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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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동무 한 명과 과자를 훔치려고 계획을 세웠다. 한 명은 주인과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한 명은 과자를 가방에 넣기로. 긴장 속에 행한 작업은 성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이렇게 본능을 자극하여 훔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굶주림>을 읽으면서 9살 그때를 기억나게 했다. 문제는 배고픔이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면 굶주림으로 진화한다.

굶주림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북한의 어린이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 '자연재해를 당한 지역의 아이들'의 일상은 어쩌면 굶주림의 자기 증명이다. 그들을 통하여 증명되는 굶주림은 일상이며, 인생살이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인간이, 인간이 아닐 수 있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굶주림이 일상화되었을 때,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굶주림>은 물론 이런 거창한, 지구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굶주림을 고발하고 있지 않다. 한 인간이 한 글쟁이의 일상을 통하여 굶주림을 그리면서 그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주고자 한다.

한 글쟁이가 있다. ‘글쟁이’ 그래도 조금은 인간답고,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는 한 인간 아닌가? 약간은 고상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그가, 굶주림 앞에서 "초등학생이 푼푼이 모은 부스러기 돈이 길바닥에 떨어지고,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남은 한 푼이라도 가로채고 싶을" 정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굶주림은 '고상한 척' 하는 한 인간이 식욕이라는 본능 앞에 굴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식욕을 채울 수 없기에 잠자리까지 위협받는 현실, 남은 옷가지까지도 벗어주어야 하는, 인간이 가진 성욕이라는 본능까지 통제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 그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스스로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가 속한 사회는 개인적 굶주림에 관심이 없다. 이 시대 우리가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당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결과는 뻔할까? <굶주림>은 쉽게 말하지 답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조끼까지 전당포에 맡겼다. 하지만 그는 이상했다. 굶주림이 과했던 것일까? 굶주림 앞에 굴복한 것일까? 아니면 식욕이라는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여 본능을 다스리고, 본능에 영원히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한 것일까? 거지 노인에게 적선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산 속에 들어가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것을 본능으로 생각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식욕이라는 본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 군상들과 동무하며 함께 하는 공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지만 굶주림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적선으로 굶주림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글쟁이, 선원, 동무를 만나 10크로네, 1크로네, 2외레 하면서 먹는 것에 끊임없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자유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인간'을 알 것 같다.

글쟁이로 인생살이를 연장시키기 위해 양초를 외상으로 사기 위하여 갔지만 멍청한 점원 때문에 횡재를 하고 비프스테이크를 마구 먹고, 웨이터에게 적선한다. 굶주림이 보여주는 생래적인 반응인 토함으로 그가 얼마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인지 나타내고 있다. 양심과 고상함, 본능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 그는 고민하지만 가난한 노파에게 적선으로 마무리한다.

과연 그는 적선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음인지 점원에게 찾아가 자신이 훔쳤다고 오히려 호통친다. 재미있는 인생살이의 증명이다.

굶주림은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이다. 그는 굶주림의 주관을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면서 객관화시키고 있다. 왜 그럴까? 글쟁이라는 고상함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는 언듯언듯 반응한다. '춥지 않다고,' '배고프지 않다고' 거짓말이다. 배고프면 고픈 것이고, 추우면 추운 것이다. 3자가 보기에 그는 춥고, 배고프다. 3자에게 배고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도 고상함을 뭉개는 것일까? 그냥 배고프다고 외치면 된다. 왜 배고픔, 아니 배고픔이 진화한 굶주림이 사실이니까?

배부른 돼지가 되기 싫다는 이들도 있지만 어쩌면 거짓일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 고상함을 쫓다가 일상과 식욕이라는 본능을 무시한다. 사실 그런 이들은 식욕이라는 본능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굶주림, 아니 배고픔도 모르는 고상한 인생살이들이기에. 배부른 돼지가 되기 싫다는 배부른 후에 할 수 있는 말임을 우리는 <굶주림>과 북한의 어린이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하리라.

