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하다보면, 윤리상대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그들은 모든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고 무화시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대단히 합리적이고 뛰어난 이론으로 무장한것처럼 행동한다. ˝그나라 문화가 그런걸 어쩌겠어,다양성을 존중해야지.˝(난 정말 똑똑해. 하하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긍정한다면 자기자신의 문화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할수 없게 된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소수에 대한 억압,여성인권문제 등이 문화상대주의자의 언어오용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한계설정은 자신이 속한 문화내에서도 기존에 지배적인 내용에 어떠한 비판도 할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남의 나라 관례와 문화가 그토록 권위있고 정당하다면,동시에 자국의 지배적인 문화는 널리 받아들여야 함이 마땅하다. 다수의 인습적 문화가 항상 옳고 지켜져야한다는 논리는 어디서나오는 것일까? 다수라고 하면,어느정도의 수를 충족 시킬때 쓸수 있는 말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할수 없는 문화상대주의는 옳고 그름을 제기하는 주장을 집어삼켜버린다.
복잡한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문화라는 것도 정의하기가 힘들뿐더러,문화적 수용에 의존한 도덕이 타당성을 갖춘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관례적 윤리상대주의자는 개인의 상이한 가치를 강조하는 주관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윤리적 관례주의는 규범적 토대를 제공해줄만 준거집단의 범위를 고정할 논리를 실종했다. 주관주의로의 귀결을 막을 수 없다.
내가 속한 종교(집단)에서는 성매매,강간,동성애증오 등에 찬성하는 문화적가치를 향유하고 있다.나는 이집단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집단이 국민의 50%가 넘는 사람들이 믿는 다면,받아들여야 하는걸까?
문화이기때문에 정당성을 당연 확보하는게 아니라,그문화를 정당화하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면 한사회의 문화에 권위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논쟁이 아닌,보편적인지,상대적인지 같은 물음은 불필요할뿐이다.
1.왜 우리는 한사회의 문화에 그토록 커다란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어느 문화가 그문화를 정당화하는 무언가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나는 문화가 갖는 권위를 인정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우리는 문화를 평가할수 있는것,문화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p.69
2.나는 우리가 관례주의로부터 주관주의로의 이동을 멈추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된 도덕원리의 타당성이 갖는 본질적인 힘은 바로 그것이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는데 있다. 관례주의자는 그것이 선택이라고 주장하지만, 나자신의 선택이 (나에게) 더 나을 경우에 나는 왜 집단의 `어리석은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겠는가?p.62
3.윤리적상대주의를 받아들이면 자기자신의 문화밖에 있는 그어떤 사람도 비판할수 없다. 히틀러의 대량학살 행위가 문화적으로 수용되는한,그것은 마더테레사의 행위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관례적 상대주의가 받아들여진다면, 인종차별주의,평판이 나쁜소수에 대한 학살,빈민억압,노예제도,전쟁 그자체를 옹호하는것 마저도 그것에 반대하는것과 똑같이 도덕적이다.p53
4.관례적 상대주의에 따르면,지배적인 문화는 언제나 지금 널리받아들여지고 있는 규범이다.기존 규범을 비판하면서 이제 막 타탕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규범은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못하게된다. 그러므로 도덕적 개혁가는 항상 그르게되고 진리는 항상 군중편에 있게된다.p.60
도덕은 그타당성을 문화적 수용에 의존한다는 생각이지닌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문화 또는 사회의 개념을 정의하기가 지독하게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경계가 불분명하여 그개념이 모호한 것으로 보이는 우리와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특히 그러하다. 한개인은 상이한 가치를 강조하고 원리의 우선순위가 서로 다른 이문화사회에 동시에 속할수 있다.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