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문명'은 과연 인간에게 희망인가? 문명은 과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가? 문명사회는 과연 미개사회보다 선(善)인가? 우리 시대는 '그렇다'고 말한다. 문명사회는 천하기에 선하기에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가치, 삶, 희망이라고. 그리하여 오늘도 문명사회를 만들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거짓된 진실>은 '문명' 중심에는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가 숨겨져 있다고 선언한다. 문명 속에 숨어 있는 증오의 문화를 깨는 것만이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단언한다.

 

문명사회 속에 어떤 증오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기에 데릭 젠슨은 <거짓된 진실>을 통하여 문명을 깨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했을까?

 

1918년 미국 조지아 주 발도스타에서 흑인 열한 명을 무참히 살해한 백인들. 살해당한 흑인 남편을 둔 아내가 복수를 맹세하자 나무에 매달아 난도질하고, 불에 태웠고, 배를 갈라 아이까지 발로 머리를 짓이겨 죽였다. 하지만 그것이 수백 발을 그에게 발포했다.

 

90년 전에 일어난 오래된 일이라 인종차별이 사라진 우리 시대는 이런 잔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애써 변명하려는 순간 데릭 젠슨은 칼날을 들이댄다. 2001년 남미 콜롬비아 알토나야에서 ‘암살대’라는 이름으로 부활절 주말에 40명을 학살했다. 한 여성을 데릭 젠슨은 주목했다. 암살대는 그 여성을 전기톱으로 손을 자르고, 배와 목을 갈랐다.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붙이는 성냥이다.” (본문 11쪽)

 

데렉 젠슨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에 인류 문명이 인종과 성, 자본과 생산을 통하여 얼마나 참혹한 증오를 남겼는지 낱낱이 고발한다. 37-40쪽에서 사람들이 경찰 지시를 따르다가 죽음 당한 사실을 말한다. 이 증오는 과거에 일어난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인 사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 시 길거링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 갈랜드 카터, 17세, 1996년 1월 8일, 등 뒤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다. 대릴 하워턴, 1994년 9월 8일, 다른 사람의 집 지키는 개한테 먹이를 주다가 총알 여섯발을 맞았다. 티샤 밀러, 1998년 12월 28일, 고장 난 차에서 자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깨는 순간 총알 열두발을 맞았다. 1996년 6월 13일, 자신의 차에 앉아서 손을 허공에 올린 상태에서 총알 열여덟 발을 맞다(첫발을 쏜 다음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검둥이 넌 이제 죽었어.).”

 

주목할 점은 이 증오 문화를 통하여 잔혹한 희생을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흑인과 더불어 소수자, 유색인종,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루에 4~5명이 경찰관들에게 희생당하고 있다. 인종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여성 인권이 보장된 미국 사회도 '여성'에게는 ‘보이지 않는 증오’라는 성폭력을 통하여 희생당하고 있다. 강간을 통하여 경험한 여성들은 인간성을 파괴당한다.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성폭력은 증오범죄인데 남성 주류 사회는 이를 성범죄로 규정할 뿐이다. FBI가 데릭 젠슨에게 밝힌 사실은 이렇다. “강간은 증오범죄가 아니에요.”

 

어떤 여성들은 성폭력과 노동력 착취를 통하여 이중으로 인간성 파괴를 겪는다. '허위계약'을 통하여 '강간'을 통하여 문명은 여성을 하나의 도구로 삼을 뿐이다. 이는 미국 사회 여성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증오'보다 더 참혹한, 분명한, 증오범죄다. 1999년 프놈펜에서 '디나 찬'이라는 여성이 '제1회 젠더와 발전 전국 대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고 우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뼈, 피부가 있고, 심장이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이의 누이이고 딸이고 손녀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자입니다. 존중과 품위로써 대우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권리를 우리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인신매매를 당했고,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한 후 억지로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어 남자들이, 그래요, 남자들이 쾌락을 느끼게 해야 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수치심, 고통, 모멸감뿐이었습니다.” (본문 307쪽)

 

경제에 약자인 여성, 아니 백인이 아닌 그들은 이중고통을 통하여 인간성 파괴와 모멸감을 겪는다. 이 중심에는 자본이 있다. 자본에게  다이아몬드를 빼앗긴 남아프리카 원주민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긴 인디언들이 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땅과 다이아몬드 권리를 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리는 원주민이 아니라 정복자들에게 있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잔혹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자본은 여성을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인 증오범죄다. 개인과 가족, 사회까지 모든 빼앗아가 버리는 범죄다. 한마디로 하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과 도구에 불과했다.

