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나고 찢긴, - 여성 바디호러 앤솔러지
조이스 캐롤 오츠 외 지음, 신윤경 엮음 / 문학수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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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나고 찢긴,』 은 조이스 캐럴 오츠, 마거릿 애트우드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쓴 바디호러 작품들을 엮은 앤솔로지이다. 강렬한 표지에서 알 수 있듯 조각나고 찢기는 대상은 여성의 신체이다. 여성이 신체를 찢어발기는 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순종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발명해왔는데, 대체로 폭력적인 방식이 그 효과성을 인정받았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기 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맥박 같은 것이 고동치는데, 그것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강요한 속박에 반항하며 맞서는 맥박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나 좀 고민했다. 픽션보다는 논픽션을 훨씬 더 많이 읽은 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쓰는 독후감이 훨씬 어렵다. 고민을 하다가 내 서가에 있는 페미니즘/여성주의/가부장 코너 및 문학비평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로이스 타이슨의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을 꺼냈다. 이 책의 4장 <여성주의 비평>에서 가부장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가부장제는 여성의 자신감과 적극성을 훼손시키는 폭력을 끊임없이 자행하며, 자신감과 적극성을 부재야말로 여성이 선천적으로(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순종적인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한다.”
_200쪽 4장(여성주의 비평), 로이스 타이슨 『비평 이론의 모든 것』 중

『조각나고 찢긴, 』에 실린 작품 중 타이슨의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을 길게 풀어쓴 작품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조이스 캐럴 오츠의 《평온의 의자(1853년, 뉴저지 트렌턴, 토마스 필 부인의 일기 중에서)》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반 ‘히스테리’라는 진단으로 정신병원에 갇혔던 어느 유한계급의 기혼 여성이 쓴 일기를 바탕으로 썼다. 이 여성은 실존 인물인데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했고, 남편의 소유인 육체적 아름다움을 훼손했다는 등의 여러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 작품의 모든 문장은 로이스 타이슨이 말한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이 작품은 아마도 이 책에 실린 글 중 가장 읽기 쉬운 글이 아닐까 한다.
​1부 <넌 괴물을 만들었어>에서는 리사 림의 《거울과 춤을》(신체 변형 및 훼손 등), 2부 <병리해부학> 중 에이미 라브리의 《육안 해부학》(강간 및 시간, 남근 훼손 및 절단에 대한 암시 등), 3부 <몸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증 《일곱 번째 신부 또는 여자의 호기심》(강간, 우발적 살인, 시체 수습 등) 등의 많은 작품에서 바디호러 장르가 선사하는 그 강렬함을 체험할 수 있다.

‘강렬함’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야겠다.
『조각나고 찢긴, 』에 실린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강렬하다. 이 강렬함은 잔혹하고 역겹고 혐오스럽고 괴이스러우며 공포스럽다. 이 강렬함은 언제든 침범/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취약함, 신체 훼손과 변형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 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견디기 쉽지 않은 강렬함이다.

한편 내가 픽션보다 훨씬 많이 접해온 논픽션에는 인간동물의 수천 년에 걸친 엽기적이고 잔혹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것들이 많다. 현실은 더 픽션보다 더 끔찍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마녀로 몰려 재산몰수/고문/화형으로 삶을 마감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사례, 난징대학살 때 자행되었던 집단강간/살해(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온갖 전쟁성범죄/강간을 기술하고 있는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등을 떠올리자 『조각나고 찢긴,』에서 받은 이 강렬함은 조금씩 순화되었다.

만약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혐오스럽고 공포스럽게만 느껴진다면, 이 모든 강렬함에 깔려 있는 깊디깊은 슬픔과 억압과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도 당신이 현실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아직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 인해 여성을 비롯하여 어느 하나의 젠더 정체성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 충분히 가부장적이지 못한 일부 남성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방대한 시간과 분량의 고통의 역사를 써왔는지 몰라서 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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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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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반대한다 - 희생된 진보의 새들은 연합할 수 있고, 우리는 소외를 거부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우중몽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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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반대한다』는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지식계의 슈퍼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철학 에세이다. 이 책은 제목에 명시된 것처럼 진보 담론을 비판하고 있다.

