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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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는 출판사 작가정신의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의 열 번째 작품으로 젊은작가상 수상자인 최정나 소설가의 첫 중편소설이다. 출판사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소설은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고 가해자는 없는 세계 폭 폭력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이 소설의 시작은 아동학대의 피해자인 주인공 로아가 병실에 누워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아는 어느 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아 병실에 입원했다. 로아는 아동학대를 비롯하여 학교폭력, 아동성추행 등 여러 학대의 피해자였다. 로아는 의식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학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로아는 이 시도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보기 위함이다. 로아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로아는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는 방법으로 자신을 학대했던 가해자(그녀의 언니, 상은)가 되어보기로 한다. 로아는 상은의 눈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회상한다. 소설은 로아가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본다"라고 말한 이후부터는 로아를 가혹하게 학대한 로아의 일곱 살 많은 언니 상은이 화자가 되어 전개된다.

열네 살 상은은 일곱 살 어린 동생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한다. 아주 계획적이고 주도 면밀하게. 열네 살짜리 소녀 상은은 폭력이 주는 통제감과 쾌감을 순식간에 깨우친다. 


상은은 왜 이런 괴물이 되었을까. 저자는 상은을 방치한 부모를 등장시킨다. 먼저 상은에겐 자신을 방치한 엄마 기주가 있다. 기주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져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엄마다. 기주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 본 적이 없었"던 엄마이며 상은에게 가혹하게  폭행을 당해도 죽지 않기 위해 거짓 미소를 짓는 로아를 보고도 "태어나자마자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얻은 생존법과 같은 거라고 기주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기주는 상은이 악다구니를 쓰고 날뛰어도 로아를 그 지경으로 폭행했어도 방치한다. 기주에게 엄마 역할은 용돈이나 쥐여주면 되는 것이다. 즉 돈을 쓰면 할 일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기주는 자기 연민에 빠져 위로가 필요할 땐 남자를 찾는다. 그런 엄마를 두고 상은은 "자신의 쾌락과 생명 유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생존을 이어갔다"라고 표현한다. 상은의 아빠는 한때 주목받은 신진 예술가로 거리의 풍경을 기록사진으로 남기던 사람이었다. 그의 사진은 군중이 모인 거리에서 발생한 다툼과 폭력을 찍었다. 상은의 아빠는 유서도 없이 다리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삶을 끝냈다. 상은은 아빠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던 그날 밤 아빠와 다투다가 그에게 "나가...... 나가 죽어버려!"라고 발작하듯 외쳤었다. 이 기억은 오로지 상은에게만 있는 것이고 엄마 기주는 왜 남편이 자살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상은은 아빠가 죽은 이유를 로아의 탓으로 돌린다. 상은은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내게 결핍을 주는 존재였지만 죽은 후에는 아니었다.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죽어서 내 것이 되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되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라며 아빠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의 욕망에 맞게끔 편집하여 간직한다. 상은은 부모의 애정을 갈구했지만 받지 못했고 이 결핍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로아에게 돌린다. 상은은 결핍에서 시작되어 동생 로아를 때렸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쾌감과 통제력 권능감에 빠져든다. 상은은  폭력이라는 인간악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엄마 기주는 그런 딸 상은을 내버려둔다. 상은이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둔다. 




왜 이 세상에는 피해자만 있을까,

가해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로아의 언니 상은은 본인이 받았어야 했을 사랑을 로아 때문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상은은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불안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상은은 본인이 느끼는 결핍과 불행의 원인을 로아에게 찾는다. 상은에겐 자신을 방치한 부모가 있다. 상은은 본인이 받았어야 할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했고 로아가 이를 빼었었다고 생각한다. 상은은 스스로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빌미로 동생 로아를 잔인하게 폭행하지만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상은은 스스로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하니까.


이 소설을 다 읽으면 김이설 소설가의 말처럼 곧바로 소설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읽게 된다. 상은의 목소리와 로아의 목소리를 조금 더 예민하게 구분하면서 읽는다. 나는 이 소설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 방치, 무관심, 용인 등에 대해 죄를 묻고 심판하는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인간악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나는 인간 동물의 본성에 기인한 폭력성에도 주목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주로 들리는 목소리와 이로 인해 구성되는 우리 의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로아는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때리면 맞고 살기 위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을까. 상은은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인간 삶에 따라붙는 불행과 슬픔을 다른 사람에 전가했을까. 기주는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길래 그의 배에서 나온 두 딸을 그렇게 방치했을까. 우리 모두는 지금 주로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길래 이러한 폭력의 연쇄를 읽고 또 읽는 것일까.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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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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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은 『북극을 꿈꾸다』로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배리 로페즈(1945-2020)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역작이다.
배리 로페즈는 리베카 솔닛, 마거릿 애트우드 등 걸출한 작가들의 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 등으로 불린다. 배리 로페즈는 전 세계 약 70여 개 국을 여행하며 평생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국내에서는 이 책을 포함하여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와 『북극을 꿈꾸다』 총 세 권이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북태평양 동부, 캐나다 북극권, 갈라파고스 제도, 아프리카 케냐, 호주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겪고 사유한 것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가 주로 사오십 대 시절에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

