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 - 풀꽃선생의 남중 이야기 벗 교육문고
안정선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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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이란다. 하여, 풀꽃을 좋아하든지 풀꽃 같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교사이겠거니 했다가 책 뒤표지에 실린 다음 글을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꽃얼굴이 작아서 예쁜 줄 모르는 풀꽃들

고개 숙여 들여다보면 다 달라요, 다 예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 보아주는, 저는 풀꽃선생입니다. 


‘꽃’이 작아서가 아니라 ‘꽃얼굴’이 작아서라니! 나도 풀꽃을 무척 좋아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반 무릎자세로 앉아 고 작고 앙증한 꽃을 가만 들여다본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하지만 나는 꽃을 보았지 꽃얼굴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풀꽃선생처럼 꽃에서 꽃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풀꽃선생 안정선(서울 경희중학교)은 23년째 남자 중학교에서만 근무하고 있는 국어교사다. 안 교사의 눈에 비친 요즘 중학생들의 모습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학교의 현실에 투영된 아이들의 모습이 그 두 가지를 다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안교사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다는 데서 더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우리 아이들, 수업시간에 정말 ‘졸라’ 잔다. 난 그걸 또 열심히 깨우고 다닌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선배 교사는 자는 아이들 손을 꼬옥 잡아준다고 한다. 그러면 미안해서 살며시 깨는 아이도 있지만 선생님 손을 꼭 잡고 편히 자는 아이도 있단다. 나도 처음에는 손을 꼬옥 잡아 주지만 이내 등짝을 후려치고 옆구리를 찌르며, “애들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하는 엄마 코스프레까지 한다.


깨우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스스 일어나던 아이들도 수업 만족도 조사를 할 땐 “깨워주셔서 감사하다.”, “우릴 깨우는 걸 보면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 같다.” 이런 말을 쓰는 걸 보면 자기들도 그냥 자게 두는 걸 원한 건 아닌 것 같다. (215쪽)’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물론 안 교사도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졸라’ 자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 답을 아프게 재확인하는 쪽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큰 틀로만 사고하다보면 놓치기 쉬운 또 다른 진실의 얼굴을 발견해내는 것이 풀꽃선생 안정선의 능력이자 미덕이다. 뭔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에 걸맞은 근거들을 모아놓은 듯한 정형화된 글을 읽을 때의 식상함이 안 교사의 글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풀꽃선생의 제자 중에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영화 공부를 하는 녀석이 있단다. 스승의 날 몰래 집을 찾아와 우편함에 선물과 편지를 넣어 두고 가기도 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을 연습장 한 권 가득 직접 손으로 베껴다 주기도 했던 꽤 감성적이고 순수한 아이였다는데, 안 교사의 기억에는 녀석의 해맑은 얼굴보다는 까만 머리꼭지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하긴 일년 내내 잠만 잤으니까 그럴밖에. 하지만 졸업 후에 청년이 되어 찾아온 제자가 중3 시절 수업시간에 배운 한 편의 시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안 교사는 놀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어려운 시를 자면서도 듣고 있었다니! 아마도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썼음직한 풀꽃선생의 자작시가 참 멋지다. 마치 아이들의 영혼으로 들어가서 쓴 듯하다. 

         

누군가 나를 깨울 때까지


내가 잠들었다고 해서 아주 세상을 등지려는 건 아니외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울 사람을 기다리고 있소.

언젠가 내가 스스로 깰 때까지든,

누군가 진짜로 내 잠을 깨울 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는 잠시 엎디어 있을 테요.

그렇다고 아주 잠들었다고 생각지 마오.

이렇게 납작 엎드려서도 세상을 다 보고 있소.

이렇게 딴 세상을 꿈꾸는 듯 보여도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있소.

우리는 주워듣고도 큰다오.

그러니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마오.

그러니 제발 우릴 버리지는 마오.


안 교사의 글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아니, 묵직하면서도 따뜻하다. 이 또한 학교 교육을 바라보는 안 교사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지만, 무거울 수도 있는 것을 조금은 덜 무겁게 느끼려는 긍정의 안간힘이 글의 행간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환하게 아픈 형용모순의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중에서 근무하는 안 교사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딸은 안 교사가 가르치던 학교아이들과 같은 학년인 적이 있었다. 중3 때였다. 딸아이의 심리검사 결과 ‘불안’이 높게 나왔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이맘 때 여자아이들은 많이들 그런다며 안심을 시키지만 잠깐 호전된듯하던 증세가 다시 3~4년째 지속되자 안 교사의 고민은 깊어진다. 