 

"돈이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돈을 가진 자들이 더 힘이 세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결국 돈이 무엇인가? 종이다. 금속이다. 먹을 수도 없다. 종이는 열을 가하면 탄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갖다 붙인 의미를 제외하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본문 312쪽)

 

자본은 인간을 도구화, 상품화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일들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과거일 만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인 오늘에 더 가혹하게 일어난다. "민주주의는 금권정치, 즉 부자들의 통치에 기초한다"고 데릭 젠슨은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도 '노예' 전통을 이어갈 뿐이다. 과거보다 더 교묘하고, 잔인하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동자, 소비자는 자본이 목적하는 생산과 이윤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니 지구도 마찬가지다. 생산을 위하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 생산이 공동체보다 더 중요하고, 건강과 풍요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까지 생산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다.

 

기억하고 있는가? 1984년 인도 보팔 시에서 일어났던 미국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살충제 공장에서 유독물질이 배출돼 1만 명이 희생당하고 12만 명이 다친 사건을. 이 회사는 1930년대 웨스트버지니아 혹스네스트 터널을 뚫을 때 수백만 명이 죽었고, 공사 중 발생된 규산 분진으로 발생한 규폐증으로 죽은 이들이 764명이라는 사실을. 규폐증으로 죽은 이들이 흑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한 도급업자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이 검둥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다."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취급한 이들을 이토록 자본은 진짜 사람을 죽였다.

 

그 자본에는 유니언 카바이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초국적 기업 쉘은 아프리카에서 토착민 문화를 파괴하였고, 땅을 빼앗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목매단 제노사이드(Genocide)를 저질렀다. 카길, 엑손, 몬산토, 와이어하우저, 제너럴 일렉트릭, 타이슨, 맥삼 같은 대기업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이윤을 추구하면서 저지르는 잔학 행위는 나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데릭 젠슨은 말한다.

 

전쟁은 경제와 생산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다. 전쟁은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길이다. 전쟁을 통하여 자본은 그들 자신보다 더 귀중한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한다. 페르디난드 런드버그가 한 말을 데릭 젠슨은 이렇게 인용했다.

 

"전쟁 상황에서 비수처럼 핵심을 찌르는 물음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가 아니다. ……전쟁에서 누가 이익을 보느냐, 누구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느냐, 누가 이익을 지키느냐가 관건이다."(본문 367쪽)

 

그 돈이 과연 누구 주머니에 들어갈까? 자본, 부자들임을 잘 알고 있다. 부자와 자본을 배물리는 일을 위하여 국가는 언제나 '민주주의' '대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전쟁을 거짓된 진실로 만들어버린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만 일으킨 잔인한, 잔혹한 범죄가 아니다. 과거에도 존재했다. 히틀러는 잔인한, 잔혹한 증오를 만든 문명이 보여준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데릭 젠슨에 말은 가슴을 찌른다. "나치는 인간을 죽이고 있었고 지금 우리는 단지 지구를 죽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 루마니아인 등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우리가 야기하는 죽음은 모두 우리 경제 체제의 우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생산, 이익을 위하여 사람이 사람이 아닌 도구로 취급받으면서 죽었다. 인종 우월주의와 지배문화가 남긴 이 참혹한 증오범죄를 이제 우리는 끝내야 한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피부색이 다른 인종을 차별화하는 잔인한 범죄, 경제와 생산을 위한 인간의 물질화를 끝내야 한다.

 

"지배문화를 멈추게 못하면, 그것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죽일 것이다. 전부 죽일 수 없다면 죽일 수 있는 것은 다 죽일 것이다."(본문315쪽)

 

생명보다 생산을 높이는 것, 인간, 북극곰, 강, 산이라는 생명체보다 경제와 자본이익을 높이 평가하는, 개별 문화와 역사, 민족과 인종별로 다른 문명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흑인 남자, 중국인,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중국놈, 검둥이, 일본놈이라고 부르는, 여성 자체보다 여체를 담은 사진 자체를 더 중히 여기는 이 죽임과 증오만이 남아 있는 문화, 문명을 끝내야 한다.

 

그 방법은 증오문화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증오문화가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현실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정확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문제 해결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생산보다 생명을 위에 두고, 생명을 생산의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멈추게 하고, 생산을 위한 정복을 그만두는 것이며, 지구를 파괴에서 해방시키고, 마지막을 문명 제거라고 데릭 존슨은 말한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증오는 수억 년간의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들 각자를 키운, 우리의 틀을 만든 조건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 주입된 의문시된 적 없는 가정들의 결과다. 증오를 멈추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틀을 만드는 조건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맞다. 그게 바로 내 해법이다. 우리는 문명을 제거해야 한다." (본문 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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