지젝은 지식계에 등장함과 동시에 세계의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슈에 대해 철학적/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했다. 헤겔과 라캉을 토대로 마르크스의 이론과 대중문화를 함께 가져와 사유를 펼친다.

이번 책에도 대중문화를 활용해 쓴 글들이 여러 편 있다. 「진보와 그 변이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프레스티지〉, 「내전」에서 알렉스 갈렌드 감독의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권위」에서는 미드 〈더 와이어〉, 「세계의 종말」에서는 한국의 웹소설을 다룬다. 그가 분석한 한국 웹소설의 탈정치화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다. 나는 그의 분석에 동의한다.

❝ 남한의 ‘웹소설’에서 목격하는 것은 탈정치화된 커뮤니티다. 겉보기에 더 ‘개방적’이고 민첩하지만, 모종의 아주 근본적인 정ㅇ치적 측면이 형식에서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형식, 그 형식의 분명 한국적 구현물은 남한 젊은이들의 삶을 특정 짓는 선택지의 안정성 및 의미 없는 다양성과 동종의 부류로 보인다. ❞


순수지식인인 그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순수지식인들의 난해한 사유의 핵심을 나와 같은 생계형 대중들이 알아듣도록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해왔다. 그가 분석한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하여 들으며 나는 우리 시대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또 그런 시대에 적당히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와 위선을 살펴본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이토 고헤이 등을 시작으로 20세기 주요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서 『옥중수고』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위기는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이 간격에서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들이 나타난다. 포퓰리스트 우파부터 철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싸움터는 대부분 자유주의적 중도 진영이 겪는 그러한 병적인 증상이다. ❞


내게 “다 잘 될 거야.” “너는 소중해.” “오늘도 힘들었지. 수고했어” 따위의 자기위로서적을 아무리 읽어도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깊이 깨닫고 이런 책들에 환멸을 느끼던 20대 중반 무렵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알라딘 서재를 알게 되면서부터 읽기의 방향을 정비했다. 그때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서재에서 그가 너무나 좋아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나는 평소 내 계급과 지위를 의식하며 대체로 주제와 분수에 맞게 행동하지만, 책읽기에 있어서는 다르다. 내 지적인 수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독서를 해왔고 로쟈 선생님이 읽는 책들을 따라 읽으려 노력해왰다. 그의 서재에 등장하는 동서고금 온갖 지식인/사상가/철학자 중 왜 지젝에게 그토록 애정을 표할까.

『진보에 반대한다』를 읽고 나서 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두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책을 읽을 자유』에서 지젝에 대해 쓴 부분을 다시 읽었다.

우리는 왜 지젝을 읽어야 할까.

❝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을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
___ 『로쟈의 인문학 서재』 284쪽, <내가 지젝을 읽는 이유> 중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순수지식인의 이야기에 나와 같은 생계형 대중이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우리 시대 문제를 예리하게 해부해서 적당한 해결을 원하는 대중들에게 그런 것은 없다고 환상을 깨어주기 때문이다.

지젝이 비판하는 진보는 자유주의적 진보를 말한다. 우리의 진짜 먹고사니즘 문제가 왜 이렇게 고달픈지 교묘히 피해 가는 그 자유주의적 진보말이다. 우리 시대에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쉽게 비관하지만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로이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 비관을 사회 구조적 비판 담론으로 확장시키지 못한다.

❝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나뉘는 반면, 상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분열되었다기보다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교란된 하나의 잘 조직된 전체이다. 우익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온건 중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
❝ 계급 권력은 우주공간처럼 빈틈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결함과 균열로 가득하다. ❞ __ 〈절대적 불변자〉 중


우리는 최저임금을 못 받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가 외국인 노동자의 착취에 기반한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내 아파트 매매가가 왜 오르지 않는가에만 관심 있다. 왜 우리 아파트 앞에는 지하철이 지나가지 않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 대다수의 사람은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경 쓰지 않는 쪽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이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결정해야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

지젝은 현대 진보, 자본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그는 우리의 현실을 냉철히 분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만적인 의식도 함께 해부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왜 절망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공감한다.