배리 로페즈는 평생 동안 전 세계를 방랑하고 여행하며 묻고 또 묻는다. 인간, 자연, 문명, 시간, 장소, 관계, 협력, 연민, 삶의 의미 또는 무의미 등. 극히 좁은 장소에서 극히 적은 경험만을 하고 사는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준다. 현대의 억압적 사고방식 중 하나로 우리가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다는 것조차 쉽게 인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익숙한 장소를 벗어났을 때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관찰한다.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역작 『호라이즌』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여행 에세이로도 읽을 수 있고 인문 에세이로도 읽을 수 있다. 나는 저자의 책 세 권을 모두를 현대 서구 문명에 대한 비평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들과 함께 꽂아 두었다. 그 근처에는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와 웨이드 데이비스의 『사물의 표면 아래』가 있다. 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질문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배리 로페즈의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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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
이유진 옮김, 토베 얀손 원작 / 어린이작가정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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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무민이 탄생한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무민은 핀란드 작가 토베 얀슨이 1945년 『무민 가족과 대홍수』를 출간하면서 세상에 선보인 캐릭터이다.
이 책 『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은 어린이작가정신 출판사에서 나온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 명품 고전인 무민 시리즈를 어린이의 눈높이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번 책에서는 무민 골짜기의 어느 추운 겨울밤 무민 가족들은 긴 겨울잠에 빠져 있는데 무민은 혼자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겨울이 무민에게 첫 겨울인 이유는 무민 가족은 언제나 11월부터 4월까지는 긴 겨울잠을 잤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야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무민에게 홀로 겨울잠에서 깬 것은 처음 겪는 일이다.
깜짝 놀란 무민은 우선 무민마마를 깨워보려 한다. 그러나 엄마인 무민마마는 일어나지 않는다. 호기심이 강한 무민은 혼자 집 밖을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집을 나서면서 무민은 집 밖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겪는다.

한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조금 이상한 밤 동물들이 무민 골짜기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무민은 “가족들이 자는 동안 우리 가족 물건은 내가 지킬 거야”라고 말하지만 곧바로 이 동물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집에 있는 잼을 대접하기로 결정한다.

이 조금 이상한 밤 동물들은 아무도 존재를 믿지 않던 온갖 생명들이다. 편견 없고 다정한 무민은 밤 손님들이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 하나를 깨트리기도 하고 혹시 누가 밖에 남아 있나 살피러 나가기도 한다. 이 다정하고 착한 무민은 모두를 환대한다.

한편 무민의 손님들 사이에는 환대 받지 못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는 ‘헤물렌’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놋쇠 호른을 부르고 스키처럼 생긴 것을 탄다. 다른 손님들은 헤물렌이 시끄럽다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무민도 처음에는 헤물렌을 집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물렌이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집 밖에 스키 타기에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속여 헤물렌이 스스로 나가게끔 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그 장소는 ‘외로운 산’에 있는 위험한 언덕이다. 이것을 모르는 헤물렌은 기뻐하며 그 장소로 떠난다.
헤물렌과 다른 밤 손님들 간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 속에서 무민의 갈등과 결정들은 이 동화책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


무민 캐릭터의 귀여움은 알고 있었지만 동화책을 직접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화책을 읽다가 문득 무민은 무슨 동물일까 궁금해서 찾아 보았더니 무민은 저자의 가족이 만들어낸 상상속의 캐릭터이며 원래는 무민트롤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늘 모험을 떠나고 누군가를 만나고 성장하여 돌아온다. 무민 역시 이 동화책에 집 밖을 나서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갈등을 겪고 선택을 내린다. 무민마마가 다시 깨어났을 때의 무민은 이전의 무민이 아니다. 질서와 규칙을 세우고 보호를 제공하는 무민파파와 무민마마가 잠든 집에서 무민은 집을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무민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낯선 밤 손님들을 환대해야한다는 마음이다. 무민이 타인을 향해 베푸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기억에 남는다.
얼굴은 하마와 닮았지만 직립보행하는 이 새하얗고 평화롭게 생긴 캐릭터 무민을 만약 어린 시절에 만났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결이 고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무민의골짜기와무민의첫겨울
#토베얀손_원작
#이유진_옮김
#어린이작가정신
#작정단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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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예찬
앙리 라보리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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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예찬』은 로베르라퐁출판사가 기획한 사상총서 가운데 하나로 1976년에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생각’이라는 주제를 사유하기 위해 각계 저명인사에게 주제 20개를 제시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앙리 라보리는 외과 의사이자 신경생물학자, 철학자이다(그는 최초의 신경안정제 클로르프로마진을 개발하여 의학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이 맺는 사회적 관계, 사회 구조에 관해 이야기한다. 국내에서 특히 사랑받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이 책 『도피 예찬』을 인생 책으로 꼽았다고 한다. 


