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루스 윌슨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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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 사람

책읽기가 곧 삶인 사람들이 있다. 평생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온 독서로 생각과 가치관을 형성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겪은 온갖 경험들과 쓰디쓴 인생의 고비들을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간 읽어온 것들이다. 기억은 읽어온 것들과 비교하여 반추하는 과저에서 비로소 해석된다. 이들은 본인의 삶을 변화시킨 ‘인생책’이 있다고, 문학이 본인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책의 지은이 루스 윌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저자는 1932년 호주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이다. 저자의 조부모는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당시는 오스만 제국)을 떠나 호주로 정착했다. 저자의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저자는 오빠와 비교해서 별 차별 없이 자랐고 공교육을 받았으며 대학도 졸업했다. 안락한 집에서 풍족하게 자랐다고 회상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밤마다 본인과 오빠에게 동화를 읽어주었다. 저자는 타고난 독서애호가라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가정배경(부모님의 교육관, 넉넉한 가정 형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의 사회적 환경, 여성에 대한 차별 없는 교육 등이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교차하여 읽는 인간으로서의 저자 루스 윌슨을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1930년대에 태어난 여성이었다면 이 책의 지은이의 형편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저자의 독서는 주로 소설이었다. 저자는 독서 생활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꼽는다.


🌿예순 즈음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다.

저자는 예순 즈음 삶에 정나미가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행복이 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품는다. 이룰 수 있었는데 못 이룬 것들이 서럽고 다가올 날도 서러워졌다. 한편 저자는 꽤 운이 좋은 여성이다.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자기만의 집’을 가질 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가부장제에 예속되어 결혼생활 이후의 삶 대부분은 가족의 것이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을 읽으며 성장한 사람이 가부장제에 아무런 불만 없이, 집안의 천사로 살아온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내가 되고 싶은 여성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작품들에 대한 향수가 가슴에 밀려들었다. (…) 오스틴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 세계관의 프레임에 비추어 내 인생의 만족과 불만족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
___19쪽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다

저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여섯 권을 다시 읽어가는 것을 재활 치료라고 생각하고 독서에 열중한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 독서 생활의 맥락에서 지나온 삶을 복기하고, “헝클어진 내 마음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변화를 모색”해보기로 한다.

저자는 “결혼 생활의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겪어본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나이 일흔에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는다.

“ 읽는 사람은 상호 교섭의 일환으로 저마다 ‘과거 경험의 저장소‘에 든 것을 끄집어낸다는 로젠블랫의 단순 명료한 설명을 듣고 나도 글을 읽는 눈이 뜨였다. “
__36쪽


🌿제인 오스틴 소설을 해독제처럼 섭취하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의 어떤 점이 해독제로 작용했을까? 한편 해독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땅의 모든 여성은 다양한 교차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930년대 즉 종전 이후 호주 대륙에서 유대인 가정의 의사 딸로 태어난 어느 여성(이 책의 저자)을 비롯하여 그녀 주변의 또 다른 호주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아주 희미하고 피상적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 종전 이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세상은 올드 노믈로 되돌아갔고 젠더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나날이 후퇴했다. 지금 생각하면 결혼 초기가 일종의 과도기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한다는 기쁨이 아니라 가장에게 순응을 요구하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 _88쪽

” 나는 자율과 독립이 당연히 보장되는 것이라 믿었고 우리 어머니 세대에게는 어림도 없었을 대학 교육을 당연하게도 받은 입장이었는데도, 가만 보니 내가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확히 말하면 이건 현실과의 대립이었다. 페미니즘 역사에서 잘못된 쪽에 태어난 자의 굴레라고 해야 하나.“ _88-89쪽


저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동반자적 결혼 관계를 기대하였으나, 실제 결혼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어느 결엔가 나는 결혼 공화국의 이등 시민이 되어버렸더라.”라고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저자보다 대략 20년 뒤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인데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동반자적 결혼 관계에 세뇌되었고 여기서 비롯된 환상을 품고 산 나머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평생에 걸쳐 불화했다. 문득 나는 이 세상의 여성들이 저마다 가진 결혼관에 어떤 것들이 스며들었는지 떠올려보았다.