자연과 남반구 사람들의 착취하여 짜낸 온갖 물질적 편의를 누리고 있기에 지금의 물질적 삶에 딱히 불만은 없다. 그러나 신형 아이폰으로 바꾸어도 그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이미 자본주의에 신물이 났다. 건강 이야기, 경제적 자유 이야기, 행복 담론만 가득한 이 시대 사람들의 대화가 피곤스럽다.

대안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임금의 노예로 오늘 하루 더 사는 것이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그냥 그만 살아도 되겠다. 탄소 배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라는 급진적이고 생태적인 생각에 이르게 된 나는 앞으로도 지젝을 계속 읽을 것이다.

#우주서평단 #우중몽 #슬라보예지젝 #진보에반대한다

@woojoos_story 진행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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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 - 새로 읽는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와 두 편의 시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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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인 오스틴을 두려워하랴』는 버지니아 울프가 쓴 에세이 여덟 편과 2025년에 최초로 공개된 두 편의 시를 묶은 책이다. 책에 실린 미술 에세이 두 편은 국내 독자에게 처음 소개되는 글이라 한다. 이 책은 독자에게 울프의 '비평적 목소리'를 들려주는 귀한 선물이다.

울프의 명성은 여전히 드높고, 그녀의 글은 지금도 널리 읽힌다. 울프는 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페미니즘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울프는 평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울프는 1904년부터 <가디언>에 무기명 서평과 에세이를 기고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 책의 옮긴이 이루카는 비평가로서 울프가 쓴 글들은 '단순한 논평이나 해설이 아니라 언어의 실험이자 사유의 공연이고 저항의 행위'였다고 말한다.

울프의 비평은 영문학의 정전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대상으로 탐구하여 글을 썼고, 울프의 에세이는 이 장르의 모범으로 평가되며 소설과 맞먹는 명성을 얻었다.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대목에서 '윌리엄 해즐릿'이 떠올랐다. 지금 이 책을 펴낸 아티초크 출판사는 영어권 최고의 에세이스트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집 세 권을 출간했는데, 바로 그중 첫 번째 책 『혐오의 즐거움』의 서문을 울프가 썼다. 이 탁월한 서문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에 실린 여덟 번째 글 《월터 시커트에 관한 대화》에 최고의 비평가로 해즐릿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_+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 역시 울프의 글을 사랑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가 토니 모리슨은 울프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고, 수전 손택은 울프를 글쓰기의 모델로 삼았다. 이 책의 뒤표지에는 어슐라 르 귄, 리베카 솔닛 등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울프에게 바치는 글이 적혀 있다. 이 리뷰에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이 울프에게 바치는 헌사를 가져왔다.

“ 울프는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녀가 바꾼 것은 세상보다 우리 내면의 풍경이었다.
시대의 한계 속에서 살면서도 시대 넘어를 꿈꾼 작가.
박제된 예술을 거부하라.
당신을 다시 모험하게 할 울프의 역비평. ”
__리베카 솔닛

책에는 앞서 말했듯 총 여섯 편의 에세이와 두 편의 시가 담겼다. 이 책에 실린 제일 첫 번째 에세이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를 비평적으로 탐구한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 같은 존재"라는 표현은 꼿꼿하고 엄격하며 말수가 적은 제인 오스틴의 면모를 놓고 붙인 표현이었다. 울프는 오스틴에 무자비할 정도로 날카로웠고,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풍자의 시선을 가장 꾸준히 유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이라는 천재는 울프만큼이나 우리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2025년은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이었는데, 국내에서도 제인 오스틴과 관련된 여러 책들이 출간되었다. 나 또한 운 좋게 김선형 번역가님이 새로 옮기신 『이성과 감성』을 읽었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여섯 편을 다시 읽으며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책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를 읽었다.

