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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션 2.0 - 어느 소심한 구글 직원이 이끈 혁명이야기
와엘 고님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처음에 표지와 제목 '레볼루션 2.0'만 보고는,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한' 또 하나의 그저그런 웹 2.0 활용에 대한 제안서 정도라는 생각에 맥이 쭉 빠졌다. 아,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책을 한 두 장 넘겨, 작가의 말을 지나고, 목차를 지나면서 평온하고 조용한 주위와 달리 내 마음에 치던 소용돌이같은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만나야 했으나, 내가 굳이 찾아나서지 않았던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접했다는 느낌이 쌔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우리는 '나 하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뭐,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기존 미디어의 세상에서 개인이 권력에 속박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웹 2.0 세상에서 우리는 참여와 공유라는 새로운 특징을 만나게 된다. 권력이 필요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승자다. 와엘 고님이 해낸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컨텐츠를 만드는 일.
"우리는 모두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바라고 이런 짓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이 범죄자들과 싸워야 합니다.(p.219)"
이 책이 결과를 알 수 없는 논픽션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쉽사리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 때 뉴스에서 본 대로, 트위터에서 본 대로, 이집트의 독재 정권은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며, 이 혁명의 물결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바람이 되어 불어칠 것이라는 결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 지리한 싸움을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꼽는 이집트에서 혁명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가상 세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뭔들 못하겠는가. 그러나 와엘 고님과 이집트의 청년들은 이를 넘어서서 실제로 광장에 모이고 실제로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인터넷은 이들을 연결하는 수단이었을 뿐, 이들의 행동 무대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낼 수 있는' 현실의 광장이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와엘 고님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인 '구글'에 다니는 '구글러'였고, 컴퓨터와 인터넷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결국 잡혀서 11일동안 눈을 가리고 감금되는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 그가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프록시 서버'라는 자신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전례없는 대규모의 시위가 열릴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참여형 플랫폼의 등장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과연 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사실은 아직 이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해야할 지에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에 1을 더하면 2가 된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우리가 기술이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참여형 플랫폼을 만드는 방법은 우리가 기술이라고 일컫는다. 개방형 플랫폼을 만드는 것과 폐쇄형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이러한 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나처럼 고작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이나 올리든 혁명가(!)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끌어내리든 똑같은 기능을 똑같은 권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이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 전문가인 와엘 고님이 30년 동안 독재를 통해 이집트를 마음대로 주물렀던 무바라크 대통령과 똑같은 권한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미디어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징이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독재자를 무조건적으로 칭송하고 두둔하는 관영 미디어에 결핍된 가치를 개방형 플랫폼인 페이스북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 이야기가 단순히 이집트의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견문을 넓히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께 부탁해 신문을 구독했었다. 그리고 몇달 째, 언론인이 되고 싶던 나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대통령에 비판적인 한 보수 언론이 실은 기사 제목과 사설 내용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보수 언론들의 공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던 듯 하다. 당시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혹은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그래 이 모든 게 대통령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에 쉽사리 나를 맡겨버렸던 것 같다. 여느 날과 같이 대통령에 비판적인 어조의 신문을 읽다가 관심이 있는 주제라 꼼꼼히 읽다보니, 눈을 잡는 기사 제목은 분명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써 있는데, 기사 내용은 대통령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충격적이었다. 한국의 대표 언론 중 하나라고 하는 이 신문사에서 인터넷 찌라시에서나 하는 '낚시성 기사'를 인터넷도 아니고 지면 기사에 싣다니. 그 이후로 그 신문을 끊었고, 신문에 대한 나의 신뢰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지금도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단순히 비판적인 시선과 어조로 사실을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부 사실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하는 방송사가 버젓이 생겨났고, 이 방송사는 이에 대항하는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배치시키기까지 했다. 관영 아닌 관영이 되어 버린 기존 미디어를 믿느니 나는 아직은 불완전하고 틀린 정보도 많지만 차라리 정보를 삭제하지는 않는 뉴미디어를 믿겠다. 아무나 자기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니 헛소리도 많고 거짓말도 많지만 적어도 누군가 진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신뢰받지는 않는, 그런 것을 서로 기대하지도 않는, 뉴미디어의 힘을 믿겠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통해 '정의의 세상'을 만들어가겠다.
물론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이집트의 혁명이 진행중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용기는 우리 마음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보다 넓은 인터넷 세계의 연대를 통해 현실에서 행동으로 발현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