다행히도 딸의 불안심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해소가 된듯하다. 책에는 아예 그런 언급이 없다. 안 교사가 딸아이의 불안심리를 거론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안 교사는 성인인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도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심지어는 딸아이의 우울과 불안이 자신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도 모른다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뭇 어둡던 글의 분위기가 곧 반전된다.


'딸아이는 프라이팬 손잡이가 사람 쪽으로 놓여 있으면 와서 야단한다. 이러다 툭 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느냐고. 불안은 한편으로는 사고를 예방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오늘도 수업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수업준비를 한 번 더 한 덕분에 아이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맙다. 나의 불안!(243쪽)’


안 교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꿈이 교사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로 ‘시골학교 선생님’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그녀의 꿈을 부추긴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뼈아프게 경험한다. 그 일로 야학을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교사의 꿈마저 접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만, 풀꽃선생은 오히려 그 일로 교사로서 더욱 단련된다. 안 교사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생각도 이렇게 뒤바뀐다. 


‘안이하게 살면서 자기가 좋은 교사인양 착각하는 선배교사들을 많이 보아 왔다. 나 자신도 어느 새 그런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럴 일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책망의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에 감사할 일이다. 아무 데서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때 나는 가장 나태한 교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247쪽)’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소년에게 물들다〉와 2부〈이 죽일 놈의 사랑〉에는 유쾌하고 엉뚱한 소년들의 매력이 담뿍 담겨 있다. 답답한 학교 안에서도 쉴 새 없이 기발한 놀이를 만들어 내는 건강한 모습과 사춘기 소년들의 거칠고 미숙한 심리와 특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을 교사만이 아닌 사춘기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그만큼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자식 간에 서로 소통하는데 큰 보탬이 될만하다.

      

3부〈천진하고 무식한 아름다움이여>와 4부 <학교를 그리다>는 자신의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천진난만한 소년들과의 수업 이야기를 통해서 교사와 학교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한다. “샘은 우리가 무식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주실 거죠?” 하는 아이들의 순진한 표정에 풀꽃선생은 그 천진한 무식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한편, ‘교사는 어떻게 늙어 가는가?’ ‘그래도 학교는 버릴 수 없다.’ 등의 글에서 드러나는 풀꽃선생의 중견교사로서의 교육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뭉클하고 깊다. 책의 말미에 가서는 내내 담담하던 어조가 갑자기 뜨겁게 솟구치기도 한다.       


‘가끔 ‘왜 대안학교를 꿈꾸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산다’는 일리치의 오래된 담론을 새삼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나…… 학교에 한번 와 보라. 먼지투성이 좁은 책걸상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은 왜, 유학도 가지 않고 대안학교로 가지도 않고 홈스쿨링도 검정고시도 택하지 않고 저기 앉아 있는가. 학교가 죽어야 한다면 저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기 앉아 있는 아이들 중에는 ‘원수 같은’ 사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많다. 아니 어쩌면 엉덩이가 터지게 매를 맞을지라도, 소매가 반들거릴 만큼 새까맣게 때가 앉은 교복을 입고서라도 ‘학교에는’ 나오는 그들에게 학교는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다.(295쪽)’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풀꽃선생이 중학교가 아닌 고등학교(특히 인문고)에서 오래 근무했다면 이런 풋풋하고 온기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인 체험의 자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인문고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엇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3년차 풀꽃선생 안정선의 <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을 강권하는 이유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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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 윤지형의 교사탐구 2
윤지형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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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형의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교육공동체 벗)은 제목이 다소 상투적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상투적이듯이. 그런데도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을 말해서는 안 되는 저자(혹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긍정적 세계관 때문이리라. 하여, 나는 책머리에서 드러난 그의 절망이 다소 당혹스러웠다.

'학교의 변화는 가능할까? 10년 전, 20년 전이라면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변화 가능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고. 그러나 이제 내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이 되었다. (…) 바람직한 변화의 가능성이 희망이라면 그렇지 못한 변화 가능성은 절망이며 저주인 것이다. 나는 갈수록 절망이며 저주로서의 학교의 변화를 현실로 경험한다. 희망은 허상이고 절망만이 진실임을 시시각각 확인한다고 해야겠다. 어쩔 것인가. 이리 되고 말았다.(8쪽)'
     
다행히도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캄캄한 밤길이 내 앞으로 뻗어 있다. 대낮에도 캄캄한 길. 캄캄함. 이것만이 지금 내겐 가장 리얼리티이고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느낀다. 캄캄함 속에서 나는 겨우 안심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캄캄한 길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 하나를 발견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불빛은 홀로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길을 갈 수 있다. (…) 이 세상 어딘가에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안다.(12쪽)'

세상의 어둠은 그대로인데 어둠 속에서 그가 돌연 안색을 고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들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들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는 절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희망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다시 쓸 수밖에 없게 된 건 아닐까. 