“늙어가는 처지에 여전히 로맨틱한” 저자가 만약 제인 오스틴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결혼관을 가졌을까? 그랬다면 결혼 생활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졌을까? 어쨌거나 저자는 제인 오스틴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결혼관으로 인해 현실의 결혼 생활에 불행을 느끼기도 되지만, 결국 제인 오스틴으로 스스로의 불행을 해독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 1950년대와 1960년대, 그 시절 내 주변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인생이 던져놓은 예상을 빗나간 패를 받아 들고 그걸 어찌 처리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가까운 여자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 교육을 받고 곧바로 결혼을 했다. 자진해서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불륜이 원인이었는지 증상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방이 불륜이었다. ”
_89-90쪽



저자는 인생의 희비고락을 제인 오스틴을 읽으며 다시 해석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삶을 해석한다. 저자는 제인 오스틴을 통해 자기 인생 스토리를 이해하고 자기 삶과 타협점을 찾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구의 백인들이 가진 행복, 삶, 자기애, 이성, 감성 등에 대한 관념을 계속하여 의식했다.

나는 저자와 같은 수준의 삶에 대한 통찰 따위는 없다. 그러나 나 역시 책들의 도움으로 위에 언급한 단어들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환상, 거품 등은 몇 마디 보탤 수 있다. ‘행복’이라는 단어에는 20세기 이후의 소비주의 사회가 주입한 환상이 강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우리는 개개인의 감정을 너무나 중시한다는 것(나르시시즘적 문화), 서구식 이성과 감성의 대립항 대비는 틀렸다는 것, 삶이 평탄해야 한다는 기대는 환상이라는 것, 불행과 실패라는 단어는 틀렸다는 것, 나의 기대 대부분이 어리석다는 것 등등.

저자는 『이성과 감성』을 읽으며 서구식 이성-감성 대립항 구조는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이성과 감성은 인간 성장의 필수 요소이다. 『에마』를 읽으며 나르시시즘적 자기애를 버리는 법을 배우며, 자신과 타자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다가간다.

****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밑줄 그을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오로지 읽기 위해 산다. 읽는 것 말곤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의 <나가며>에 굵은 밑줄을 그은 부분을 소개하며 이 독후감을 끝내야겠다.

“ 좋은 뜻에서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간혹가다 그 의미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섭리라고 생각하는데, 섭리라는 것이 내 의식 안에 상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당장은 알 듯 말 듯 하다가 수년을 돌고 돌아서야 인생에서 그것의 자리가 밝혀지기도 한다. ” __ 393쪽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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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미디어 생태학 - 인공지능이 재편하는 지식과 권력 방송문화진흥총서 252
이광석 지음 / 안그라픽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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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미디어 생태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신앙이 된 실리콘밸리 산 기술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고, 인류세 위기 현실에서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색한다.

먼저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핵심 신기술을 왜 근본적으로 의문시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 사회에도 기술 숭배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우리 사회에 첨단 테크놀로지는 성장 중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스테로이드 약물이 된 듯하다. 불과 몇 년 전 우리는 코로나19 감염병 재난 시기 방역을 위해 바이러스 공포의 면역제로 각종 감시 기술을 도입했고 가상의 메타버스 일상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 이제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의 기술 축복이자 또 다른 신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미칠 사회와 노동시장 변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나 대응책은 크게 부재하다.❞

❝성장 숭배, 기술 과진화, 지대 욕망 등에 허우적거리는 것 외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아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우울한 ‘리얼리즘’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AI 테크놀로지가 사회 구원의 메신저처럼 군림하는 모양새다.❞

만성화된 경기 침체, 고용 불안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 신기술은 구세주처럼 여겨진다. 저자는 “대체로 우리 사회는 신기술 선점과 기업 경쟁력 확보를 통한 경제 발전의 낙수 효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한다.