그리고 그가 하는 말 "친절한 하나님, 나를 왜 이다지도 못살게 하십니까? 나는 이 비참한 삶에 완전히 지치고 말아 더 이상 싸워 나갈 의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속옷도 갈아입지 못하였습니다." 굶주림이 진화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절박함에 대한 호소일지라도, 예수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외친 말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와 동일할 수 없다. 그가 경험하는 굶주림은 어쩌면 자기 내면 속에서 스스로를 굶주림 속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글쟁이, 우연히 얻은 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주관적, 본능적 굶주림을 다른 이들에게는 증명하지 않고, 자기는 조금은 고상하여 다른 이들에게 은택을 베푼다. 그가 할 일인가 존경의 대상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리라. 식욕의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가 정말 다른 이들을 향한 고상한 나눔이 존경받을 만 한가? 그렇지 않다. 이유는 자신은 끊임없이 배고파하고,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값어치가 반 푼어치도 없는 '단추' 하나에 목숨을 걸고, '대팻밥'으로 정신의 몽롱함에서 잠깐의 자유를 얻기에. 본능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결정이다.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을 비난하고 참다운 인생살이가 아니라 말하는 것은 본능을 채운 자들의 고상한 논리일 뿐이다. 본능을 채우지 않는 사실 본능을 통제하기 어렵다. <굶주림>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생군상들은 고상함과 굶주림을 동일함으로 보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굶주림이 나를 지배할지라도 고상하면 인간답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부름을 경험한 자들은 굶주림에 찌든 자들에게 제발 좀 고상해져라 말한다. 이에 반대한다. 과연 그럴까? 배부름으로 뱃속에 가득 채워진 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말은 굶주림이 가져다 주는 본능의 쇠약함을 경험하지 않고, 고상함을 논할 수 없다. 본능에 충실한 자, 그리고 그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정말 인간일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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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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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사람을 '객관'을 아니라 '주관'으로 평가한다. 사적인 감정이 더 강하게 자리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상과 이념에 맞지 않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그가 이룬 업적에는 별 관심 없이 비난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롬멜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사막의 여우' 정도일까? 맥아더, 아이젠하워, 버나드 몽고메리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가 '나치' 장군, 패전국의 장군이기에 더 그러할 것이다. 나 역시 롬멜은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사막의 여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번에 마우리체 필립 레미의 <롬멜>을 읽고 난 후 롬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우리체 필립 레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사막의 여우'에 대한 또 하나의 영웅찬미가도 아니며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한 보복 조치도 아니다. 이 책은 원전을 기초로 진정한 롬멜의 모습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본문 17쪽 인용.

롬멜이 무슨 일을 하였고, 어디에 가입되었고, 어떤 일을 하였는지가 아니라 '인간 롬멜'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사실 그는 분명 나치에 부역한 자이다. 그가 나치 사상을 설파하거나, 준동한 일은 없다할지라도 그는 히틀러 휘하에서 프랑스를 침략하였고, 히틀러를 위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과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나치 부역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다른 군인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전형적인 군인으로 살았다는 사실이다.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승리는 롬멜을 권력의 심장부, 곧 정치군인으로서 가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의 길로만 갔다. 권력의 심장부에 설 수 있었지만 이런 롬멜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정치군인들을 생각나게 하였다.

롬멜은 1942년 11월 '엘 알라마인'에서 '튀니지'로 철수하는 작전에서 진정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히틀러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을 지키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을 생각할 때, 마음 속에서 커다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전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모든 병사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173쪽 인용.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경험 중에서 단 한 가지 실수를 고백하자면 그것은 바로 내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24시간 동안 거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본문 182쪽 인용.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명령에 불복하고 철수를 감행하였다. 전군을 절멸시키는 것은 우유부단한 지휘관뿐만 아니라 무모한 지휘관도 해당된다. 롬멜은 서서히 히틀러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장군이라면, 군인이라면 통수권자의 명령을 절대복종해야 하지만 그것이 참군인의 길이 아니라면 거역할 수 있어야지 않을까?

