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내각제가 온다 - 연대하고 협력하는 대한민국을 위한 헌법개정 제안서
강수택 지음 / 이학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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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내각제가 온다』는 경상국립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제시하는 의원내각제 개헌론이다. 헌법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닌 사회학자가 왜 의원내각제 개헌론에 대한 책을 저술했을까? 우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은 이미 오래된 문제이다. 사회 갈등에 대한 원인과 답을 모색하는 것은 사회학자의 일이기도 하다. 저자 역시 이 문제와 오랫동안 씨름해오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권력 구조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내의 갈등과 대립의 주요 원인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 성차별, 세대 차이, 남북 분단 등이 꾸준히 지적되어 왔고 이런저런 개선의 노력도 이뤄졌지만 권력 구조라는 정치적 환경에 내재된 문제는 다른 원인들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극심한 사회 갈등은 권력 구조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의원내각제의 전환을 주장한다.


사회학자로서 저자는 그간 한국 사회의 갈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으며 이전 저술 『연대주의』(2012)에서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가 사회적 연대와 협력에 더욱 친화적인 정부형태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은 앞으로 한국 정치와 정부형태가 가야 할 방향으로써의 의원내각제를 제안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의원내각제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다고 밝힌다.


저자는 본문을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했다. 첫 번째 부분인 2장과 3장에서는 사회학자로서 저자가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국 사회가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연대·협력형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는 의원내각제로의 정부형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부분인 4장에서 8장까지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에 대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9장과 10장에서는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을 위한 저자의 개헌 구상을 다룬다.





의원내각제란 무엇인가

의원내각제란 대통령제와 대조되는 정부형태로서 국가수반인 대통령과 정부수반인 총리가 분리되어 있다. 총리 혹은 내각은 의회에서 선출되고 신임을 받아야 유지된다. 반면 대통령제는 대통령이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을 겸임하며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제는 입법부, 즉 의회와 분리되어 있어서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행사한다.


의원내각제는 대통령제의 요소도 섞여 있는 혼합형 체제도 있다. 이 체제에서 대통령은 보통 외교 및 국방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총리는 내정 권한을 가진다. 그래서 이 정부형태를 이원정부제 또는 이원 집정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고, 총리는 의회의 신임이 필요하다.


의원내각제는 영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발달했는데, 영국의 1215년 마그나카르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귀족들은 의회를 통해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들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려 했다. 이후 중세 말 시민계급의 성장은 이를 더욱 촉진시켰고, 17세기 말 청교도혁명과 특히 명예혁명은 왕권의 제한과 의회의 권한 강화의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18세기 초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책임제가 등장하여 의원내각제가 자리를 잡아갔고, 서유럽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등으로도 점차 확산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등으로도 확산되었고 오늘날에는 의원내각제가 전 세계의 가장 대표적인 정부형태 혹은 정치체제이다.


한편 한국에도 의원내각제의 아주 짧은 경험이 있다. 우리 사회는 제2공화국에서 약 1년 정도 의원내각제를 경험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다수 주역들은 의원내각제나 혼합형 정부형태를 바랐지만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밀어붙인 것이다. 저자는 우리리 사회는 제2공화국 시절의 혼란스러운 기억으로 인해 의원내각제는 정치적 불안정을 낳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는 서유럽 국가에서 의원내각제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로 건설적 불신임, 봉쇄조항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성숙을 거쳤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연대협력형 선진 민주주의 사회가 증명하듯 협력과 협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정치 체제로 증명되었다.





연대형 사회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로서의 의원내각제

서울대학교 이재열 연구팀은 세계가치조사(WVS), 유럽가치조사(EVS), 지니계수 등 1999-2012년 시기의 자료를 활용하여 83개국 갈등 지수80개국 사회통합 역량 지수 산정한 후 이를 바탕으로 79개국의 사회통합 지수를 산정했다. 저자는 사회통합 지수 가운데 최상위 10개국을 '연대형 사회'라고 부른 바 있다.

