문화나 약자나 소수자들을 다양성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부럽기만 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상상하게 해주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다.

호주는 한국의 78배 넓이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장애지원이나 요양보호사 지원의 제원을 높은 소득세에서 채운다고 한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세금을 내는 문화는 한국에서는 없다. 그것조차 투쟁을 해서 어렵게 얻어가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되고, 그 과정속에서 장애를 얻고 병을 얻는다. 나와 관련이 없는 영역이 아니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한 일을 미래에 내가 겪을일이라고 생각하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할 이유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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