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카미 겐이치(川上健一) 지음 ★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8년5월1일 초판1쇄 발행
2001년 《책의 잡지》 선정 올해의 책 1위
제17회 쓰보다 조지 문학상 수상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청춘'은 음악, 영화, 문학을 가리지 않고 등장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재료다.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하게 되지만, 억만금을 준대도 결코 두 번은 경험할 수 없는 '청춘'은 누구에게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옥 같은 시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즐거웠든 괴로웠든 한번 지나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절이기에 누구에게나 이 '청춘'의 기억은 아련하다. 가와카미 겐이치의 소설 《날개는 언제까지나》는 이 아련한 '청춘'의 기억을 돌아보는 소설이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부모를 대하는 것에도 스쳐 지날 때마다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이성을 대하는 것에도 서툴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오락가락하고 어른과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끓어오르지만 정작 용기는 쥐꼬리만큼 밖에 없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소년의 이야기가 작가의 고향인 아오모리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자신의 '청춘'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가슴 벅찬 추억의 재발견이 될 것이고 반대로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의 거짓 망상에 불과한 얘기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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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야구부에서 투수를 했던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 가와카미 겐이치는 그런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려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를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하며 청춘소설과 스포츠소설 분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어느 날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에 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에도 이상이 발견되어 결국 펜을 꺾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요양 차 내려가게 됐다고 한다. 그곳에서 10여년의 세월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완벽한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한 끝에 잃어버렸던 건강과 불타는 창작의욕을 동시에 되찾고 부활의 신호탄이 되는 이 소설 《날개는 언제까지나》를 쓰게 됐다고 하니 작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정말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소설은 아오모리현 도와다 시립 미나미 중학교에 다니는 2학년생 야구부원 가미야마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와 함께 만년후보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와지마, 리키이시라는 단짝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 뛰어난 야구실력과 훤칠한 외모를 가진 야구부의 실질적인 리더 히가이시, 만능 스포츠맨이지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 가사하라 등의 주변 인물들이 등장해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청춘소설이라면 빠질 수 없는 풋풋한 첫사랑의 대상으로 사이토 다에라는 여학생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성격이 일반적인 청춘소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왕따에 가까운 인물이다.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긴 머리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는 존재감 제로의 이 소녀는 주인공 가미야마가 미국방송을 통해서 라디오에서 듣게 된 비틀즈의 「Please Please Me」를 반 친구들 앞에서 엉터리 영어로 열창하는 순간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면서부터 가미야마에게 있어서는 신경 쓰이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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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생인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청춘의 기억이란 곧 비틀즈의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국적을 불문하고 그들의 음악이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는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미야마와 사이토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 역시 1963년에 발표된 비틀즈의 기념비적인 첫 앨범 『Please Please Me』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타이틀곡 「Please Please Me」이다. 비틀즈는 가미야마와 사이토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선생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학교 안에서 댄스파티를 여는 야구부원들에게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라 전체에서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에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불순한 음악으로 취급받던 비틀즈의 노래였지만, 그 당시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간접적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획기적인 음악으로 받아 들여졌었다. 《날개는 언제까지나》는 아버지와 선생님에 대한 반항, 섹스와 이성에 대한 호기심, 달콤한 첫사랑의 추억과 극적인 첫 키스, 친구간의 우정과 갈등 등의 요소가 골고루 녹아 있는 전형적인 청춘소설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소설로 이런 점 때문에 자칫 진부해 보일 소지도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글 솜씨가 워낙 탁월한 탓에 잠시의 지루함도 느낄 새 없이 단번에 읽어나갈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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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중학생이던 학창시절이 까마득히 먼 옛날 얘기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됐지만, 그 시절 친구들과 비밀스럽게 공유했던 추억들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조용히 몸부림 치고 있다. 치기어린 그 시절 어른이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고 내가 원하는 대로 멋진 인생을 살아갈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지만, 현실의 고단함은 내게 어린 시절과 같은 꿈을 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내가 친구들과 나눴던 미래의 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들은 설령 그것이 유치한 어린애의 세상물정 모르는 허황된 헛소리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도 피곤하고 힘들 때마다 가끔씩 머릿속에서 추억으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기운을 전해주곤 한다. 옛날 뭉쳐 다니던 일당들과 함께 힘들게 구한 턴테이블 위에 아하나 왬의 음반을 올려놓고 오랜만에 옛 추억에 잠겨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던 몇 년 전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의 청춘은 별다른 설명도 큰 의미도 필요 없이 그 옛날 우리가 그렇게 열광했던 가수의 노래 한 곡만으로도 온전히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유는 가슴에 품었던 거창했던 꿈과 희망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와 같은 위치에 서서 유치찬란한 내 꿈을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양 들어주고 내 아픔을 어설프게 함께 나누려 했던 친구라는 존재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내 청춘 시절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2008/09/24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