제인 오스틴은 문학적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오스틴은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에 『사랑과 우정』이라는 작품을 썼다. 울프는 이 글에서 열다섯 살의 제인 오스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제인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작가'였다. 그녀의 문장에는 리듬이 있고 형태가 있으며, 절제된 힘이 있다. (...)

열다섯 살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거의 없었고 자신에 대한 환상은 더욱 없었다. (...)

그녀의 시선은 늘 본질은 향하고, 우리는 인간 본성의 지도 위에서 그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를 모두 흠모하고 존경하는 독자인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래 이거야. 바로 그래 그랬어."


나는 울프의 글을 통해 오스틴의 작품에 보다 깊게 다가갈 수 있었다. 오스틴의 문장 속에서 머물렀던 시기 동안 나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였었던 단상들과 감상들은 언어로 표현되지 못했다.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침묵의 영역'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울프의 비평적 언어 덕분에 나의 감상들은 비로소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졌다. 문장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러한 예술가들/작가들/비평가들은 정말이지 나에게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이번 책에 실린 모든 글이 좋았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이 좋았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부터 시작하여 각 글에 달린 각주, 책의 부록에 실린 울프의 연보까지 좋았다.

무척 어려운 질문이겠지만 이번 책에서 특히 좋았던 글을 꼽아보라고 하면 세 번째 글 《추락하는 자에게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와 네 번째 글 《내가 교양속물을 싫어하는 이유》를 선택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좁은 읽기의 세계에 추가된 주제로는 인류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한 인간사회의 불평등, 계급과 지위, 유한계급의 허영/위선과 없는 자들의 모방/따라하기, 문학의 역사, 문학의 탐구 대상의 변천(신에서 인간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등), 문학의 사회학적 기능, 작가란 어떤 사람인지, 예술이란 무엇인지, 감정의 상품화, 양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온갖 영역에서의 변화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모더니즘 문학에 관한 관심도 추가되었다. 두서없이 언급한 주제들이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글과 세 번째 글에서 모조리 탐구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 반드시 옮긴이 해제/문학비평가의 해설을 읽고자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는 해제/해설이 실려있지만 없는 책들도 있다. 나는 생계형 인간이라 나의 감상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순수지식인이 풀어놓은 언어를 내 것과 상호 비교해 본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놓친 것을 비평가의 정제된 언어로 읽는 것은 큰 기쁨이다. 울프는 탁월한 지성을 이용하여 소설가가 구축한 세계를 면밀하게 들여다본 뒤 나와 같은 생계형 인간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생계형 인간인 나는 순수지식인 버지니아 울프 덕분에 원래도 읽고 싶었던 셰익스피어를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의 모든 것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역자가 달아놓은 모든 주석까지.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버지니아 울프 연표는 역사 및 문화적 배경을 정리해 놓았다. 이 귀한 자료는 문장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으며 최근 테리 이글턴 덕분에 모더니즘 문학에 다시금 기웃거려 보기로 마음먹은 내게 귀중한 도움을 준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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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편지 모음 : 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 - 최초의 마르크스 종합 서간집 마르크스 컬렉션
카를 마르크스 지음, 이회진 편역 / 21세기문화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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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는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던 카를 마르크스가 가족, 친구, 지인 등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서간집이다. 동아대 맑스엥겔스연구소 특별연구원 이회진이 엮은 이 책은 국내 최최의 마르크스 편지 선집이다.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여전히 크고 무겁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그의 이름은 끝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들어가며>와 <나오며>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글인데, 이 두 글을 통해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들어가며>에 실린 아주 짧은 마르크스의 전기는 이회진 편역자에 따르면 마르크스 생전이나 사후에 작성된 그 어떤 전기보다도 마르크스의 생애와 업적을 압축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나오며>는 엥겔스의 기고문 「카를 마르크스 장례식」에서 발췌한 글인데,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을 기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전체에 과학적 기초를 제시했다. 엥겔스는 <들어가며>에서 마르크스가 학문의 역사에 남긴 수많은 중요한 발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요약한다. 첫 번째는 그가 세계사 이해 전체를 완벽히 전복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이전까지 모든 역사적 변화의 최종 근거는 인간의 변화하는 이념이 아니었다. 정치적 변화가 역사 전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있어 이념은 어디에서 나오고,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해서 밝혀냈다.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내부를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밝혀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점을 증명했다.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봉건 영주, 자본가 등 언제나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웅대한 기관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 마르크스
인문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을 수백수천 번 들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마르크스와 관련된 수많은 교양서가 존재한다.