또 하나 사실은 롬멜은 '유대인 학살'의 전모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롬멜은 '슈트뢸린'에게 유대인 학살의 전모를 듣고 '루게' 제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저 위의 지도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학살 행위는 커다란 범죄이다." 본문 305쪽 인용.

물론 전쟁 자체가 학살행위이다. 무고한 민간인을 어떤 틀 안에 가두어 죽이는 행위도 학살이지만, 전쟁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가는 것도 엄격히 따져보면 학살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하면 군인들이 서로 총구를 통하여 죽이는 행위를 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민간인의 무고한 죽음과는 대비된다. 이런 면에서 롬멜의 발언과 행동은 분명 나치스에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롬멜>은 그의 개인적인 편지, 직접 쓴 일기, 명령 기록들과 메모를 통해 그의 일생을 재구성하였고 가까웠던 사람들의 설명을 덧붙였다. 매우 사적인 자료를 통하여 롬멜을 평가하고 있다. 롬멜이 군인으로서 어떤 결단과 지휘를 하였는지는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 '루시에 몰린'에게 자주 전황을 전하고 자신의 느낌을 자세히 말한다. 1942년 11월 3일자 편지에는,

"사랑하는 루! 전투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있고 나는 그것이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소. 베른트가 총통에게 보고하기 위해 떠난다오. 그래서 내가 저축해 둔 2만 5천 리라를 그 편에 동봉하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신의 손에 달려있소. 아들과 함께 잘 살기를 바라오. 당신과 아이에게 키스를 보내오. 당신의 에르빈." 본문 174쪽 인용.

이 편지를 읽으면서 위대한 장군이 자신의 패전을 예견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패장의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다. 적을 죽여야만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장군이 아닌가? 애틋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 나은 비참한 '한' 장군의 말로가 씁쓸했다.

<롬멜>은 이런 면에서 전쟁과 군인의 냄새보다는 '인간적 군인'의 냄새를 더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사막의 여우' 그는 정말 '나치스'인가? 이런 비유와 질문에 대한 답보다는 정의를 상실한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에 참여하여 서서히 스러져가는 한 군인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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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 / 창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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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헌아! 아니 막둥아! 벌써 중학생이네. 왠지 너만 보면 마음이 아프다. 다른 동무들보다 키도 작아 학교에 들어가서 동무들과 잘 어울려 놀 수 있을지 아빠는 걱정이 많다. 하지만 우리 막둥이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원 다닐 때보다는 더 많은 동무들을 만나게 되고, 전혀 다른 세상이 네 앞에 펼쳐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은 두려움이지만 또 다른 도전이다. 사람을 새로운 도전을 통하여 배우고, 자란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막둥이는 분명 이기고 나갈 것이다.


체헌아! 새로운 세상이란 선생님, 학교, 동무들만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책은 사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사회와 공동체를 알게 하는 중요한 배움터다. 책은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체헌이에게 아빠가 읽는 책 중에 <삼국지>라는 책이 있어 소개한다. <삼국지>는 1800년 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역사 이야기이므로 체헌이의 시간 개념으로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할까? 하여튼 오래된 역사 이야기다.
 

약 1800년 전 중국은 한나라였다. 나라 이름은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면 바뀐다. 우리나라에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이 있었듯이 말이다. 옛날에는 황제가 나라를 다스렸다. 요즘은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거로 뽑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하지만 한나라는 선거가 아니라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세습'으로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황제는 '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늘이 세우신 분이므로 모든 백성들은 충성을 다했다. 지금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졌던 황제지만 시간이 흐르면 황제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황제가 되는 꿈을 꾸었다. <삼국지>는 바로 새로운 황제가 되기 위한 사람들이 싸웠던 역사 이야기다.

 

황제가 되기 위하여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조조․손권․유비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은 바로 이 세 사람이다. 한나라 황제는 권위와 힘이 없어서. 황제가 임명한 제후와 장수가 있었지만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었다.