미디어는 빅테크 회사의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해왔다. 반면 시민 데이터 인권 상실, 기술 대체 효과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 기술 변화에서 배제된 사회 약자들의 소외, 플랫폼 노동 현실, 탈진실, 디지털 도파민에 사로잡힌 데이터 소비 방식 등 기술이 가져온 온갖 사회 문제들은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저자는 숭배나 신앙의 대상이 된 우리 사회의 미디어 기술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먼저 인공지능 둘러싼 주요 쟁점들을 짚고, 기후재난 시대에서의 인공지능 기술의 지위와 위상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그다음에는 생성형 AI 문제를 깊게 파고든다. 우리가 과연 생성형 AI를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챗GPT는 나의 훌륭한 협업도구가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분석은 ‘그렇지 않다’이다. 협업이라는 동등한 위치는커녕 기계와 인간의 지위가 역전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우리는 그럴듯한 일자리를 점점 잃어갈 것이라 전망한다. 저자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권력이동 현상이 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AI 기업과 인력 브로커 업체의 하청이나 도급을 받고 ‘어시’ 일감을 수행하거나, 인력시장 플랫폼에서 단기 계약직을 수행하는 유령노동자나 미세노동자라는 불안한 지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애초 인공지능 자동화 시스템을 발 빠르게 도입한 은행들은 업무의 기본적인 고객 문의를 AI 챗봇이 처리하는 대신, 인간 상담사는 고객들의 복잡한 상담 서비스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런데 실제 AI 챗봇의 활용 효과는 은행이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많은 경우에 콜센터 상담원이 AI 챗봇에 지쳐 화가 잔뜩 나 있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 오히려 상담사들의 업무 난이도가 실제 높아졌다. (…) 생성형 AI 챗봇과 일하는 콜센터 상담 노동자들에게 이른바 ‘AI 뺑이’를 가속화해 노동자들을 편하게 만드는 상황이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의 3부부터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기술 환각에서 깨어나 다른 삶을 꿈꾸는 상상력과 대안을 논한다. 이 책은 AI 기술의 생태주의적 접근과 해법을 강조한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새로운 현실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평화롭게 얽혀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은 보통 인간계나 자연계와 무관하며 비물질이거나 탈물질의 것으로 다뤄져 왔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청정의 거대 과학기술 발전 논리로 추앙하면서, 기실 그것이 물질적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물질 논리와 긴밀히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가령 인공지능은 인간의 노동과 인간 활동 데이터 등 비물질 자원은 물론이고, 에너지, 토지 광물, 냉각수, 데이터센터,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반도체, 클라우드 등 물질 자원과 미디어 인프라의 동원 없이는 그 어떠한 연산처리도 불가능하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이론가 캐런 바라드의 ‘얽힘’ 개념, 문화 인류학자 애나 칭의 송이버섯 이야기(『세계 끝의 버섯』)를 가져와 인간/비인간 존재들의 상호의존적 관계와 얽힘, 돌봄 등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을 생태주의적으로 다루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술적 대상은 그 내적 논리를 지닌 독립된 인공물이나 따로 떨어진 개체적 존재가 아니다. 인공지능 기술은 생태계, 마음계, 인간계, 자연계와 함께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는 이 얽힘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동시대 첨단 기술과 생태주의적 조화로운 동거를 모색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인류세 파국을 막기 위해서 기술 폭주에 대한 ‘감속주의적 전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감속주의란 기술 ‘가속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기술 가속주의’는 저렴한 자연에 기대어 자본주의적 생산 기계의 산출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성찰 없는 성장과 발전을 꾀하는 것을 말한다.

감속주의는 기술의 생태 사회적 숙의 과정을 통해 생명과의 공존을 위해 기술의 속도를 조절하려는 성찰적 태도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도 닿아 있다.
감속주의는 단순히 기술의 포기나 폐기를 뜻하지 않는다. 감속주의는 우리 사회의 기술 숭배 정서, 기술만능주의적 허상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기술 감속주의를 가로막는 몇 가지 장벽들을 검토한 뒤 책을 마무리한다. 인공지능은 전혀 청정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인공지능이 가진 물질적 독성을 전체 생애주기별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의 마지막 소제목은 <테크노 리얼리즘의 감각>이다. 이 책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용어법을 빌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휩쓸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우울한 현실을 ‘테크노 리얼리즘’라고 표현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를 구석구석 비판하고 성찰한 여러 사상가들을 지속적으로 호출한다. 문화인류학자, 비평가, 미디어학자, 사회학자, 신유물론자 등등.