출판사 책소개 페이지에서는 이 책을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황에 놓인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분야를 해석한 책’이라 소개한다.



신경생물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두루 섭렵한 라보리는 이 책에서 인간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 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라보리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고, 수정란일 때부터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프로그래밍 됐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것 말고는 존재 이유가 없다.”(p12)고 말한다. 또 1장 <자화상>에서 그가 얻은 유일한 확신은 “모든 생각과 판단, 논리(적이라고 자평하는) 분석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구, 다시 말해 동시대 사람들의 눈에 자기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노력이 지나지 않는다”(p11-12)고 말한다. 신경생물학자 다운 통찰이다. 인간은 생태적 환경의 구성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고 생태적 환경은 우리에게 스며들고 고착되며,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우리의 신경계는 우리가 인간으로 구실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과 아닌 것을 배워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에밀리 부틀의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병행하여 읽었다. 진정성 문화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진정한 자아’, ‘진짜 나’란 라보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발현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한다. 사회라는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한 대립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립은 반드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서열을 만든다. 한 사람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의 욕구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저항하거나 도피할 수 있다. 저항은 보통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고 ‘독자적인 저항은 정상을 자처하는 비정상적 다수에 의해 신속하게 그 싹이 제거되기 때문’(p17-18)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도피뿐이다.



라보리에 따르면 도피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향정신성으로 분류되는 의약품을 먹을 수도 있고 정신 줄을 놓기도 한다.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홀로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한편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상상 속으로 도피하는 방법도 있는데 라보리에 따르면 이 방법은 뒤쫓길 위험이 거의 없고 심지어 광활하고 만족스러운 영토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보리는 이 책에서 사랑, 인간 존재, 유년기, 타인, 자유, 죽음, 쾌락, 행복, 노동, 일상, 정치, 신앙 등 우리 삶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과학주의를 강조하는 신경생물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내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종(동물)인 동시에 흔히들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물임을 줄곧 의식하게 된다. 그의 글은 이 책의 출판사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적인 동시에 시적’이다. 



라보리의 『도피 예찬』을 읽다 보니 수십 연간의 학문과 경험을 녹여낸 묵직하고 밀도 높은 에세이라는 점에서 제롬 케이건의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가 떠올랐다. 석학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본인의 연구 분야를 넘어 다양한 학문을 횡단하며 촘촘하게 연결된 사유를 보여준다. 이런 책들을 읽고 또 읽는 순간 내 신경계에는 ‘인류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상속’(p119)이 일어난다.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경쟁 사회에 지친 흔하디흔한 현대인 중 한 명인 나는 이러한 책으로 도피를 한다.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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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루스 굿먼 지음, 이영래 옮김 / 북드림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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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나도 내가 살지 못했던 여러 시대의 삶이 궁금하지만 그중에 특히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삶은 어떠했을지 알고 싶어졌다. 왜냐면 19세기 영국에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 메리 셜리 등 여성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과학 혁명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엄격한 규범과 질서, 위계구조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혼란스러웠던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람들이 오한과 함께 시작해서 씻는 것에서부터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아침을 무얼 먹었는지 일하러 갈 때는 무엇을 타고 갔는지 또 일은 어떻게 했는지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의 지은이인 영국의 역사가 루스 굿먼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씻고 먹고 일터에 가고 집에 돌아오고 마침내 방문이 닫히고 침실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하루 리듬을 따라간다. 저자는 일기, 편지, 자서전, 잡지 신문, 광고, 지침서 등 온갖 문헌과 사료들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일상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아동의 노동

빅토리아 시대 어린이들은 대부분 일을 했다.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가정의 남자아이들도 열두 살이 지나면 정규직 일자리를 찾는 것이 당연했고, 정규직 노동자로 기록된 아동 중에는 다섯 살짜리도 있었다. 방직 공장은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1835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 방직 노동자의 절반은 18세 미만이었다. 그래서 아동 노동을 다룬 첫 번째 법률은 면직 공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동 노동이 왜 필수가 되었을까? 새로운 기계들이 성인 노동자의 임금을 끌어내렸기에 가정마다 생계를 위한 돈이 더 필요했다. 노동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더 많은 어린아이들이 노동 시장에 내몰렸다.