연구팀에 제시한 10대 사회통합형 국가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인데, 이 국가들은 16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민주주의 지수 최상위 10개국에도 모두 들어있다. 종합하면 연대협력형 사회는 사회적 약자 집단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통합에 성공한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한국은 사회통합 수준이 79개국 중 가운데 40위이며 사회갈등 수준은 갈등 지수 58위로 83개국 중 가운데로 26번째로 높다. 즉 한국 사회는 높은 갈등 수준과 낮은 통합 수준이며 다른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저자는 왜 최고 수준의 연대협력형 사회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일까? 바로 이들 국가의 정부형태와 혼합형인 스위스를 제외하고 모두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각국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 및 복지의 수준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측정 방법들인 지니계수, GDP 대비 공공사회 지출 비율, 성불평등 지수, 사회 진보 지수, 민주주의 지수, 국가 행복도, 국내 총생산을 비교하여 <선진사회의 지수와 순위>를 표로 정리한다. 이 표에서 보여주는 것은 세계 최고의 선진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의원내각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대통령제를 취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저는 이를 통해 대표적인 선진사회는 의원내각제가 일반적인 정부형태이며, 정치적, 사회경제적, 환경적인 선진사회에서는 대통령제가 매우 드문 정부형태임을 보여준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일반적인 대통령제 정부형태의

예외적인 현상일까?

저자는 정치체제로서의 의원내각제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대통령제와의 비교를 선택한다. 특히 정부형태로써 대통령제 보여주는 한계점들이 몇몇 나라에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임을 설명한다. 불과 몇 주 전 대선을 치른 나라에 사는 국민답게 나 역시 대통령제의 한계와 특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에 대해 온갖 매체를 통해 아주 충분히 들었다.


저자는 대통령제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후앙 린츠의 분석을 소개한다. 린츠에 따르면 대통령제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특징으로는 이원적인 민주적 정당성과 경직성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인지 가능성과, 책임성, 중임 제한, 대통령직의 모호성, 국외자의 당선 가능성, 위임제 민주주의 등의 특징을 가진다.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는 자신의 저서 『제왕적 대통령제』(1973)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제왕적 대통령제란 대통령이 매우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되, 의회나 사법부로부터 효과적인 견제를 받지 않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닉슨 전 대통령,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등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표적 사례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대통령의 강력하고 광범위한 행정권력, 입법부와 사법부의 약한 견제 기능으로 인한 대통령 권력 집중,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세력의 집권 남용, 부정부패, 정적 탄압 등의 만연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대통령이 의회나 정당을 우회하여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포퓰리즘과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고, 정책 실패의 책임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정치 불안정이 초래될 수 있다. 즉 제왕적 대통령제는 주로 권력 집중 및 권력 견제 실패와 관련된 여러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대통령제에 내재된 위험요소라는 논지를 지속적으로 펼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의원내각제의 장점을 강조한다.



****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이 출간된 시기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2024년 말 12.3 비상계엄을 온몸으로 겪어낸 우리 국민에게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을 바라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었다. 또 여느 때처럼 4년 중임제 대통령제로 개헌을 하자는 주장이 이런저런 매체에서 확인된다. 이 책은 4년 중임제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의원내각제로 정치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명확한 비전과 함께 개헌안까지 제시한다. 때마침 나는 미디어에서 인물 중심으로 정치 해설을 하는데 다소 지쳐 있었다. 그래서 미디어에서는 수박겉핣기식으로 언급만하고 지나가는 정치체제 로써의 대통령제의 한계에 대해 정리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유익했다.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필요없다를 이 책 한 권만 읽고 결정하거나 깊은 식견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대통령제의 한계에 내재된 불안요소를 좀 더 정돈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때때로 온갖 매체가 정치 뉴스를 마치 연예 뉴스나 스포츠 뉴스처럼 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 책은 이것조차 인물 중심 정치의 대통령제의 특징에서 비롯함을 알려준다. 대통령제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가 무엇인지 잘 정리하여 알려주는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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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양서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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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자유 - 일의 미래, 그리고 기본 소득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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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자유』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쓴 디지털 변화의 3부작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책으로 노동의 미래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샤낭꾼, 목동 비평가』,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에 이어 그의 미래 3부작을 완성하는 책으로, 지금 우리는 단순히 기술 진보를 목격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전환기에 있다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래 지난 200여 년 넘게 지속되었던 생업 노동 사회가 거의 끝나 가고 있으며, 진보나 번영에 대한 개념도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알았던 노동 개념을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더 많은 경제적 번영을 이뤄 내야하고 무조건 더 많이 가져야 하는가? 왜 우리 사회는 사치스러운 물질적 욕구를 계속 자극하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충분한 물질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행복은 최신형 핸드폰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풍요롭게 살고 있는데 물질을 더 얻기 위해 지금처럼 오래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목적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리는 노동과 삶의 균형을 고민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한편 많은 사람이 일을 적게 하고 스스로에게 더 많은 자유 시간을 허용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상태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그간 신성시해왔던 노동의 가치를 재검토한다면 경제 성장이 둔화되지 않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가진 낡고 세뇌된 노동에 관한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제는 새출발이나 변혁 같은 거창한 말을 뒷받침할 만한 거대한 이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 사회적, 경제적 창의성과 진정한 변화를 위한 용기 없이는 미래의 분배 투쟁, 민족주의의 득세, 학살과 전쟁 같은 두려운 시나리오를 막기 힘들다. (...)