 

조조는 위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통일하고자 했다. 특히 조조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한나라 황제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 통일 이루는데 가장 앞서 나간 사람이었다. 특히 많은 장수와 군인, 지식과 학식과 지혜가 깊은 책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조는 뛰어난 머리와 유복한 환경, 문학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조조를 속임수를 많이 쓰는 간사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조조만큼 인간미 넘치는 사람도 없다. 조조가 조금 더 신중하고, 다른 사람들을 안아 줄 수 있었다면 역사는 조조 편이 되었을 것인데 그는 역사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유비는 한나라 황족으로 한나라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명분에서 어느 누구보다 앞서 나갔다. 특히 그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라는 출중한 장군,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책사였던 제갈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명분과 능력을 다 갖춘 유비는 촉나라를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유비를 가장 존경한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황족이라는 명분은 유교주의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황족 출신이지만 황제가 될 수 있는 능력, 곧 제황학이라는 능력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 황제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결국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 황제가 될 그릇이 반드시 필요하지. 가장 중요한 장수와 참모를 가졌던 그였지만 이런 한계가 유비에게 있었다. 그는 중원을 통일하지 못했다.

 

손권은 오나라를 세웠다. 손권은 조조처럼 황제를 모신 것도 아니고, 유비처럼 황족 출신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를 형성하여 이룬 나라였다. 처음에는 그는 조조와 유비처럼 중원을 통일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조조, 유비, 손권 어느 누구도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위나라 3대 황제 조방(曹芳)과 4대 황제 조모(曹芼)를 폐위시킨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했다. 나라를 세워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다 사리지고 결국 사마염이 통일을 이룬 것을 보면 역사는 참 재미있지. 

 

아빠가 체헌이에게 <삼국지>를 소개하는 이유는 중원 통일을 이룬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삼국지>가 담고 있는 어떤 사상을 말하고 함이다. <삼국지>를 읽어가면서 아빠가 깨달은바 중 하나는 사람들 중심에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우고, 일으키면서 항상 하는 말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세계 중심을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삼국지>가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삼국지>에는 중요한 사상이 하나 더 있는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다. 앞에서 아빠가 조조와 유비를 말하면서 '황제'를 모시고, '황족'이라는 명분을 가진 사람들이라 말했지. 속으로는 자신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겉으로는 한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한나라만이 아니라 중국은 세계 중심이라는 '중화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삼국지>에서 유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나라 황족과 그가 중국 민족이 '한족'이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무너져가는 세상 중심의 나라 한나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유비로 삼았으므로, 유비는 형제애와 인간애와 충성을 견지한 인물로 그렸다. 중국인들이 지금도 유비와 함께 했던 장비 관우 제갈량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중화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보기에 유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는 것이었다. <삼국지>는 중국이 세계 중심이라는 '중화주의' 자신이 중국의 중심이라는 '자기중심주의'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아빠는 체헌이에게 중화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과연 너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삼국지>에 내재되어 있는 중화주의는 그들만이 세계의 주인이며, 중심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나라는 이방인, 오랑캐라는 생각을 하지. 그 중 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중화주의는 중국 인민들 속에 내재되어 내려 왔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런 중화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즘 미국이 자신들을 세계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과 비슷하다.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미국편에 서면 '선'. 미국 편이 아니면 '악'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고 어떤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아빠가 읽은 <삼국지>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하였다.

 

'여포'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다. 여포는 용맹하고 대단한 장군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간사한 방법으로 죽였다. 아빠가 매우 분노했다. 왜 훌륭하고 용맹한 장군을 죽였을까? '여포’는 중국사람, 즉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포는 정말 능력과 지혜가 있는 뛰어난 장수였다. 이유, 곽기, 맹획 이런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포와 비슷한 경우로 한족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떠나갔다.
 