학교와 필기시험

빅토리아 시대의 학교는 엄격한 규칙과 규정,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비한 삶을 대비한 훈련장이었다. 조금이라도 규칙을 어긴 학생들에겐 체벌이 가해졌고, 체벌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공개적으로 학생에게 창피를 주었다.

그리고 일반인 대상의 필기시험이 빅토리아 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험이 도입되기 전 좋은 일자리는 대게 개인적인 인맥과 추천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험이 도입되고 나서 다양한 직업군에서 필기시험을 통해 지원자의 능력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배경이나 인맥 없이 열심히 일하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여성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깊이 뿌리내린 생각은 남성의 신체가 인간 육체의 완벽한 ‘전형’이라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가진 대부분의 특성은 이런 이상에서의 일탈로 여겨졌다. 여성의 월경은 질병의 측면에서 언급되었고 여성의 약점 중 하나로 여겼다. 사춘기 소녀는 특히 취약한 시기로 생각했기에 소녀를 자극하는 예상치 못한 일은 소녀의 앞날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당연히 소녀들의 신체적 활동에 억압으로 작용했고 10대 소녀들은 계단을 뛰어다니는 등의 행동은 자궁을 자극할 수 있으니 금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에밀리 브론테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소녀들에게 정서적 혼란을 일으키고 성욕을 과도하게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0대 소녀들에게 적합한 책에 대한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많은 가정에서도 격론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여자아이들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남자아이들이 받는 교육과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남자아이들은 지적인 발전을 이루고 국가 고시에 응시하는 반면 여자아이들은 미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 교육을 받았다. 한편 이러한 불안이나 유려도 대부분 부유층 소녀들에게 한한 것이었다. 대다수 소녀들은 심한 육체활동이 요구되는 직종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다.


코르셋

여성에게 코르셋 착용은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일이었다. 코르셋을 입지 않는 여성은 자제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코르셋을 벗는다는 것은 인생의 낙오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을 여성들이 따라야 할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굶주림

빅토리아 시대는 유럽 전역에서 식량 공급이 부족했기에 장기간의 굶주림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흔한 경험이었다. 소설가 샬롯 브론테 전기에서도 브론테 자매가 어린 시절 겪었던 끝없는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특히 여자아이들에게는 음식을 적게 주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자녀 양육에서 널리 퍼져 있던 관행이었다.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 자제심과 극기심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특히 여자아이는 노력과 의지로 식욕을 억제해야 했다.


성문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남성은 강한 성욕을 타고났다고 믿었고, 강한 성욕은 곧 강한 남성성을 뜻했다. 남성은 아내, 정부, 매춘부를 통해 성욕을 배출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과 남성이 자신의 도덕성과 신체적 건강을 위해 욕구를 다르려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했다. 아무튼 당대 사람들은 남성이 성욕이 없다면 ‘남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여성은 엄격한 순결과 정조를 지키도록 강요했다. 여성이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남편의 건강을 위한 의무이기도 했다. 임신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보다 남편의 성관계 요구를 거부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당대 여성들의 성의식 중 하나였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한번 삶이란 얼마나 우연적인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가난한 노동 계급 사람들의 삶은 늘 고단했다. 그들은 굶주림, 질병, 과로, 학대에 신음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적이고 신체를 변형시키는 영양실조를 겪을 확률이 그 어떤 시대보다 높았다. 반면 부유한 유산계급 사람들은 바빴다. 늘 유행을 좇아 옷을 갖춰 입어야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테이블 매너를 배워야 했다. 이 시대 상류층은 완두콩을 포크로 찍어 먹을지 퍼먹을지, 자몽을 먹을 때 칼을 사용할지 숟가락을 사용할지 세부적인 식탁 매너 경쟁에 뒤처져서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또 산업혁명 이후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질 때 가난한 사람들의 기계화로 인해 노동가치가 떨어지고 임금은 점점 줄어들었다. 빅토리아 시대 어느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선 어린아이들까지 돈을 벌어야 겨우 먹고살았다.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재앙인 시대'였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연구 과정에서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나간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감탄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소수를 차지했던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보단 그 시대의 다수를 차지했던 가난하고 고단했던 사람들의 삶에 더 시선이 간다. 가난하고 고단했지만 성실하고 억척스럽고 강인하게 그 시대를 살아냈던 지극히 평범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모두가 내겐 한 명 한 명의 영웅이다.



* 출판사 제공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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