모든 산업 혁명이 그랬듯이 가장 큰 도전은 완전히 다른 데 있다. 즉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제2차 기계 시대의 도래와 일의 미래


저자가 진단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무너져 가는 세상과 승승장구하는 새로운 것의 행렬에 직면해" 있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배했던 전통적인 노동 사회는 거의 끝나간다. 저자는 노동 사회를 제1차 기계 시대와 제2차 기계 시대로 구분한다. 산업혁명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제1차 기계 시대였다면 인공지능이 이끄는 디지털 혁명은 제2차 기계 시대를 열어젖혔다.

제2차 기계 시대의 본격적인 전개를 앞두고 각종 전문가들은 온갖 예측을 내놓는다. 이 예측은 주로 디스토피아적인데 비숙련 노동자들은 퇴출되고 강등될 것이라 한다. 빈부 격차는 더욱 증거할 것이다. 독일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산업국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적 추락을 겪게 되고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예상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잃을 위기에 처해있고 이것은 선진국의 우익 포퓰리즘의 준동과 연관된다. 사회적 패자들은 자신들의 공공의 적으로 로봇이나 AI 시스템을 지목하는 대신 피부색과 출신 배경으로 적을 골라낸다. 혐오와 차별 분노가 사회에 넘실거린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이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일자리 손실을 만회하고 사회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공급하기 위해 기존의 노동자들을 열심히 재교육시켜야 할까? 한편 디지털 혁명을 겪고 있는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이 너무 빈곤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제2차 기계 시대에서의 일자리에 대한 고민보다 앞서 '노동 개념' 자체를 다시 돌아보라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웬만하면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저자는 우리가 가진 '노동'이 얼마나 이상한 개념인지 깨닫게 만든다.


생업을 위한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왔지만...


저자는 고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노동 개념에 대해 살펴본다. 왜냐면 노동 개념은 인간 사회의 필요에 따라 변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노동의 개념은 근대 이후에 굳어진 것이다. 18세기에 서서히 자리를 잡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체계가 잡힌 노동 개념이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이 체계에서 신이나 자연이 아닌 노동이야말로 인간에게 각자 자리를 지정해 준다. 우리의 권리는 노동에서 성취한 것에서 비롯한다. 물론 물려받은 부모니 조상의 노동에서 얻어 낸 성취도 존재한다.

이 체계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무언가를 성취하고, 더불어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또 소비 종교가 전 지구를 휩쓸면서 노동자는 물질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동기가 더욱 뚜렷해졌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위와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길 꿈꾼다. 우리는 삶에서 노동이 늘 중심이며 여가 시간은 노동 시간의 보충물 정도로 취급한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도 미래에 대한 가장 큰 불안은 대량의 실업상태이며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청사진은 '완전 고용'의 상태이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노동' 개념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고 단순 반복적인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제2차 기계 시대를 앞두고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키려 노력한다.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의 욕구도 바뀌었다.

한편 우리의 사회는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모른다. 그냥 모르는 무지의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고 하는데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욱 나태해지지 않을까?


21세기에는 사람들의 주요 욕구가 달라졌다. 많은 경우에 노동에서 자유로운 시간에 이런 욕구가 실현된다. 틀에 박힌 협소한 직업 세계나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노동 세계 바깥에서 대부분의 욕구가 충족된다.