그간 마르크스에 관한 글을 꽤 많이 접했다. 대부분의 글들은 이론가, 사상가,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 내지는 '맑스'였다. 인간 마르크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 마르크스를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청년 마르크스, 아들 마르크스, 남편 마르크스, 아버지 마르크스, 친구 마르크스, 작가 마르크스, 사상가 마르크스 등을 만날 수 있다.




청년 마르크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제1부는 청년 마르크스가 쓴 편지를 실었다. 책의 제일 첫 번째 편지는 1837년 11월 10일 베를린에 있는 청년 마르크스가 트리어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마르크스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법학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다. <법학에서 철학으로>라는 제목을 가진 이 편지는 청년 마르크스가 가진 철학에 대한 열망뿐만 아니라 본인이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동원한 법철학적 지식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1818년 생이니 이때가 만 19세 한국 나이로는 20세 정도인데, 글의 깊이는 역시 '마르크스'구나 하고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 삶에는 마치 이정표처럼 지나간 시간을 마주하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도 분명히 가리키는 순간이 있습니다. (...)

세계사 자체는 이런 식의 회고를 즐기면서 가끔은 퇴보와 정체라는 가상을 눌러쓴 자신을 보곤 하죠. 그런데도 세계사는 자신을 안락의자에 던져 놓고, 자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행위를 지적으로 꿰뚫어 보려는 일만 할 뿐이에요.

그러나 이런 순간에 개인은 서정적으로 됩니다. ”
__1837년 11월 10일, 카를 M. 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추방자, 망명자, 무국적자 마르크스

책의 제2부는 추방된 자로서 마르크스의 삶이다. <끝없는 가난>이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브뤼셀로 추방되면서 망명자, 무국적자 신세로 끝없는 가난 속에서 불확실한 삶을 보냈다. 어린 자식 세 명이 죽었고 그의 아내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치욕의 순간들도 편지 속에서 읽을 수 있다.

“ 짧게 한 문장만 쓸게. 오늘 1시 15분에 작은 애가 죽었어. ”
_ 1852년 4월 14일 런던의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 사랑하는 아이가 죽으니 집은 으레 황량하고 적막해. 그 애가 우리 집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혼이었는데, 아이의 빈자리가 우리 곁의 모든 곳에서 느껴져.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이미 온갖 종류의 불운을 겪어 봤지만, 이제야 진짜 불행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완전히 망가진 기분이야. (...)
이런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나를 붙잡아 둔 것은, 너와의 우정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함께 이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야.

덧붙임 : 아내가 방금 너에게 몇 줄 쓴 것도 동봉할게. ”
_ 1855년 4월 12일 런던의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마르크스의 벗, 엥겔스

책의 제3부는 평생토록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엥겔스와 결별하게 될 뻔한 순간과 화해 과정을 담고 있다. 엥겔스에게도 마르크스는 너무나 귀중하고 소중한 벗이었다. 편지를 읽다 보면 엥겔스가 얼마나 도량이 넓은 친구였을까 상상하게 된다. 엥겔스는 추방자에 무국적자에 빈털터리인 친구가 겪는 온갖 종류의 불운을 위로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우정이란 호혜적 관계에서 싹튼다. 일방적인 관계는 대게는 지속될 수 없다고들 한다. 1863년 1월 7일 엥겔스는 그의 동반자 메리 번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마르크스에게 썼는데, 마르크스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에 위로보다는 자신의 궁핍한 삶을 다시금 설명하면서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을 썼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할 뻔했다가 화해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인간 엥겔스도 만나게 된다. 물론 책은 마르크스가 보낸 편지만 싣고 있지만, 편지의 주석에는 엥겔스가 쓴 답장 일부가 실려 있다. 편지와 주석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나눈 우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슴푸레 짐작을 해본다.