이 책은 저자가 수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서 만난 '한 점의 불빛'과 '옹달샘'이 된 13명의 교사들의 삶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눈물겨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학교는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저자 윤지형의 르포 형식의 글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교사가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직접 쓴 '그 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주인공은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저자 이상석(부산 신도고) 선생님이다.

'어느 가을 문학 시간, 이상석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책걸상이 모두 뒤로 밀쳐진 교실 바닥에는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눈빛 맑은 여고생들은 그 낙엽 위에 삼삼오오 앉아 그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30대 중반의 청년(!) 교사였던 그는 저 예쁘기 그지없는 처녀 아이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너무도 고맙고 행복해서.(26쪽)' 

그 '사랑'과 '행복'이 크디컸던 만큼 해직 사태를 맞은 이상석과 처녀 아이들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음은 두말이 필요치 않다. 또한 쫓겨난 스승과 스승 잃은 제자들의 학교 밖에서의 '만남'까지 감시하고 방해하고 불온시하고 폭력까지 행사했던 타락한 언론, 교육청관료들, 한심한 몇몇 교사들 때문에 아이들이 겪은 슬픈 혼란과 오직 그로 인한 이상석의 아픔과 절망도…(27쪽)'

이 책의 장점은 그가 만난 교사들의 다양한 면면에 있다. 저자가 탁월한 필력으로 복원해 놓은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내면의 모습과 함께 우리 교육의 지형도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몇 편 제목만 열거해도 속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순결한 양아치들이 나는 좋다(조영선)'
물만골 처녀선생은 무엇으로 사는가(김정애)
학교는 혁신이 될 수 있을까?(이범희)
교실에서 행복하시나요?(박현숙)
'교사-교장' 그 오래된 경계를 넘다들다(고춘식)
'작고 아름다운 학교'를 위한 연가(조영옥)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나라' 교사였다.(한경숙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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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의 실험정신을 지지합니다. `교육불가능의 시대`를 선포한 깊은 속내에는 교육 가능한 시대가 어서 오길 염원하는 뜨거운 열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작지만 강한 출판사로 오래 남아주길 바라며 함께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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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커리큘럼 -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
이계삼 지음 / 한티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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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한티재)은 일종의 북 리뷰집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성장이 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을 많이는 읽지 못했다. 저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오늘의 교육>이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북 코너에 실린 그의 리뷰를 읽고 몇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정도다. 나의 지적 성장이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반갑게 다가온 구절이다.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113쪽)

 

"그도 몰랐구나!" 나도 모르게 의식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는(도) 몰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야에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지 않고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이명박 정부가 장악하다시피한 대한민국 공영방송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책의 제목이 '청춘'의 커리큘럼이니 이 책을 먼저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교사들이 먼저 읽기를 바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교사들의 지적 성장이 이미 오래 전에 멈추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넘은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악담을? 적절한 근거가 있긴 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금세기에 터진 가장 심대한 인류의 재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웃나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놀랄 만큼 냉담했다. 여기서 사용한 냉담이란 단어는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나도 뒤늦게야 알게 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서 그 심각성을 말해주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반박을 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표정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체르노빌 이야기가 나왔으니 먼저 한 대목만 소개할까 한다. 앞부분은 저자 이계삼의 글이고, 뒷부분은 그가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네 시간 뒤에 죽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죽었다. 뱃속의 아기는 그의 몸으로 흡수된 방사선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딸이, 나를, 살렸다. (…)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사랑과 죽음은 왜 나란히 있을까? (…)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123쪽)

 

끔찍하지 않은가? 최근에야 이슈가 되기 시작한 핵 방사능 이야기는 그렇다 치자. 꽤 오래 전 일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글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영어교과서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머지않아'가 고작해야 이삼십 년 뒤라는 것. 그리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명색이 선생(지식인)이란 자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주범은 햄버거였다. 햄버거를 만들려면 소가 필요하고 소를 먹이기 위해서는 초원의 풀이 필요하다. 결국은 소에게 먹일 풀을 제공할 초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마존 유역을 비롯한 지구의 열대우림이 몽땅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이미 그 진행상황이 가히 절망적이라는 것이 정부가 감수한 검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수업준비를 하다가 옆에 있던 후배교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자 즉각 이런 반응이 나왔다. 

 

"에이, 그렇게까지 되겠어요? 그 정도가 되면 무슨 조치가 나오겠지요. 그리고 요즘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거 하나 해결 못하겠어요?"