 

무조건적 기본 소득

저자는 노동 개념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우리가 가진 '노동'의 개념이 얼마나 기독교적이고 근대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가 제2차 기계 시대에 걸맞은 노동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뒤 '기본 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저자는 '의미 사회'라는 새로운 사회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노동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1970년대 이후 정보 기계의 혁명으로 의미 사회가 탄생했는데, 예전의 노동 사회가 임금 노동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의미를 중심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2차 기계 시대가 단순히 노동 사회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경제적, 사회적 운영 체제의 변경이다. 의미 사회에서는 기존의 노동 사회와 달리 게으름을 반드시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한편 사람들이 자기 노동력의 분배를 통해 자유롭게 의미를 생산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필수적이다. 21세기형 의미 사회로의 대전환을 위해서는 연금 제도와 같은 낡은 아이디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이다.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몇십 년에 불과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2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민 수당>, <최저 생계비 보장>, <토지 배당>, <사회 배당>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무조건적 기본 소득', '기본 소득 보장', '보편적 기본 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아이디어다.

저자는 생산력도 충분하며 경제적으로도 가능한 지금의 사회가 '의미 사회의 자유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조건적 기본 소득의 개념을 적극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무조건적 기본 소득이라는 오래된 아이디어의 전개를 정리하여 제시하고, 이 개념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허술한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기본 소득'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질문들 '부자에게도 기본 소득을 제공하라고?', '아니 돈은 누구보고 내라고?' 등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답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본 소득에 대한 수많은 모델 실험이 훨씬 작은 목표를 설정한 것은 놀랍지 않다. 이들이 집중하는 문제는 대체로 단 하나의 질 문 세트이다. 앞서 이미 상세히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다시 반복하면 이렇다. 무조건적 기본 소득은 사람을 더 게으르게 만들까, 더 부지런하게 만들까?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변할까, 미성숙해질까?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설계해 나갈까, 아니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몰라 허우적거릴까? 코브케가 명확히 지적했듯이, 이 질문들은 그 자체로 이미 우리의 자유주의적 자아상에 대한 공격이다. 왜냐하면 <자유 민주주의에서 기본 소득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정치 공동체가 이미 전제하고 있는 사실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시민들은 각자 자기 주도적으로 삶의 결정을 내리고, 공동체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조율할 뜻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시대가 급격하게 변화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증기 기관과 방적기, 전기화, 전자 제품의 발명으로 일자리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오히려 매번 늘었다. 저자는 비관론자는 늘 틀렸고 신중한 사람들이 항상 맞았다고 말한다. 디지털 혁명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안은 반자동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다.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놓는 예측은 허술하기 그지없지만 우리의 불안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이럴 때 사상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사상가'란 낯설고 '리더'라는 사람들은 좀 더 친숙하게 들린다. 이들의 역할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기존의 관념이 얼마나 낡은 것인지 깨부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신중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아이디어를 일깨우기 위한 책이다. 생업 중심의 노동 사회가 거의 저물었으며 의미 사회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레히트의 책이 두꺼운 이유는 무조건적 기본 소득의 개념이 허황된 개념이 아니라 2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노동 개념이 그만큼 세뇌되어 있기에 이것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설명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한다. 우리 시대의 사상가 프레히트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난해한 언어가 아니라 현실에 단단히 기반을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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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쉽게 찾기 - 야생화를 쉽게 찾고 공부하는 도감, 최신 개정판 자연 쉽게 찾기 시리즈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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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쉽게 찾기』는 윤주복 식물생태연구가 쓴 야생화 도감으로 풀꽃과 나무꽃을 합쳐서 2,100여 종의 식물을 소개한다. 1,500여 종의 풀꽃과 670여 종의 나무꽃이 담겨 있는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출퇴근길에, 학교가는 길에, 산책가는 길에 피어있는 꽃들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식물 분류는 먼저 '풀'과 '나무'로 크게 나누고 → 각각 계절별로 '봄에 피는 꽃'과 '여름에 피는 꽃'(가을에 피는 꽃은 여름에 피는 꽃에 포함되었다)으로 구분한 뒤 → 계절 내에서는 '꽃의 색깔'과 '꽃잎 수'로 구분하였다 → 꽃잎 색깔 구분은 크게 붉은 색, 노란색, 흰색, 녹색 4 가지로 나누었다.



금목서


책을 받아들자 마자 내가 가장사랑하는 야생화 중의 하나인 '금목서'를 찾았다.

먼저 책의 색인인 '꽃 이름 찾아보기'에서 금목서를 찾아 본다. '꽃 이름 찾아보기'(색인)는 '풀꽃 이름'과 '나무꽃 이름' 으로 크게 나뉘어 있고, 각각은 가나다 순이다. 금목서는 '나무꽃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546페이지에 금목서가 소개 되어 있다). 이제 546페이지를 펼친다. 금목서 사진을 보자마자 너무나 반갑다.