저자는 마지막 글 <테크노 리얼리즘의 감각>에서 도나 해러웨이, 로지 브라이도티의 말을 인용한다.

해러웨이는 “기술이 버릇이 없지만 매우 영리한 자손들을 어떻게든 구하러 올”것이라 철석같이 믿는 인간의 기술 신앙과 그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은 적이 있고, 브라이도티는 우리 인간은 “기술 공포증적이어도, 순진하게 기술애호적이어도 안되며, 중간적 입장에서 오히려 우리의 역사성에 의해 야기된 복잡성을 다루기에 충분히 냉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기술 감속주의가 인류세 위기를 멈춰 세우는 중요한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책을 마무리한다.

최근 읽은 어떤 책에서는 인공지능을 매일 꾸준히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자기 계발서적 같은 인공지능 관련 책들이 넘쳐난다. 이런 책들의 존재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인공지능을 보다 종합적이고 비판적으로, 균형감 있게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을 뿐이다. 이 책 『AI 미디어 생태학』은 그런 내 바람을 들어주고 내 독서의 빈틈을 메워준다. 인공지능이 재편하는 지식과 권력의 흐름을 잘 정리하여 알려준다.

이 책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 정책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이광석 교수님이 쓰신 책으로 대중적인 글쓰기와 학술적인 글쓰기 중간에 걸쳐있다. 그러나 생태주의, 신유물론 등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유익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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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 - 가장 사적인 기록으로 훔쳐보는 역사 속 격동의 순간들 테마로 읽는 역사 11
콜린 솔터 지음, 이상미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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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는 역사 속 편지에 관한 이야기로,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남긴 편지들이 담겨 있다.
기원전 346년경 스파르타인이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에게 쓴 짧은 답장에서부터 2019년 스웨덴의 여학생 크레타 툰베리가 기후 변화에 대응을 촉구하여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쓴 편지까지 담겼다.
책에서는 사적인 편지부터 공적인 편지, 명령하는 편지, 반항하는 편지, 처음 보낸 편지, 계속 주고받은 편지, 마지막 편지, 잃어버린 편지, 전쟁 중에 보낸 짧은 편지, 전투 직전에 보낸 중요한 편지까지 다양한 편지를 다룹니다.

❝ 이 편지들이 실제로 역사를 바꾸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독후감에는 100통의 편지 중 몇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 정말 짧은 편지
이 책의 첫 번째 편지는 기원전 364년 스파르타인이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에 보낸 두 통의 짧은 편지다.
영단어 형용사 ‘laconic’은 ‘말이 짧지만 함축성 있고 간결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라코닉 화법’은 거창하고 장황한 생각을 군더더기 없이 짧게 축약해 전달하는 화법이다. 이 영단어의 뜻은 알고 있었는데 그 유래가 스파르타의 지역 이름인 ‘라코니아’에서 온 것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몰랐다.

대중문화 속 스파르타 남성의 이미지는 영화 「300」에 잘 묘사되어 있다. 7세부터 기초 군사훈련과 학문 교육을 받은 스파르타 남성은 질문에 대답하는 기술도 배웠다고 한다. 만약 라코닉 화법에 부합하지 않게 대답을 하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웃 국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영토 확장에 힘썼다. 그는 스파르타 지도자에게 전쟁 없이 항복하라며 편지를 보냈다. 스파르타가 보낸 답장은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 IF(만약) ❞
__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내용

필리포스 2세는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낸다. 필리포스 2세 편지도 나름 라코닉 화법인 것 같다. “내가 당신들 땅에 친구로 들어갈까, 적으로 들어갈까?” 그랬더니 스파르타가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이번 편지도 딱 한 단어다.