 

<청춘의 커리큘럼>1부 첫 꼭지 제목이 '공황시대의 목전에서 슈마허를 생각하다'이다. 저자가 E.F 슈마허를 천착하게 된 것은 "슈마허의 사상에는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적정기술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 탈중심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인간 구원의 초월적 가치와 이것을 구원할 수단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핵심이다.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도? 그렇다. 아니, 바로 과학이 발달한 것이 화근일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웬델 베리가 한 말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39쪽)

 

이계삼은 원델 베리와 IT산업의 귀재 스티븐 잡스의 삶을 비교한다. 스티븐 잡스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웬델 베리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계삼이 책을 통해서 만난 웬델 베리는 스티븐 잡스가 실리콘 벨리의 총아로 전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수십 년 간 달려오는 동안, 1960년대 이후부터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43세이던 1977년에는 대학 교수직까지 사임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지금껏 농사를 짓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삶을 위해 이바지했느냐고 묻는 것은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는 우문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몇 글자를 더 넣어서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바지했을까?"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자 이계삼 생각은 어떨까? 

 

요컨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스가 추구한 첨단의 기술은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사실, 그 먹을거리가 끊어지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는 존재 조건을 한 치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첨단의 기술 문명이란 실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41쪽)

 

칼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석유고갈과 관련된 사실들은 너무 많은 진실이면서, 또한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다.(137쪽)


 

<청춘의 커리큘럼>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커리큘럼(교육과정)이란 용어에 걸맞게 각 부의 소제목에는 모두 '공부'라는 말이 들어간다. 공부의 이유(1부), 이 시대를 공부하다(2부), 희망을 공부하다(3부). 그리고 20개의 꼭지 글마다 제목과 더불어 일종의 키워드가 붙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빨간 약, 쉽게 고르지 마시라! /대중문화
정당정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민주주의
체르노빌 세계사/핵발전
고향 땅에 어린 슬픈 역사/한국 현대사
진실과 불복종의 교육/교육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문학
아름다운 하워드 진/지식인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영성

 

저자 이계삼은 책 서문에서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10대와 20대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의 고향 밀양에서 농사와 인문학을 큰 줄기로 하는 작은 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유는 지금의 학교에서는 불가능한 '진짜 공부'를 함께 해보려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 진짜 공부를 위한 첫 길잡이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대공황기로부터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카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도로시 데이의 삶을 반추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 언론인이었다.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취재하다가 그들의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인근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는 일생의 동역자인 피터 모린과 함께 '환대의 집'을 연다.

 

그리고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 집을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진심으로 환대해주고, 그들의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들어준다. 

 

저자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생각할 때 이런 그녀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라고도 얘기한다. 이런 타자에 대한 환대의 요구는 그의 미래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연민이 그의 삶을 몰고가는 에너지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을 어느 한 개인의 성품만이 아닌 당대를 사는(혹은 살아가야할) 청춘들의 커리큘럼으로 제시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혹자를 이런 그를 두고 이상주의자 내지는 지나친 비관론자라고 혹평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절실함이 곧 우리 모두의 절실함으로 전이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마땅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훌륭한 선배 스승들의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면 된다. 청년이나 기성세대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청춘의 커리큘럼>이 읽기에 버거운듯 하면서도 절실하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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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한티재)은 일종의 북 리뷰집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의 성장이 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을 많이는 읽지 못했다. 저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오늘의 교육>이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북 코너에 실린 그의 리뷰를 읽고 몇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은 정도다. 나의 지적 성장이 더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반갑게 다가온 구절이다.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113쪽)

 

"그도 몰랐구나!" 나도 모르게 의식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는(도) 몰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야에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지 않고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이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이명박 정부가 장악하다시피한 대한민국 공영방송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책의 제목이 '청춘'의 커리큘럼이니 이 책을 먼저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 책을 교사들이 먼저 읽기를 바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교사들의 지적 성장이 이미 오래 전에 멈추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넘은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악담을? 적절한 근거가 있긴 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금세기에 터진 가장 심대한 인류의 재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웃나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동료 교사들의 반응은 놀랄 만큼 냉담했다. 여기서 사용한 냉담이란 단어는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나도 뒤늦게야 알게 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서 그 심각성을 말해주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반박을 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표정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체르노빌 이야기가 나왔으니 먼저 한 대목만 소개할까 한다. 앞부분은 저자 이계삼의 글이고, 뒷부분은 그가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네 시간 뒤에 죽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죽었다. 뱃속의 아기는 그의 몸으로 흡수된 방사선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딸이, 나를, 살렸다. (…)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사랑과 죽음은 왜 나란히 있을까? (…)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123쪽)