금목서는 물푸레나무과로 중국 원산으로 국내에서는 남부 지방에서 관상수로 심는다. 잎은 마주나고 좁은 타원형이며 가죽질이고 끝이 뾰족하여 사안부에 잔톱니가 있거나 밋밋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암수딴그루로 10월에 주황색 꽃이 모여 핀다. 금목서는 내가 어렸을 적 다녔던 학교에 심어져 있었는데 그 향기는 아마도 어린 시절 내게 가장 강렬한 후각적 체험이었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유년시절이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따라서 나의 감각체럼 역시 놀라울 정도로 삭막하다. 그래서 나는 문학작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길게 설명하면 읽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금목서라는 존재가 거의 유일하게 내게 프루스트적 순간를 체험하도록 한다.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풀의 이름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좋아했었다. 그리고 풀의 생김새도 이름만큼이나 귀엽다. 강아지풀은 여름에 피는 풀꽃으로 벼과에 속한다. 밭이나 길가에서 만날 수 있으며, 잎집과 잎혀에 털이 나있다. 8월에서 10월 줄기 끝에 달리는 원통형 꽃이삭은 5~10센티 길이이며 끝이 비스듬히 처진다.





어렸을 때 엄마나 다른 성인들과 함께 길을 걷거나 산에 갔을 때 그들이 특별히 어른처럼 보였던 때가 있는데 바로 그들이 길에서 마주치는 꽃과 풀, 나무의 이름을 알려줄 때였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풀과 나무를 구분하고 아름답게 피어있던 정체 모를 꽃의 이름을 밝혀서 알려주던 그들의 모습은 어린 내게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 많아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한편 세월이 흘러 외양은 어린 내게 각인되어 있던 어른들의 모습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풀과 꽃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여전히 어린 시절에 멈추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존재가 참으로 든든하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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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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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달콤한 나의 도시》 등으로 널리 알려진 정이현 소설가의 산문집이다. 2022년 12월까지 개를 만지지 못했던 소설가는 얼떨결에 어린 개를 키우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이 책은 "어느 날 비자발적으로 어린 개와 살게 된 초보 반려인의 좌충우돌 모험가이자 어설픈 분투기"이다. 부제를 붙인다면 '어린 개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을 것들' 혹은 '어린 개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모르는지도 몰랐을 것들'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어린 개를 키우기 전 '뭉클거리고 꿈틀거리는, 살아 있는 생명의 촉감'이 낯설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습관성 식물 킬러'였기에 본인의 두 딸 외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길러본 경험이 없다. 작가는 당시 수년 동안 출간을 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게다가 집안에 개가 들어오면 거의 십중팔구 개를 돌보는 것은 엄마의 역할이 된다.

그런데 두 딸과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어느 보호소에서 입양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린 개를 키우게 된다. 작가가 어린 개를 키우게 된 것은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생명체를 향한 보편적 인류애 때문이었다. 보호소 SNS에 올라와 있는 어린 개의 사진은 작가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편 어린 개를 키우게 된 작가는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다. 작가는 그의 친구들이 농담처럼 던진 조언을 듣곤 이 조언을 따르기로 한다. 그래 기왕 개를 키우게 되었으니 써야겠다고. 작가는 제일 잘하는 것이 우선 책으로 지식(반려견을 키우는 방법 관련)을 최대한 흡수하는 한편 집에서 어린 개를 돌본다. 그리고 이것에 관하여 쓴다.





개가 왔다.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분명히 그런 줄 알았는데.