❝ Neither(둘 다 아니다) ❞
__스파르타가 필리포스 2세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내용


✅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에게 자신의 발견을 알린 편지

1492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연도는 외울 것이다. 바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다. 콜럼버스는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에게 본인의 항해에 발견한 것과 겪은 일들에 대하여 편지를 썼다.

(여기부터의 단상은 저자가 책에 언급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더디지만 나름 진지하게 역사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먼저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다들 알겠지만 신대륙이 아니다. )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왠지 불편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들의 항해가 이 대륙을 어떻게 침략했고 약탈했고 학살했고 불태웠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악의 역사를 확인하고 싶으면 유럽인들의 온갖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읽으면 좋다.


✅ 세기의 연애편지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사랑은 역사책에 길이길이 남는 연애 이야기다. 이 책에서도 빠질 수 없다. 1526년 25세의 젊은 청년 헨리는 10살 연하인 앤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는 앤을 쫓아다니며 계속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 연애편지 중 한 편이 실려 있다. 헨리 8세의 필체와 함께 그 절절한 편지의 내용을 한번 보자.



❝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선물은 없을 것이도. 진심으로 감사를 #세계사 #역사 #책추천 #편지표하오. 멋진 다이아몬드와 여인이 홀로 타고 있는 배도 인상적이지만, (…)
당신의 애정을 보여주는 표현과 편지의 아름다운 문구는 영원히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섬기게 만드는구려. (…) 나 역시 당신을 기쁘게 하려는 열망과 충성으로 당신을 향한 마음이 더 커지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하오.
또한 전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서운하게 했다면, 당신이 구했던 용서를 내게도 베풀어주기를 간청하오. (…) ❞

__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보낸 연애편지 중


📌『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의 저자 콜린 솔터는 대중 교양서 전문 작가로, 과학, 자연사, 역사, 전기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책을 써왔다. 나는 『해부학자의 세계』를 통해 저자의 글을 만나게 되었고 이번 책은 두 번째 만남이다.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명쾌하고 재밌는 설명으로 독자의 교양 수준을 높여준다. 이번 책도 『해부학자의 세계』와 동일하게 하드커버에 올 컬러, 훌륭한 내용과 편집 등 소장 가치가 무척 높다.
운 좋게 저자의 책 두 권을 만났고 의학사와 세계사에 대한 교양을 높일 수 있었다. 저자의 다음 책도 무척 기대된다.

❝ 이 편지가 발견된다면, 우리가 죽어가는 동료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잘 견뎌냈다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경주에서 용기와 인내를 아직 잃지 않았음을 이 편지가 증명할 것입니다. ❞
__남극 탐험대 스콧 대장이 탐험대 재정 후원자 슈파이어 경에게 보낸 편지 중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세계사 #역사 #책추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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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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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미 도서상 수상작 『암전들』은 ‘그 어떤 책과도 닮지 않은, 미국 문학의 강력하고 새로운 목소리’라고 평가받는 퀴어 작가 저스틴 토레스(1980~ )의 장편소설이다.

『암전들』 책 앞날개에 따르면 이 소설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검열된 퀴어들의 목소리에 관 한 아카이브 자료를 독특하게 재구성’한다.

이 작품은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다. 실존하는 연구서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을 중심에 놓고 허구의 인물인 후안과 네네가 등장한다.

책의 시작은 팰리스라는 요양 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해골처럼 앙상한 몸을 가진 후안 게이라는 노인이 이 젊은 푸에르토리코인 청년 네네를 불러들이는 장면이다. 후안은 네네에게 자기가 죽으면 팰리스에 남아 자기 방을 넘겨받으라고 한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잰 게이라는 여성 연구자가 남긴 두 권으로 나뉜 두꺼운 책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
이 책은 앞서 말했든 실존한다. 이 책의 저자 잰 게이는 1902년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태어났고 열두 살에 나이에 커밍아웃하였다. 잰 게이는 3백 명 이상의 여성을 인터뷰했고, 레즈비언인 그들의 성애사를 기록하여 출판하려고 했다. 당시 출판사들은 이 원고를 외설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하여 출판하기를 꺼렸고, 이에 잰 게이는 성적 변동 연구 위원회를 설립한다.

