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지음 ★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7월27일 초판1쇄 발행


2001년 제55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 수상

2002년 예술선장(芸術選奨) 문부과학대신상 문학부문 수상


미야베 미유키는 자타공인 현재 일본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여성 추리소설작가다. 그리고 그녀를 이처럼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모방범》이다. 1995년 11월부터 종합주간지 『주간포스트』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일본 내에서 2001년에 상ㆍ하권으로 이루어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2005년에 총 5권으로 구성된 문고본으로 다시 간행되어 나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도에 총3권으로 이루어진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는데, 각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익히 알려진 원작의 명성 때문인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내 그 미련할 정도로 엄청난 페이지수의 압박에 지례 겁을 집어먹고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도 못하다가 2007년 연말에서야 겨우 용기를 내서 읽게 되었다. Copy cat이라는 영어 단어로도 익숙한 모방범이라는 말은 다들 알다시피 어떤 범죄 사건을 그대로 흉내 내서 따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을 《모방범》으로 지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처음 이 책을 대할 때는 이 제목 때문에 과거 한 사건에서 사용된 방식을 차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의 이야기일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이 소설은 그런 것과는 별다른 상관없는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관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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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17세의 소년 쓰카다 신이치는 언제나처럼 애견 로키를 데리고 집 근처에 있는 오가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날따라 공원 쓰레기통을 향해서 무섭게 짖기 시작하는 로키. 그리고 곧 그 쓰레기통 안에서 잘린 여자의 손과 핸드백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이 밖에서 무심코 친구에게 자랑한 돈 얘기 때문에 일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끔찍한 과거를 가진 소년 신이치, 언론은 그런 신이치가 이번 사건의 첫 번째 발견자라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잘린 손과 함께 발견된 핸드백의 주인으로 밝혀진 후루카와 마리코의 외할아버지 아리마 요시오에게는 사건 직후 음성을 변조한 정체 모를 괴한으로부터 손녀의 생사를 두고 장난을 치는 전화가 걸려온다. 여기에 프리랜서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가 사건에 개입하면서부터 범인의 괴이한 행동은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이 사건을 다루는 방송국에 직접 자신의 범죄를 자랑하는 전화를 걸어와 방송을 보던 전 국민을 경악과 분노에 빠뜨린다. 이 소설 《모방범》의 범인들(범인은 두 명이다 *스포일러 아님)은 책의 마지막이 아닌 중간부분에서 모두 밝혀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 범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 중 한 명이 어떻게 자신이 벌인 일의 뒷수습을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복잡한 트릭과 모호한 알리바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명쾌한 추리를 통해서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밝혀내는 데에서 흥분과 재미를 주는 타입의 추리소설이 아니라 범인의 심리와 정신 상태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그와 얽혀있는 사회문제와 인간의 부조리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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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는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한 1993년 작 《화차》와 나오키상을 수상한 1999년 작 《이유》를 통해서 일본문학계의 권위 있는 상들을 싹쓸이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가로 인정받게 됐고, 이후 발표한 이 소설 《모방범》으로 명실상부한 최고의 추리작가로 등극하였다. 그녀의 소설은 대체로 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많은데 이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녀의 소설은 길이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방대한 분량의 이 작품 《모방범》도 너무나도 많은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의 행동이나 심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서 중간쯤에는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깐의 지루함만 이겨낸다면 곧 이어서 범인들의 사악한 범행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며 책장을 넘기는 손에 한층 속도감을 더해 줄 것이다.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찬사를 듣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그래서 자칫 사건과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목일지라도 대충 넘어갈 수가 없다. 한 인물의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나중에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마 요시오는 손녀의 유해를 확인한 뒤 자신에게 걸려온 범인들의 전화를 받고 '힘없는 여자만 골라서 죽이는 비겁한 놈들'이라는 말로 자의식 가득한 그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죄 없는 남자희생자만 한 사람 더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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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은 2002년 일본 최고의 그룹 「스맙」의 리더인 나카이 마사히로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되었다. 원작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영화도 한번 찾아서 보게 됐는데, 영화에 대한 느낌은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폭 삭제되거나 역할이 미미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고 사건 진행은 엄청나게 빠른데 반해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거의 여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는 키무라 요시노라는 특급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조연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미미한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고 덩달아서 솔직하고 단순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는 그녀의 남편 마에하타 쇼지도 별다른 역할도 없이 잠깐 얼굴만 내밀다가 급기야는 원작과는 전혀 다르게 범인들의 손에 살해당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황당함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비할 수가 없다. 나카이 마사히로가 연기하는 범인 아미카와 코이치가 생방송 도중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자 뜬금없이 자신의 몸에 장치한 폭탄을 터뜨리며 자폭하는 장면은 어설픈 CG와 함께 보는 이에게 어이없는 헛웃음만을 유발시킨다. 게다가 손녀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시종일관 놀림감으로 삼고 괴롭히던 아리마 요시오에게 아미카와가 자신과 같은 괴물이 아닌 심성 착한 인간으로 키워달라며 자신의 갓난쟁이 아들을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는 엔딩 장면은 원작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까지 찾아본 내 자신을 원망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어설프게 영화화했다가는 오히려 원작의 명성을 깎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2008/09/23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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