여포는 지금도 훌륭한 장군으로 존경받고 있지 못하다. 참 답답한 일이다. 한족이 아니면 ‘오랑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사람의 존엄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가장 완악한 모습이지.

 

계속 미국을 예로 들지만 18-19세기 미국이 흑인을 노예로 삼아, 백인들보다 못한 3등의 인간으로 취급했다. 자기들이 기르는 애완용 개보다 못했지. 요즘도 백인들은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런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는 일이기 때문에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중화주의가 지배하는 중국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서 옛날 자신들이 누렸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되찾는 방법이 역사를 통해서 찾았다. 요즘은 뜸하지만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 고대 역사-고구려, 발해-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지배 전략의 기초 작업이기에 위험한 생각이다. 너무 비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북공정 같은 역사 왜곡은 중화주의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지>같은 경우도 이와 맥을 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태어나서 <삼국지>를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여기에 호응하면서 <삼국지>를 많이 읽고 있다.

 

하지만 <삼국지>는 중화주의가 녹아 있는 책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 알아야 한다. <삼국지>를 읽어야 하지만 그 사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중화주의에 서서히 빠져 들어갈 수 있다. <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기에 읽어야 할 책이지만 우리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읽어야 한다.

 

체헌아! ‘황제’는 무엇일까? 왜 조조와 유비, 손권은 그토록 황제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을까? 황제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백성들은 피를 흘렸고, 그들의 생명은 보잘 것 없었다. 황제가 되려고 했던 그들은 백성의 생명을 황제가 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백성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한 번 전투에 몇십명이 아니라 몇천명, 몇만명이 죽어가는 모습은 쉽게, 짧게, 어떤 때는 언급도 하지 않지만 훌륭한 장수들의 죽음 앞에서는 통곡했다. 가슴 아파했다. 훌륭한 장수와 이름 없는 민중의 죽음은 같을 수 없을까? 같은 사람이라도 다르게 취급받는 것 같다. <삼국지>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달리 취급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럴지라도 사람 생명이 존엄하다면 장수와 일개의 병사의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것은 아빠가 인정할 수 없다. 이름 없는 인민의 죽음은 조조와 유비와 손권, 장비, 관우, 제갈량의 죽음에 비하면 황제를 꿈꾸는 일들을 위한 사사로운 죽음이다.

 

아빠는 체헌에게 말하고 싶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존귀하며 그 가치는 같다고. 같다는 생각이 없으면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게 된다. 너는 그 길을 가면 안 된다. 그렇게 가면 결국 자기의 생명까지 빼앗는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모든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존귀하다면 다른 이의 생명도 존귀함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빠는 체헌이가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존귀하며, 사랑하는 대상임을 알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삼국지>에는 또한 '죽임'이라는 잔치가 벌어진다. 많은 전쟁, 권모와 술수를 통하여 적을 죽이는 장면들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살림’의 잔치는 <삼국지>에서 정말 찾아 볼 수 없다.

 

참 이상하다. 죽임의 잔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니, 바로 '대의'다. 한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 자기가 황제가 되는 일이 대의다. 원래 대의란 큰 의라는 말이다.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거룩한 마음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 거룩한 뜻을 이루면서 왜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까? 그들은 말한다. 그 죽음도 대의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그들이 죽임의 잔치를 하면서 하는 말이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야. 

 

이런 대의 사상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라, 나라를 위하여 손해 보라고 말한다. 몇 년 전에 김선일이라는 사람이 이라크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나라가 해준 일은 없었다. 대의를 위하여 우리나라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나라에 군대를 파견한다. 정말 답답한 일이다. 체헌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할까? 아빠에게 묻고 싶다고 아빠는 네가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생명을 존중하라는 말을 아빠는 하고 싶다.