“ 네게 답장을 쓰기 전에 시간을 얼마쯤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한편으로 네 상황이, 다른 한편으로 내 상황이, 이 상황을 "냉철하게"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더라.
네게 그 편지를 쓴 것은 내가 보아도 그릇된 일이었다. 그 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했어. 하지만 이 일은 결코 냉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야. 네 편지가 도착했을 때 난 나의 가장 친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으니까. (...) 그런데 그날 저녁 네게 편지를 쓸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 ”
_1863년 1월 24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제4부는 인류의 업적이자 유산으로 칭송받는 『자본』의 출판 전후 과정을 담고 있다. 현재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병행하여 읽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본』의 탈고 과정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마지막 제5부는 노년의 마르크스가 떠난 요양 여행을 보여준다.


***
언제부턴가 서간집을 좋아하게 되었다. 두 소설가가 주고받은 서간집, 주요 역사적 순간을 담고 있는 서간집, 신경외과 의사가 동료 학자와 주고받은 서간집 등 여러 분야의 서간집을 읽어왔다. 이번 책 『200년 만에 도착한 편지』는 인간 마르크스를 펼쳐 보인다. 압도적 두께와 난해함을 자랑하는 『자본』 원전 읽기는 아직 시도조차 못했기에 그간 내게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범접 불가한 커다란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내게 인간 마르크스를 소개해 주면서 그와의 거리를 좁혀준다. 덤으로 친구 엥겔스도 소개해 준다. 나는 난해한 책을 읽을 때 비록 내용은 소화하지 못할지언정 작가와의 거리를 크게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유독 너무나 컸다. 아마 내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읽어갈 텐데 그래서인지 이 책은 무척 소중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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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 - 모더니즘 입문서 테리 이글턴 컬렉션
테리 이글턴 지음, 도원우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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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이자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들려주는 모더니즘 문학 입문서이다.

이 책은 2025년 예일 대학교 출판사에서 발행한 『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을 번역한 것으로, 원서에는 저자 서문이 없지만 21세기문화원에서 출판한 한국어 번역본에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이 실려 있다.

“ 나처럼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 서서 철모를 쓴 군인들이 블랙홀만큼 깊은 심연을 가로질러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국가의 지속적인 회복력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우리에게 그 너머,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인간 연대의 형태를 바로 보도록 유혹한다. 하여 한국에 비무장지대가 있을지라도 이상, 임화, 박태원 같은 위대한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을 배출했으리라. ” _ <한국어판 서문> 중

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은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가장 활발한 전성기 중 하나를 대표하는 문화 혁신이다. 모더니즘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과학적 합리주의의 시대, 도시화, 산업 자본주의, 사유 재산의 주권적 권리의 부상, 근대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가 도래하던 때에 시작되었다.

모더니즘의 시대 구분은 학자마다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1910~1930년으로 보고, 다른 이들은 1980~1930년이나 1890~1940년으로 보기도 한다.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가 선호하는 견해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첫 움직임은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역사적 위기에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 심각한 경제 불황, 혁명, 파시즘의 대두,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흥분과 두려움 등.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상상해 보았다. 우리 시대도 격변한다고들 하지만 모더니즘이 대두하던 시기만큼 과연 혼란스러울까? 지금도 우크라이나에는 드론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찢겨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이 말 그대로 세계가 전쟁에 빠져 있지는 않다.

구시대는 무너졌고 전통은 극복되어야 한다. 합리적 이성은 기대만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기술발전과 함께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설렘과 흥분보다는 불확실성과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시기에 바로 모더니즘이 등장했다.

“ 사회 전반에는 불안과 종말론적 정서가 퍼져 있었으며, 오래된 확실성의 붕괴, 자아의 불안정화, 전통적 도덕의 침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

자유주의적 중도층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점점 우파 정치로 내몰리고 있던 지배계급과 대결하게 된다. 전통적 유대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역사마저 멈춘 듯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평화•진보•해방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이프르Ypress와 솜Somme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개인의 삶은 점점 고립과 소외로 점철되고 있다. ” (18-19쪽)

모더니즘 문학

모더니즘은 다양한 예술 형식을 아우른다. 문학 비평가로서 이글턴은 모더니즘 문학의 주요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한다.