모든 강아지가 개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나는 상자 속의 어린 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어린 개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손보미 소설가가 이 책의 추천사에 책을 읽는 동안 "다섯 번 울고 열 번 소리 내어 웃었다"라고 썼는데 정말 공감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 구성원으로 거의 대부분 개가 있었던 가정에 살았다. 그래서 정이현 작가 어린 개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나 걱정하는 모습,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웃었다. 이 웃음은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데 '엄마 미소' 비슷한 것이었다. 이토록 마음이 순수할 수 있을까. 분명 작가는 두 인간 아이를 길러낸 엄마이기도 한데 말이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고강도 돌봄 노동을 한 경험자인데 작가가 어린 개를 대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어느 날 밤 서재에 들어가기 전 거실의 불을 껐다가 너무 깜깜하면 얘가 혹시 화장실을 찾아가지 못할까 싶어 화장실 전등을 밝혔다. (...)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거실에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 멀리 바둑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 내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도 움직이지 못하고 우뚝 섰다. 바둑이와 나는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선 채 각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작가는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 어린 개 앞에서 그토록 조심스럽고 종종 당황해하는 모습은 작가 본인의 익숙한 인간 세계의 기준을 어린 개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린 개가 어떻게 세상을 경험하는지 몰라서 배우려 한다. 훈련사에게 조언을 받고 책을 읽는다. 그리고 계속하여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어린 개의 시선으로 개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우리는 틀림없이 '인류의 일원:개의 일원'이지만 '개별개체 1 : 개별개체 1'로 치환되는 순간 무언가 조금쯤 달라졌다. 우주 아래 동등하게, 너 하나 나 하나.

그렇게 우리는 균등하게 일대일.




한편 이 어린 개는 '루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루돌이와 작가는 점점 가까워진다. 루돌이의 삶을 거의 책임지고 있는 작가는 자연스레 루돌이의 법적 보호자가 된다(동물 등록증상의 견주가 작가의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개가 주는 절대적인 사랑과 경의를 체험하게 된다. 작가는 루돌이의 사랑에 '종종 면구함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왜냐면 개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완전무결한 믿음과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살면서 인간에게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를 주는 존재가 바로 '개'라는 신기한 종이다. 작가는 개라는 종과 가까웠더라면 속이 더 따뜻하고 말캉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

위에서는 '엄마 미소'로 작가를 바라보았다고 썼지만, 문득 내가 감히 엄마 미소로 작가를 바라볼 자격이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개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익숙했으므로 개를 처음 접하는 '정이현 작가'라는 사람이 인상 깊었다. 작가라는 사람들 전체를 일반화할 수 없지만 분명 작가 중엔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순수하고 여린 결이 고운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소설가가 쓴 산문들을 최근 몇 권 읽었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꼭 발견해 내고 그것을 써 내는 사람들. 이 책을 읽고 나니 정이현 작가의 소설을 챙겨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쪼록 정이현 작가의 어린 개가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어린개가왔다 #정이현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0기

#반려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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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있다는 것
클레르 마랭 지음, 황은주 옮김 / 에디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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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이 쓴 철학 에세이로, '자리'라는 물리적·지리적·계층적·사회적·정치적 공간이자 내면의 공간을 탐구한다. 이 책은 조르주 페렉, 아니 에르노, 버지니아 울프,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란츠 카프가 등의 문학 작품들과, 하이데거, 질 들뢰즈,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프란츠 파뇽, 샹탈 자케, 캐럴 길리건, 카미유 리키에르 등의 철학적 사회학적 텍스트들을 풍부하게 인용하며 '제자리'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저자는 세상에는 정착민과 유목민, 대지의 인간과 바람의 인간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고들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사람은 자신이 정주하여 사는 곳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어떤 장소나 관계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구분은 '향수 어린 (가짜) 양자택일'일뿐이다. 저자는 '제자리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 속 텍스트를 가져온다.



향수 어린 (가짜) 양자택일

뿌리내리기, 뿌리를 되찾거나 만들어 내기, 공간에서 당신의 것이 될 장소를 취하기, 1밀리미터씩 "자기만의 집"으로 (...) 만들어나나기. (...) 혹은 옷들만 짊어지기,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기, 호텔에 살기, 호텔을 자주 옮기기, 도시를 바꾸기, 나라를 바꾸기, (...) 어디에도 내 집에 있다고 느끼지 않기, 그러나 거의 모든 곳에서 잘 지내기.


우리는 늘 움직이는 존재다. 우리는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물리적 이동 없이 내면의 먼 곳으로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가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이며, 머묾이란 늘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다. 우리의 머묾은 여정을 구성하는 정서·사회·지리·정치적 기착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제자리'를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존재다. 우리의 불안은 '제자리'가 어딘가에는 있다는 모호한 기대와 '제자리'가 우리의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한다.

이 책은 '제자리'에 대한 오해와 기대를 걷어내고 '자리옮김'의 해방적 즐거움을 일깨운다. 저자의 사유는 앞서 말한 풍부한 문학적 철학적 텍스트 들과 함께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로 서서히 젖어든다.