중화주의, 대의, 자기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삼국지>는 한 번은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이다. 읽을만한 책이다. 언젠가 네가 <삼국지>를 읽게 된다면 오늘 아빠가 너에게 쓴 글을 가슴에 묻고 읽으라. 그래 정말 생명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네가 되기를 바란다. <삼국지>가 담은 중화주의, 대의, 자기중심주의를 정확하게 안다면 역설을 통하여 바른 깨우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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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의 보존과 복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2
김주삼 지음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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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2008년 2월10일 밤 8시 40분쯤 국보 1호 숭례문에 불길이 솟았다. 불길이 솟은 지 5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1시 55분쯤 숭례문은 600년 역사를 뒤로했다. 600년 역사가 잿더미로 변한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울었다.

 

 

1971년 송산리 5호분·6호분의 배수구를 마련하는 작업중에 우연히 고분이 발견되었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 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었다. 1500년 역사를 그 때 사람들은 하룻밤 정리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숭례문과 무령왕릉을 우리는 '문화재'라 부른다. 문화재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문화'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Sir E. B. Tylor는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에서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를 '문화'라 했다.

 

 

문화활동 결과물이자 증거물이 '문화재'다. 경제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 인류학적인 의미가 부여된 개념이다. 즉 문화재란,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한 시대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매우 폭넓은 대상물이자, 인류가 과거에 만들어 현재에 전한 문화적 대상물이다.

 

 

숭례문 화재 전에 쓴 글이지만 이런 점에서 김주삼의 책세상 문고 · 우리시대 052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은 의미있는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주삼은 "문화재의 현재 가치에 따라 보존 방법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면서 "무리한 복원 작업을 자제하고, 처리 대상물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과학방법론, 담당자들의 기술력, 전문가 협조, 보존과 복원 기록"을 강조한다.

 

 

김주삼의 지적에 따라 1971년 당시 1500년을 하룻밤 청소하듯 정리했던 일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숭례문 화재 후 2년이면 충분하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아직까지 하는 이들이 있었다. 문화재가 경제 가치가 아니라 인류학과 문화의 대상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이다.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 1장은 문화재의 중요성과 문화재 보존에 대한 개념, 2장은 문화재 보존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여러 손상 원인인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손상과 자연 현상으로 일어난 손상을 살핀다. 특히 3장은 예방 보존 및 복원 방법을 다룬다. 그는 복원보다는 문화재의 현 상태 존중과 수명 연장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방보존이라는 것이 대상물에 손을 대지 않는 보존방법이라는 면에서 보존윤리상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며 여러 연구를 종합해본 결과, 파손이 진행되고 있는 문화재를 일일이 복원해주는 것에 비해 인력 면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큰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84쪽)

 

 

무엇보다 한 번 훼손된 문화재를 아무리 복원해도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든, 자연현상이든 문화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될 수밖에 없다. 복원이 따라 올 수밖에 없다.

 

 

그럼 복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복원 작업에는 '가역성'(reversidility)이 강조된다. 가역성이란 "현재 잘못된 복원이나 향후 복원이 필요한 때를 대비하여 언제라도 최초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복원은 원형 왜곡 금지를 위하여 "복원한 흔적을 보이게 하고, 문화재에 담긴 노화 현상과 역사적인 내용을 존중해야 한다"고 김주삼은 강조한다. 복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이다.

 

 

문화재 보존이든, 복원이든 부러진 의자 다리를 수리하는 것과 아파트를 개보수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삽질 경제가 부활하여 문화재 훼손이 우려되는 요즘 김주삼이 맺음말에서 남긴 글은 문화재 보존과 복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문화재 보존은 창조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들처럼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그 방향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술품을 다루는 보존 전문가는 생명 존중이라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 견줄 수 있어야 한다."(143쪽)

 

 

