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64>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고, 주위에서의
추천도 있었기에 예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근 700페이지에 달하는 다소 부담스러운 분량과 경찰 조직 내 갈등이라는 무거워보이는 주제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향후 독서 리스트로 미뤄뒀었다. 그러던 와중 최근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빛의 현관>을 접하게 되었고, 휴먼 미스터리라는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전작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 때 불현듯 미뤄뒀던 <64>가 생각났고,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빛의 현관>을 출간한 출판사에서 그의 전작 중 <64>를 대표작으로
꼽으며, 이번 신작과 비교해서 소개하는 포스팅을 봤던 것이
<64>에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카미는 층계참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 위층은 형사부, 아래층은 경무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p. 143)
<64>는 14년 전 일어난 미해결 아동 유괴사건을
큰 줄기로 주인공인 경찰 홍보 담당관 미카미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찰 조직내의 갈등과 언론으로 대표되는 조직 외부로 파생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형사부에서 형사로 오래 복무하다가 경무부에 소속된 홍보담당관으로 발령난 조직 내 갈등의 경계에 위치한 미카미는
경찰조직에서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유일한 창인 홍보부서의 수장이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가출한 딸을 찾아 다니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여러 갈래로 갈라져 중첩되어 있는 갈등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미카미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평하지
않은 싸움이다. 무슨 게임인지 미카미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후타와타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딪친다.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확실한 예감이 가슴을 채웠다." (p. 163)
"지금 상황은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범인을 쫓는 것이나 다름없다. 손에 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p. 171)
"게임판 위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말. 그들은 확실히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다. 부딪칠 것인가. 아니면 한쪽이 사라질 것인가. 하지만 아직도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길 수는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 걸까." (p.199)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 (출생)이 있고, 끝 (죽음)이 있다는 것?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왜 싸워야하는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만 하는 미카미, 손에 쥔 정보 없이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만으로 범인을 쫓는 형사,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게임판 위에 올라서야 하는 체스의 말과 다를 바 없다.
소설 속에서 미스터리를 쫓으며 진실을 갈구하는 인물들은 내면에서 욕망과 갈등이 꿈틀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경찰조직 뿐만 아니라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에서도 조직간의 갈등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라인 (Line) 조직과 스탭 (Staff) 조직간의 갈등을 들수 있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는 회사조직에서는 생산과 영업 등 회사의 사업성과를 창출하는 라인조직과 인사와 재무 등 회사의 살림을 챙기는 조직간에는 견제와 갈등, 알력 싸움이 벌어진다. 소설에서 현장의 최전선에서 범죄를 막고 있는 형사부와 인사와 홍보를 담당하는 경무부간 벌어지는 갈등을 보면서 회사의 라인조직과 스탭조직간 갈등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64>는 경찰조직을 통해서 재현해낸 사회 갈등과 그 갈등의 한가운데에 있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조직간 갈등 속에서 번민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에 대해 탐구하며, 인간 성장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읽고 나서 언제나 머릿속에 남는 건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다.“
- <64> p. 691, 옮긴이의 말 중에서 –
<64>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는
휴머니즘에 머무르지 않는다. 휴먼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작가는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 14년전 벌어진 D 현경 최대의 난제이자 아킬레스건으로 존재하는
유괴사건 '64'를 둘러쌓고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들이 또 다른 유과사건으로 해소되는 구조는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 대목애서 ‘희망‘을 언급한다. ‘모든 것을 뒤엎고 싶었다. 세상도, 그들도, 허수아비
같은 나 자신도‘라는 소설 <64>의 홍보문구
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작가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거대한 조직 속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희망‘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은 연약하고 초라해보이는 개인, 즉 ‘인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