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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 창비시선 특별시선집
신경림 외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시선이 500번을 맞아 발간한 특별시선집인데
시인들이 직접 즐겨 읽는 시편들을 모아 출간했네요.
가격도 온라인 서점 기준 6300원이라 굿굿!
그중 김수영, 황유원, 강성은 시인의 시에 눈길이^^
특히 강성은 시인의 시는 결은 다르지만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처음 읽었을 때처럼 계속 곱씹게 하는 맛이 있는 시네요.
시인의 다른 시도 읽어보고 싶다는^^
___나는 한 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 <책> 중에서..
손이 시려서 너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이 펄펄 날리고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 캄캄한 곳에 너의 손이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날 우리는 걸어서 어디로 갔나
두근거리는 손 때문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흰 눈이 내리는데 햇빛이 환한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는데
심장이 된 손에 이끌려
우리는 쉬지 않고 걸어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데
우리는 잡은 두 손을 놓은 적이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불안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 다니고
그림자로 존재하는 식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 두 손은 검게 썩어 들어갔다
어째서 너의 손은 이토록 비릿하고 아름다운가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검은 피가 흘러나와 우리 발목을 적실 때에도
우리는 이토록 생생한 봄을 상상했다
언젠가 우리는 각자 다른 계절을 따라 사라졌지만
호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폐허의 공터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를 깊숙이 찌른 두 손이
펄펄 날리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다
-- 강성은 <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