 

끔찍하지 않은가? 최근에야 이슈가 되기 시작한 핵 방사능 이야기는 그렇다 치자. 꽤 오래 전 일이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글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영어교과서에서 읽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머지않아'가 고작해야 이삼십 년 뒤라는 것. 그리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명색이 선생(지식인)이란 자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주범은 햄버거였다. 햄버거를 만들려면 소가 필요하고 소를 먹이기 위해서는 초원의 풀이 필요하다. 결국은 소에게 먹일 풀을 제공할 초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마존 유역을 비롯한 지구의 열대우림이 몽땅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이미 그 진행상황이 가히 절망적이라는 것이 정부가 감수한 검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수업준비를 하다가 옆에 있던 후배교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자 즉각 이런 반응이 나왔다. 

 

"에이, 그렇게까지 되겠어요? 그 정도가 되면 무슨 조치가 나오겠지요. 그리고 요즘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거 하나 해결 못하겠어요?"

 

<청춘의 커리큘럼>1부 첫 꼭지 제목이 '공황시대의 목전에서 슈마허를 생각하다'이다. 저자가 E.F 슈마허를 천착하게 된 것은 "슈마허의 사상에는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적정기술과 지역 공동체의 가치, 탈중심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인간 구원의 초월적 가치와 이것을 구원할 수단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인류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핵심이다.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도? 그렇다. 아니, 바로 과학이 발달한 것이 화근일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웬델 베리가 한 말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39쪽)

 

이계삼은 원델 베리와 IT산업의 귀재 스티븐 잡스의 삶을 비교한다. 스티븐 잡스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웬델 베리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계삼이 책을 통해서 만난 웬델 베리는 스티븐 잡스가 실리콘 벨리의 총아로 전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수십 년 간 달려오는 동안, 1960년대 이후부터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43세이던 1977년에는 대학 교수직까지 사임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지금껏 농사를 짓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삶을 위해 이바지했느냐고 묻는 것은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는 우문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몇 글자를 더 넣어서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바지했을까?"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자 이계삼 생각은 어떨까? 

 

요컨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스가 추구한 첨단의 기술은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사실, 그 먹을거리가 끊어지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가 없다는 존재 조건을 한 치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첨단의 기술 문명이란 실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41쪽)

 

칼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석유고갈과 관련된 사실들은 너무 많은 진실이면서, 또한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다.(137쪽)


 

<청춘의 커리큘럼>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커리큘럼(교육과정)이란 용어에 걸맞게 각 부의 소제목에는 모두 '공부'라는 말이 들어간다. 공부의 이유(1부), 이 시대를 공부하다(2부), 희망을 공부하다(3부). 그리고 20개의 꼭지 글마다 제목과 더불어 일종의 키워드가 붙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빨간 약, 쉽게 고르지 마시라! /대중문화
정당정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민주주의
체르노빌 세계사/핵발전
고향 땅에 어린 슬픈 역사/한국 현대사
진실과 불복종의 교육/교육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문학
아름다운 하워드 진/지식인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영성

 

저자 이계삼은 책 서문에서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10대와 20대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의 고향 밀양에서 농사와 인문학을 큰 줄기로 하는 작은 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유는 지금의 학교에서는 불가능한 '진짜 공부'를 함께 해보려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 진짜 공부를 위한 첫 길잡이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대공황기로부터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카톨릭 노동운동을 이끈 도로시 데이의 삶을 반추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 언론인이었다. 먹을 것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취재하다가 그들의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인근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는 일생의 동역자인 피터 모린과 함께 '환대의 집'을 연다.

 

그리고는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 집을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수프와 빵을 대접하고, 진심으로 환대해주고, 그들의 말을 밑도 끝도 없이 들어준다. 

 

저자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생각할 때 이런 그녀의 삶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이 필요하다"라고도 얘기한다. 이런 타자에 대한 환대의 요구는 그의 미래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연민이 그의 삶을 몰고가는 에너지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을 어느 한 개인의 성품만이 아닌 당대를 사는(혹은 살아가야할) 청춘들의 커리큘럼으로 제시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혹자를 이런 그를 두고 이상주의자 내지는 지나친 비관론자라고 혹평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절실함이 곧 우리 모두의 절실함으로 전이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마땅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훌륭한 선배 스승들의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면 된다. 청년이나 기성세대를 가릴 것 없이 말이다.

 

<청춘의 커리큘럼>이 읽기에 버거운듯 하면서도 절실하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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