김주삼 지적은 '보존 전문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고, 특히 이 나라 정권 담당자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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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죽음대역배우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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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95년 1월 어느 날. 경기도 수원 아주대학교 앞 한 건널목에서 나는 죽음 냄새를 경험한 적이 있다. 빨간색 신호등이 건너지 말라는 신호를 끝내고, 초록색으로 바뀌면서 건너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때는 그냥 걸었지만 그 날은 나도 모르게 옆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서 택시 하나가 달려왔다. 떨어졌던 발을 되돌렸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 남자는 그냥 걸어갔다. 죽음에게로. 죽음이 0.01초 사이에 갈렸다. 그 이후 나는 초록색 신호등이 들어와도 결코 제일 먼저 건너는 법이 없다. 0.01초가 죽음을 갈랐다. 아직도 그 남자가 부르짖었던 소리가 귀에 선 하다. “야 이 새끼야!” 과연 그 외침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택시 기사, 아니면 ‘죽음’에게. 아스팔트는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죽음이 남긴 핏자국은 죽음냄새를 더욱 짖게 했다.

 

 

2008년 3월 28일 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아흔아홉 살(白壽)’을 사셨다. 아니 일백한 살을 사셨다. 죽음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의식 없는 멍한 눈빛은 이미 죽음을 풍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처 할머니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가 왔다. 일백한 살을 살든, 한 살을 살든 길고 짧음이라는 차이뿐 죽음은 항상 그 자신에 앞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명’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과 평생을 싸운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드리워진 장애다.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존재. 죽음 앞에 ‘무기력,’ ‘무능력,’ ‘비굴.’ ‘담대함,’ ‘태연함’은 교차한다. 죽음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면서 서서히 인간 모두는 죽음 앞에 자신을 놓아주게 된다.

 

 

이 죽음과 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가 있으니 ‘모리’다. 그는 ‘죽음’이다. 어느 날 무엇인가를 가진 존재, 권력과 금력, 학력, 환경에서 죽음과는 관계없던 방송국 성 감독은 시청률 때문에 고민하는 중 ‘모리’를 섬뜩함, 소름만 경험되어지는 살아있는 죽음, 곧 모리를 만난다.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인간에게 죽음과 가장 밀접하지만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만나게 해주는, 죽음 그 자체를 보여준다.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 그 자체인 모리를 통하여.

 

그 놈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나면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름’이 없다. 성 감독은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따뜻함과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섬뜩함과 소름만 느껴지는 존재,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냄새나는, 구역질나는 더러운 냄새보다 더 역한 죽음냄새 풍기는, 이름 없는 그에게 ‘모리’ 곧 ‘죽음’이라고 불러준다.

 

 

죽음을 만난 경리, 간호사, 해미.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면서도 왜 동지애가 아니라 섬뜩함과 소름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놓고 만다.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들이 죽음을 만나자 섬뜩하여, 역겨워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가혹하리만큼 섬뜩함 때문에 결국 생명을 놓았다. 나 자신이 죽음과 만났을 때도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종필과 진수, 연주는 죽음이 자신 앞에 있지만 역겨움을 느끼지만 조금 다르다. 성공과 자본을 위하여, 연민과 따뜻함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죽음 그 자체를 연기 해 달라고 한다. 모리는 그냥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죽음이 죽음을 보여주는 행위는 쉽다. 아무리 탁월한 연기자라 할지라도 죽음은 연기일 뿐 그 자체가 아니다. 꾸며진 상황에서 나오는 죽음이라는 연기는 사람에게 큰 감흥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 죽음을 보여주는 행위는 섬뜩함, 음습함, 소름 그대로다. 전 사회는 이 죽음 앞에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논쟁하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모리 너 한 사람만이 완벽한 죽음을 생산할 수 있어. 죽음 그 자체를 온몸으로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뿐이야. 숨도 쉬지 않고 체온도 죽은 사람처럼 낮고. 사람들은 카메라 앞으로 바짝 당긴 진짜 죽음을 보게 될 거야. 멀리서 대강 보여주는 가짜 죽음이 아니라 클로즈업된 죽음. 하긴 드라마를 통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거야. 너의 존재에 대해서 말야.”

 

 

이 강력한 요구는 어쩌면 돈 때문에, 성공 때문에 요구되는 인간 깊숙이 묻혀 있는 돈에 노예가 되어버린 근성이 폭발한 것인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직접 경험할 것이지만 죽음을 연기해달라는 이 요구는 이미 죽음보다는 돈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것을 요구하는 이들의 결과가 어떨지 암시하고 있다.

