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우리는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물과 풍경들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경험하며 삶을 살아간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하루가 모여 한해가 되고, 그런 한해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존재하였기에 쓸모와 필요만으로 이루어진 기능적 삶의 루틴을 벗어나 여유를 풍경으로 두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우리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온도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시킨다. 눈앞에 찬란하게 펼쳐져 있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기도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의 내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는 친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지만, 우연히 먼 친척집에 맡겨지면서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게 되는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에는 상실과 결핍을 경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엄마 소가 생산해내는 우유 대신 인간이 만든 이유식을 먹으며 성장하는 송아지처럼 친부모에게서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녀'가 그렇고, 사랑스러운 자식을 잃고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킨셀러 부부'가 그렇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올 수도 있는 반면에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날 수도 있다. 질서와 혼돈의 경계를 걷는다는 것은 삶의 길 위에 있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면서 상실과 결핍을 대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극복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이다. 이해는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될 수도 있고, 이미 사건을 겪었거나 체험중인 타인에 대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 '이해'란 품이 드는 일이다. ‘이해’란 타인과의 온도를 맞춰가는 과정이며, 이는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는 몰이해의 꽃매의 형태로, 잘 포장된 예쁜 합리성의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예의를 생략하거나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다기오기도 한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오늘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p. 72)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삶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우리 안에 존재하는 괴물은 점점 더 포악해져간다. 삶의 의미는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위험 앞에 선 사람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하고 용감해질 수 있다. 또한 소설 <맡겨진 소녀>에서 우리가 지켜본 것처럼 진실한 관계 구축은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하여 어떤 짐이라도 함께 짊어질 수 있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민코프스키는 '체험되는 시간 (Le temps vecu)'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인간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지만, 공존을 위한 노력이 존재할 때만이 '체험되는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시공간만을 공유하며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체험되는 시간'이 아닌 '죽은 시간'이다. 노력하는 두 사람만이 같은 장소에서 체험되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 민트코프스키의 주장처럼 사랑은 시간을 쌓아나가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을 그의 곁에서 보내며 그 시간 속에 함께 했던 경험을 담는 일이다. 당사자들만이 기억하는 '체험되는 시간'을 만들고,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손가락 사이로 슬그머니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p. 83)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나는 체험되는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멋진 대화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처음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졌을 때 소녀는 평소의 자신으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자신으로 변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킨셀라 아저씨와 처음 손을 잡은 순간에 소녀는 그동안 아빠가 자신의 손을 한 번도 잡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당혹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녀는 킨셀라 부부와 생활하면서 마치 자전거 타는 것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시작을 느꼈고, 전에는 갈수 없었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까지 느끼게 되었으며, 결국 자신이 자유로워졌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소녀는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자신의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은 이 사람 앞에서는 평소의 모습으로 처신해도 된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즉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포용하고 있고 내가 타인에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레어 키건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p. 1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청사진 (Blue Print)’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행위는 특정 시점의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 보다 그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스크랩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정 시간에 걸쳐 대상을 관찰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걸쳐 변화하는 대상의 입체적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특정 시점에 국한된 대상의 모습을 무엇보다 정확히 포착하는 반면 그림은 일정 시간 동안의 대상의 변화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진이 아닌 그림을 지향하면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그려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행복과 미래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속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구축하며 쌓아온 세월의 궤적은 사진 보다 불분명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의 농축성을 기반으로 안정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질서 너머의 미래 모습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깊은 감동의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라는 허진 번역가의 소설에 대한 평가가 계속해서 뇌리를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