잰은 중하급 계층에 속한 다양한 인종의 퀴어 3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과 욕망을 연구했고 두 권짜리 연구 결과물을 만든다. 한편 이 연구 성과물의 표지에 프로젝트를 이끈 잰 게이의 이름은 없다. 위원회의 위원장인 조지 W. 헨리 박사의 이름만 『성적 변종들』 표지를 장식했을 뿐이다.

『성적 변종들』은 〈남성〉 과 〈여성〉 두 권으로 나뉘었고, 각각 양성애 사례, 동성애 사례, 그리고 자기애 사례라는 세 개의 범주로 세분되어 있다. 『암전들』에 등장하는 『성적 변종들』의 페이지들은 대부분에 검은 줄이 좍좍 그어져 있다. 검은 줄들은 이 책이 엄청난 검열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페이지들은 『암전들』 곳곳에서 삽입되어 있다.

책의 저자에 잰 게이의 이름이 빠진 것과 책 내용의 대부분에 검은 줄이 쳐진 것은 성소수자의 목소리와 욕망을 억압하고 지워버리려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혔다.



암전들(Blackouts)
blackout의 사전적 뜻은 정전, (정부, 경찰에 의한) 보도 통제[정지], 일시적인 의식[시력/기억] 상실 등이다. 후안이 팰리스 로비에 발견한 『성적 변종들』에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 검은 줄이 쳐져 있다. 후안은 주 공무원이 검열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후안과 네네는 모두 자살 시도를 했던 적이 있다.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그들은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지우려는 시도를 했었다. 퀴어로서의 삶을 인정해 주지 못하는 주류 사회는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다. 잰 게이의 연구 역시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그의 연구에 기록된 성소주자의 욕망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어느 밤, 후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강제로 시설에 수용되었던 일을 가리키며 미국 의학의 어두운 정신사라고 표현했다. 1974년까지 미국 심리학회는 후안이 비블리아로카라고 표현한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동성애를 포함했다. 퀴어인 것은 미친 게 분명했으며 치료 대상이었다. 1974년 편람에서 동성애를 제외한 조치는 정신의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6년 뒤 1980년에는 자아 이질적 동성애라는 새로운 진단명이 등장해 비블리아로카 제3판에 실렸다고 했다. 이 진단명은 일종의 타협이자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를 질병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은 대다수의 심리학자에게 내민 올리브나무 가지였던 셈이다.❞

후안이 네네에게 남긴 프로젝트는 억압받은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암전에서 건져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네네는 후안과 끝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본인의 삶을 재구성한다. 네네는 후안 덕분에 본인의 삶을 말하는 법을 익혀간다. 『성적 변종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300명의 사람들과 네네의 삶과 욕망은 미친 것도 아니고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편협한 시대는 언제나 성소수자들을 거부했고 그들을 구석으로 몰았다. 『암전들』에서는 이 모든 이들을 하나하나의 증언으로 기록해서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게일 루빈의 『일탈』을 어서 빨리 결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을 사유하는 법'을 모른 채 살아간다. 주류 권력이 우리에게 부여한 방식대로 생각하고 감각하며 살아간다. 사회라는 권력은 인간을 납작한 틀에 넣어서 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비정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우리는 틀에서 삐져나온 부분을 잘라내거나 욱여넣거나 아무튼 알아서 추스려야 한다. 그 좁디 좁은 틀에 스스로를 구겨넣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지 못했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늘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는지 고통받았는지 혐오 받았는지 들여다본다. 소설은 우리의 불안은 결코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해준다.

『암전들』은 성적 욕망과 삶을 거부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나는 이 작품을 단순히 성적 욕망의 거부에 한정해 읽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은 외부로부터 평가받고 재단 받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정체성은 주류에 속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사회로부터 침묵하라고 명령받은 것들을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암전들』은 명령하고 억압하는 힘으로부터 살아남아 숨 쉬려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작게 숨 쉬었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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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훈의 랫시티 - 완벽한 세계 유니버스25가 보여준 디스토피아
에드먼드 램스던 외 지음, 최지현 외 옮김 / 씨브레인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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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훈의 랫 시티』는 존 칼훈(1917~1995)이라는 생태학자이자 사회학자(인류학에도 정통한 도시 이론가이기도 한)가 수행했던 쥐 군집 실험 연구 내용과 그의 연구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통찰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의 공저자 존 애덤스와 에드먼드 램스던은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존 칼훈의 실험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분석했다. 존 칼훈은 인구 밀도와 사회 구조가 개인과 집단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책의 저자들은 존 칼훈의 연구가 동물 실험을 넘어 인류 사회의 미래를 향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본다.

