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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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좋은 의미 일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명예라는 인간 탐욕의 한 방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옛 사람들 중이 백성의 피를 빨아 먹었던 자들이 임지를 떠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비(碑)'를 세웠던 일들을 있었다. 백성을 착취한 자들이 이름까지 착취하는 탐욕이 나은 결과다.

 

좋은 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을 탓할 필요가 없지만 좋은 책을 내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 아무개'다. 그가 쓴 <이 아무개의 장자산책>(삼인 펴냄)을 손에 드는 순간 멈칫한다. '이 아무개?' 아무개라는 이름이 있나 의문이 들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 아무개는 목사, 동화 작가, 번역가이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들과 따끔하고도 넉넉한 말씀으로 많은 이들을 품어주는 이현주 목사임을 알게 된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1996년에 나온 <장자 산책>을 새로 다듬고 보완한 개정판이다. <장자>는 장주의 저술로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인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장자 사상의 정수이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내편>을 다루고 있다. 

 

사실 <장자> <도덕경> <사서오경>을 접할 때마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 2500여 년 전 중국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남긴 글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할 것 같은 <장자>를 읽는 것은 시간이 낭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젖은 이들에게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연이 바람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것은 그 줄이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줄이 풀어지거나 끊어지면 연은 곧장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장자의 생각이 수천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그 뿌리가 대지에 든든히 박혀 있기 때문이요, 근본을 붙잡은 그의 생각을 울가 잃은다면 21세기 눈부신 컴퓨터 문명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10쪽)

 

사실 <사서삼경>과는 달리 노자와 장자는 1명이 읽었다면 얼굴이 하나이고, 100명이면 100개, 100만명이면 100만개의 얼굴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기서 <장자>라는 텍스트가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신의 삶의 정황에서 치열하게 벼려진 거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실용주의가 나은 병폐는 심각하다. 이익만 되면 무조건 좋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존중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자본이 낳은 탐욕에 팔아버렸다. 이럴 때 2500여 년 전 <장자>를 통하여 오늘 우리 자신들이 빠져 버린 탐욕과 존엄성 훼손을 극복하는 일이 필요한 시대임을 분명하다.

 

이아무개 목사는 <장자>를 통하여 기독교와 불교 등을 오고간다. 장자가 어떻게 세상의 종교와 사상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장자와 기독교, 불교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텍스트에서는 서로가 다른 진리가 아니라 소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나'라고 하는 물건 하나 없애버리면 너 있는 자리가 곧 새 하늘 새 땅이요 네가 곧 곤이요 붕이요 남명이요 북명이요 9만 리 창공이요 회오리바람이라는 얘기다."(17쪽)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곤과 붕은 부처, 남명과 북명은 장자다. 이아무개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나’라는 관념에 예속된 사람과 그것을 벗어난 사람의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우리는 공(功) 다툼 때문에, 자기 이름 내기에 바쁘다. 이런 때에 '나'를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질 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길이다. 이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장자와 예수, 석가뿐만 아니라 노자, 공자, 간디, 아퀴나스, 소크라테스를 서로 불러모아 대화한다.

 

<공자> <맹자> <논어> <대학> <중용> <금강경> <산해경>, 조선의 선시, 수사(修士)의 글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진리와 인간 자신, 자연을 알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 놓았던 텍스트를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뚫고 나아가려 했는지, 무엇이 같고, 다른 지를 <장자>를 통하여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대는 죽은 시대다. 자연을 이해하지 않는 시대는 죽은 시대. 실용을 통한 이익 창출이 지배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말하고, 학문을 말하고, 문학을 말하는 철학, 어문학, 인문학, 기초학문은 이미 대학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이웃이 강도를 만나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연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이익의 도구인 이용가치로 평가하면서 결국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파멸로 가고 있다고 이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 아래 힘을 통하여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음을 말한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파멸을 향한 지구의 운명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서 '힘'만을 볼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보아야 한다. 예술과 종교가 새로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르고 켜서 침대로 만들 재목으로만 볼 게 아니라 더불어 노닐며 생사를 함께 할 '이웃'으로, '어미'로 보아야 한다."(51쪽)

 

자신을 장사 지내는 것, 버림, 완전히 여읜 상태를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 에크하르트(M. Eckhart, 1260~1328)는 '무심'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어디에도 연루되어 있지 않음'으로 '초탈'이라고 이 아무개 목사는 말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초탈이야 말로 사랑, 겸손, 자비보다 고귀한 최선, 최상의 덕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최상의 덕이지만 가지는 것에 매어 달리니 사랑과 겸손, 자비는 찾아 볼 수 없다.

 

초나라 때 미치광이 접여(接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시들어가는 덕을 어찌하겠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돌이킬 수 없도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이 그것을 우리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자기 목숨 살아갈 따름이니 시방은 겨우 형벌이나 면하는 게 고작인 세상.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땅에 금 긋고 그 안에서 허둥대는 짓거리.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잘리우고 옻나무는 쓸 데가 있어서 베어지네. 사람이 저마다 쓸로 있음의 쓸모는 알면서 쓸모없음의 쓸모는 모르는구가."(200쪽)

 

모든 것이 썩어 무너진 세상이라는 말이다. 입신양명과 출세, 탐욕만을 위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자연을 버리고, 생명을 버리는 세상을 향한 장자의 일침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장자 사상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이름이 나면 높아지고, 높아지만 탐욕이 생기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렇다. 광우병을 보라, 대운하를 보라. 영어몰입교육을 보라. 파멸에 이르는 길이지만 그것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책 읽는 것조차 대학입시와 연관시키는 우리 시대에 <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은 분명 돈 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실용과 탐욕에 찌든 우리가 <장자>를 통하여 무심과 비움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땅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과 함께 만물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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