문득 삶을 이어주는 끈이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고, 소위 실존의 연속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 무언가 깨지고, 변질되고, 해체되었다. 화설의 궤적과도 같이 자신감 넘치는 삶의 표상이, 자신의 존재감과 중요성에 대한 내적인 믿음이 주는 온기가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그곳에 몸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네게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주체는 세상과 한 몸이길 중단하고, 그로부터 분리되고 유리된다. 거리가 생기고, 의심이 스며들며, 소속감이 자취를 감춘다. 현실에 발을 담그고, 기입되고,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이 흐려진다. 실존의 의미에 대한 믿음, 확신과 인정을 제공하는 자리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주제를 지지하고 지탱해 주지 않는다. 세상이 흔들린다. 혹은 세상이 주체로부터 멀어진다. 주체는 궤도를 따라 돌기 시작한다.


산다는 것은 체념의 연속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성숙이라는 단어가 체념이라는 단어와 상당 부분 교차한다는 것을 배웠다. 과거에 어떤 책을 읽으면서 '환대'라는 개념을 배웠고, '환대 받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이 과정 속에 내 안의 소란스러운 감정은 결코 이해받을 수도 어느 특정한 누군가나 집단에 수용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을 담아 목소리로 표현하면 이는 곧 누군가와 집단에 불편을 야기하게 될 테니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배웠다. 동시에 감정 자체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감정 자체를 해부하자 이 감정은 오로지 내 스스로에게서 기인하여 비롯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매 순간 자기 검열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자는 캐리 길리건의 『다른 목소리』의 텍스트를 가져온다.



어린 소녀들의 자기 검열 과정이 분석된다. 소녀들은 실제로 느끼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통찰력은 체계적으로 평가절하당하기에 "통찰력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스스로 금한다. 소녀들의 의견은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그들은 소리를 낮추고 개성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는 평이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를 낸다. 그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싣지 않아 거짓되기 들리는 중립적인 목소리뿐이다. (...) 목소리의 울림은 사회적 "입문"이라는 시련의 과정에서 변화를 겪으며, 특정 방식으로 울리는 특정 테시투라에 맞춰져 특정한 반응을 만들어 낸다.


이 책은 인종, 계급, 젠더에 따른 '자리찾기'의 문제에 대하여 당연히 이야기한다. 나는 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자리 찾기는 감히 내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 더 뒤따른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에서만 사는 나는 인종의 문제로 정체성에 위협을 당하지 않았다. 나의 실존이 인종으로 평가받은 경험은 없다. 나의 성별에 따른 제약은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금도 오로지 그들의 피부색과 젠더로 인해 자리에서 거부당하고 무시당한다.


자신을 지우라는 명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명령은 흑인, 마그레브 출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위협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내면화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머니들이 아들에게 했던 조언들("갑자기 뛰지 마라. 후드를 쓰지 마라. 주머니에 손을 넣지도 마라. 무기가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과 성적 학대나 폭력을 막기 위한 여성들의 습관("특정 지역에 혼자 들어가지 마라. 비어 있는 열차를 타지 마라. 길에서는 커플들을 따라가라.")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여러 사회 집단을 짓누르는 폭력은 각자들 당하는 그들 의식 한켠에는 항상 위협에 대한 예측, 삶이 연약하고 불확실한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이 책은 최근에 구입해서 읽은 다이앤 앤슨의 『외로움의 책』과 함께 가장 많은 위로가 되었다. 두 책은 나의 정신적 물질적 삶을 가득 채웠던 이슈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귀 기울여 듣고자 한 나의 마음을 헤아린다. 다양한 문학적 철학적 텍스트로 읽기의 즐거움도 준다.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는다. 우리 삶 속에 내재한 긴장과 불안과 외로움과 덧없음 등이 공존의 대상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의 세계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는다. 나는 이 속에서 나 자신을 망각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와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분별 있게 머물 때보다 냉담하고 척박한 자리에 있을 때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보다 메마르고 거칠고 가혹한 현실에 대한 또다른 실험은 우리에게 경험의 다양성을 열어준다.


자크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다 보니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가 일시적이고 우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자리없음'의 불안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떨림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역사학자 로맹 베르트랑의 주장처럼 "안에"에 존재하기보다는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보다 나은 인간이 된다. 보다 나은 인간이란 누군가를 조금 더 이해하려는 인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공존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인간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것을 강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 하나의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처함으로써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온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간격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모든 형식의 인간 연구에 필요한 비판적 거리를 만들어 준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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