 

 

“구더기가 들끓는 것처럼 더러웠고 인육을 삼킬 듯 잔인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것처럼 포악했다. 또한 악의 근원이 현현한 듯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모리에게서 풍기던 어둠의 냄새, 죽음의 냄새는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으로 바뀌었고 배어나던 슬픔은 예리한 칼날의 광기로 변했다.”

 

 

읽는 이들은 점점 죽음으로 인도된다. 모리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을 보여주는 것 일뿐이다. 어둠의 냄새, 광기 같은 슬픔. 과연 죽음 앞에 놓인 독자는 어떤 마음일까?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가면서 모리와 만나는 독자는 어떤 느낌일까?

 

 

그에게 죽음 냄새가 아니라 연민 어쩌면 사람냄새를 맡은 연주는 <죽음대역배우 모리>에서 독특한 캐릭터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길목에 들어선 경험 때문이었을까? 죽음에게 연주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으로 접근하여 인간이 가진 생명을 향한 갈망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왠지 이는 낯설다. 죽음에게는. 

 

 

그리움, 기다람, 애절함, 기쁨, 행복, 괴로움, 외로움은 사랑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랑. 연주를 향한 사랑, 연주를 껴안고 싶은 욕망. 모리는 인류가 지닌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라잡고 있던 공동체적 감성을 자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 공포! 연민! 이 모든 것! 아니면 악마적 기질. 모리는 섬뜩한 죽음을 나타내어야 했다.

 

 

공포와 연민으로 얼룩진 죽음을, 그런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0.01초라는 찰나 같은 시간을 통하여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스스로 경험한다. 1995년 1월 어느 날 나에게 자리 잡은 그 죽음처럼 말이다.

 

 

사마디 앙트가 ‘죽음’을 만난 공포와 섬뜩함에서 온 몸으로 뿜어내는 그의 강렬한 죽음을  깨달음과 영감으로 바뀐다. 연주와 함께 죽음은 죽음을 연기하면서 사마디 앙트와 핸리를 통하여 죽음을 단순히 공포와 두려움, 섬뜩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영감을 부여해주는 ‘삶과 죽음’을 만들어가는 장면은 독자들에게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주는 모리에게 가슴과 목을 내어준다. 연주 목을 뜯어먹지 않을까? 이는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살점을 깨물어서 피가 흐를 때보다 더 섬뜩하고 위태로운 장면이었다. 모두는 말리고 싶어 했다. 연주 뒤에 선 모리는 이미 죽음 그 자체였고, 죽음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죽음과 입맞춤, 슬픔이 밀려오는 상황 연출. 사실 죽음은 삶을 알게 한다. 죽음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 인생은 연기라고 했던가.

 

 

핸리 교수는 말한다. ‘삶과 죽음’을 다 만든 후에

 

 

“죽음이 없다면 누가 삶을 극진히 사랑하고, 누가 연인을 아끼며, 누가 그토록 애써 땀을흘리며 누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밤을 지새우며, 누가 그토록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누가 그토록 세월을 아쉬워하고 누가 그토록 실패를 두려워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이 독이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은 삶에서 도망치려는 길목뿐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겐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죽음을 무시하거나 잊어서도 안 되며 죽음을 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아흔아홉 살을 사신 처 할머니가 한 줌 재가 되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문득 든 생각은 ‘허무’였다. 정말 한 줌 재였다. 그 재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아웅 거리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산다. 하지만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삶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우리에게 죽음, 곧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자신을 반추하게 한다. 1995년 1월 수원 아주대학 앞에서 나에게 들려왔던 “이 새끼야!” 역시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진지한 삶을 살아야 함을 경고한 소리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한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다. 죽음은 섞은 냄새가 아니다. 죽음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삶의 가르침이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삶 되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인임을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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