✅랫 시티가 과밀해지자 유토피아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칼훈의 연구는 인구 밀도가 높아질 때 나타나는 사회적 행동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풍부한 자원과 안전한 환경이 제공된 이상적인 쥐의 도시 '랫 시티'를 설계했다. 랫 시티에 살게 된 쥐들은 처음에는 쾌적한 삶을 누렸다. 먹이, 물, 잠자리, 둥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거나 노력할 필요도 없다. 포식자도 경쟁자도 없다. 쥐들은 가족을 이루고 번식했다. 랫 시티에서 유일한 위험 요소는 공간의 크기일 뿐이다.
세대가 거듭되며 쥐 개체 수가 증가한다. 유니버스는 혼잡해진다. 랫 시티가 과밀해지자 점점 비정상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유아 방치가 증가하고, 일반적인 짝짓기가 사라지고 공격적이고 비생식성 성행위가 나타난다. 둥지 안에 있는 새끼 쥐들은 공격받고, 암컷 쥐들은 수컷 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쥐 개체 수가 적었던 초창기의 유토피아적 랫 시티는 지옥으로 바뀌게 된다.

칼훈의 연구가 인상 깊은 것은, 그의 실험에는 직접적인 외부 자극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스트레스 연구는 독성 물질 주사, 강제 운동, 절단 등과 같은 끔찍한 외부 자극을 가해 스트레스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칼훈의 실험에서는 쥐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지 않는다. 그저 쥐들이 높은 밀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걸 막지 않고 관찰했을 뿐이다. 쥐들은 칼훈의 랫 시티 안에서 자발적으로 붕괴했다.

✅랫 시티에서 살아남은 쥐는 히키코모리 쥐였다
한편 랫 시티에서 마지막까지 잘 버틴 쥐들은 사회적 단절을 생존 전략을 택한 쥐들이었다. 스스로를 격리한 히키코모리 쥐들은 사회 문제(집단 패싸움, 집단 강간)는 방관하고, 교미를 하지도 않지도 않는다. 스스로에게만 몰두한 이 히키코모리들을 칼 훈은 '아름다운 자들'이라 불렀는데, 이 쥐들은 잘 살다가 자연사했다. 랫 시티에서의 히키코모리의 쥐의 생존과 장수(?)는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칼훈의 연구는 고밀도 생활 방식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그의 연구는 정신의학, 생태학, 행동학, 사회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연구는 오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책을 번역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소속 뇌과학자 최지현은 칼훈의 실험에서 인구 증가와 함께 나타나는 사회성 붕괴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관찰되는 현상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자는 출산율 저하 및 사회적 고립 문제 해결 과제를 기획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옮긴이 서문에서는 칼훈의 실험에서 관찰한 쥐 개체군의 인구 곡선이 대한민국의 인구통계 곡선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정말 소름 끼치도록 유사하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한국뇌연구원 소속 구자욱 단장은 칼훈의 랫 시티 실험은 "과학의 언어로 쓰인 현대 도시를 향한 실험적 우화"라고 표현한다. 칼훈은 그의 4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인류가 쥐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필요는 없다는 낙관적이면서도 절박한 메시지를 전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곡해되거나 사라졌고, 그의 과학적 경력의 기록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책은 칼훈의 연구에서 찾아난 귀중한 통찰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책을 읽고 재확인한 것은 초저출산 현상, 비혼의 증가, 자발적인 사회적 단절 등은 최재천 교수님 말처럼 우리 인간동물이 살아남기 위한 생태학적 적응 전략이라는 것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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