모더니즘 작품은 어떠한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독자들은 작가들이 대체로 답이 명확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을 때 질문을 던진다는 걸 알고 있다.)

이글턴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통일된 형성체도 순수하게 서로 다른 발전 양상의 집합도 아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나타는 몇몇 특징들은 있다. 이글턴은 ‘충격, 불협화, 몽타주, 환상, 엄격함, 파편화, 다양성, 비인격성’ 등을 든다.

버지니아 울프는 ‘간헐적인 것, 모호한 것, 파편적인 것, 실패한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왜곡, 자기 성찰, 아이러니, 불확정성, 예술 작품의 자율성, 자아의 고립 또는 해체, 비선형적 서사, 다양한 관점’ 등도 들 수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이글턴의 스승님)은 모더니즘을 ‘불안정, 무국적, 고독, 빈곤한 독립에 대한 단일한 서사’로 보았다.

이글턴은 누가 모더니스트 작가로 분류되고 어떤 것이 모더니스트 글쓰기로 간주되는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1부 〈모더니즘 시대〉를 읽어가며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그림을 조금씩 그려갈 수 있게 된다. 만약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을 읽었거나 읽으려 시도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그간의 읽기에 대한 총체적 해제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2부 〈말과 사물〉 와 3부 〈예술의 죽음〉을 읽으면서 내가 왜 소설을 읽는지 끊임없이 상기했다. 모더니즘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문학적 체력이 필요하다.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20대와 30대와 그 이후의 읽기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20대 시절에 모더니즘 문학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흩어지는 언어들 속에서 불확실성, 전통과의 이별, 균열, 불안, 상실, 단절 등을 예전보다 더욱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적인 감성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삶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베케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로 ‘Perhaps 아마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어쩌면 아마도의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닐까. AI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온갖 예측이 난무한다. 테크 거물들은 장밋빛 미래를 내놓지만 우리 대중들은 그들과 다소 다른 반응을 내놓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 언제부턴가 기술은 늘 급변하고 시대는 따라기 벅차게 되었다. 역사는 너무 빨리 변하고, 어제와 오늘은 연결되지 않는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지금도 모더니즘이 유효한 이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모더니즘이 유효한 이유는 '기후 위기, 세계화, 디지털 파편화 시대를 이해하는 거울'(253, 도원우)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은 모더니즘을 끝나버린 과거의 문화 사조로 한정 짓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모더니즘은 과거와의 불협화음, 위기, 균열 속에서 태어났다. 현대도 모더니즘이 잉태되었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과거가 아무리 풍부하다고 해서 현재가 풍요롭지 않다. 미래는 극소수에게만 유리한 것처럼 느껴진다.

책의 초반부에서 이글턴은 페리 앤더슨이 말한 모더니즘의 조건을 언급한다. 앤더슨의 주장을 요약하면 모더니즘은 “여전히 활용 가능한 고전적 과거, 불확실한 기술적 현재,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미래”를 손에 쥐어야 한다고 한다. 앤더슨의 말은 2026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당히 잘 들어맞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들린다. 오늘날의 위기를 해석할 때 모더니즘은 여전히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다. 내 삶을 해석할 때 나를 둘러썬 관계들을 해석할 때 나를 구성하는 이 시대를 해석할 때 모더니즘은 여전히 좋은 해석의 토대가 되어준다.

“ 결국 모더니즘은 기존의 지배적 합리성이 재앙적으로 실패한 시대에 대안적 합리성을 모색하는 시도이다. (...)

변형된 이성과 배척된 이성 사이의 경계는 모더니스트들이 끊임없이 넘나든 영역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 자체는 이미 한 세기 전의 것이지만, 그것이 다루었던 문제들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긴급하게 제기된다. ” 233-234쪽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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