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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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증언』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응교 선생님이 쓴 책으로, 1923년 9월 일본 간토 지역에서 벌어진 참극 조선인 대량 학살의 기억을 복원하여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용서화 화해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진도 7.9강진이 도쿄와 간토 일대를 강타했다. 지진 발생 세 시간 후, 오후 3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타고 있으며, 조선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습격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다.
9월 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조선인 폭동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집단 학살이 일어난다. 나라시노 기병 연대, 헌병들, 경찰들,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민간인들도 조선인을 죽이는데 동참한다. 한인이라면 아이, 여자, 노인, 노동자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조선인으로 오해받는 일본인들도 살해당했다.
1923년 12월 5일 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학살로 인한 피살자 합계를 총 6,661인이라고 보도한다. 이 숫자는 실종자를 포함한 숫자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장 포괄적인 조사였기에 유의미하다고 평가한다.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가능했던
몇 가지 동기

이 책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가능했던 몇 가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두려움은 혐오를 만들고, 혐오는 폭력을 만든다.
2. 일본의 노동 시장을 조선인이 빼앗는다는 불안이 넓게 퍼졌다.
3. 조선인을 비하하는 ‘후테이센진‘이라는 이미지
4. 계엄령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혐오성 유언비어가 결정적이었다.
5. ‘자경단’이라는 훈련된 예비 학살 조직이 있다.
6. 일본만이 최고라는 국가주의가 세뇌되어 있었다.


김응교 선생님은 조선인 학살이라는 집단적 광기의 발단에는 계엄군이라는 국가의 묵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당국은 지진으로 인해 정부로 향하는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선인에게로 향하는 불안과 공포로 바꾸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국가적 폭력의 참혹한 사례이다.



‘15엔 50전’과 조센징 사냥

당시 간토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일본에 체류한 지 몇 년 안되는 노동자가 대부분이어서 일본어를 정확히 발음할 수 없었다.

“15엔 50전”

이 두개의 일본어 단어에는 일본어의 탁음이 들어있는데, 일본어에 서투른 한인들은 일본 본토 사람처럼 발음할 수 없었다.

“쥬우고엔 고쥬셴”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추우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했다면,
총칼로 찔려 살해를 당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이 발음을 할 수 없었던 말더듬이나 오사카, 오키나와 사람 등 지방 사람들도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되었다.

이 책에서는 이를 두고 ‘집단적 오락’(69쪽)이라고 표현한다. 이 광기의 오락의 다른 표현은 ‘조센징 사냥’이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쓰보이 시게지(1898~1975)가 쓴 작품 『15엔 50전』 전문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간토대진재의 조선인 학살을 테마로 한 장 시로 김응교 선생님이 전문을 번역하여, 이 책에 실었다.



삭제되는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간절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본 학자들,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본 시민들

책의 <들어가며>에서 김응교 선생님은 “이 책은 반일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기원하는 책입니다.”라고 썼다.
이 책에서는 간토대진재의 기억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한일 두 나라의 연대를 위한 노력도 담고 있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자행한 만행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현 일본 정부의 노력에 맞서 이 기억들을 발굴하여 복원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이어가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존재한다.


****
이 책을 읽는 것은 힘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는 것과 비슷했다. 이 책에는 김응교 선생님이 20여 년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현지를 답사하여 기록해온 간절한 증언이 담겨 있다. 이 증언들은 1923년 9월의 간토로 데려간다. 간토 대로변에서 불갈구리로 찔려 자기가 흘린 핏물 웅덩이에 쓰러진 조선인들과 치비치리 동굴 속에서 죽어간 오키나와 사람들은 계속하여 떠올린다.

김응교 선생님의 담담하게 쓰인 문장을 읽어가다 군데군데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벽돌들이 내 명치에 계속하여 쌓여가는 것 같았다. 이 참혹하고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복원하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사비를 털어 추모비를 세우고 학살의 현장을 지키는 일본 시민들의 간절한 노력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러한 사람들의 수는 비록 적을지언정 그들의 존재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희망을 엿보았다.

이 책에서는 국가적 폭력으로 잔혹한 죽임을 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나온다. 간토대진재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학살당한 오키나와 민간인들. 국가적 폭력은 심지어 민간인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극단으로 치닫는다.

수천 명의 조선인들과 수십수만의 일본인들의 죽음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최대한 생생하게 복원하여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무지한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총검으로 사람을 찌르는 사람만이 가해가 아니다. 우리의 거친 말들과 편견과 혐오에 사로잡힌 생각들은 타인을 해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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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미래 - 언제나 최적의 선택을 찾아내는 우리 뇌의 비밀
정민환 지음 / 심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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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생명과학과 교수이자 뇌인지과학과 겸임교수인 정민환의 첫 책 『기억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추상적 사고 능력의 작동 원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현대 뇌 과학이 이룬 상상과 추상적 사고에 관한 주요 발견과 통찰을 정리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명은 인간 종의 특징인 고도의 추상적 사고 능력에서 나온다. 인간의 문명사회는 계속되는 과학, 기술,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계속되는 혁신 덕분에 발전한다. 저자는 이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인간의 '뇌'가 가진 '추상적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상상' 능력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뇌 과학은 뇌가 외부 감각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고 저장하는지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을 제어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관련된 뇌의 작동 과정인 내적 사고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 그러다가 2007년 뇌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이 발표된다. 바로 해마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측두옆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해마가 기억을 회상할 때뿐만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해마는 단순한 기억 저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데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마 연구는 인간의 고차원적 추상화와 관련된 연구 등 뇌과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 연구 덕분에 2007년 이후 과학자들은 '기억은 어떻게 저장되고 인출되는가?'라는 질문 대신 '기억과 상상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로 바꾸어 묻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생각, 디폴트 네트워크, 그리고 '해마'

인간 뇌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 특정 과제를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과제 네트워크'와 백일몽을 즐기거나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상황처럼 내적 사고를 할 때 활성화되는 '디폴트 네트워크'를 따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멍하게 쉬는 순간에도 디폴트 네트워크는 활발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레카'의 순간들은 산책을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화분에 물을 주다가 떠오른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들은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있을 때 떠오르고, 해마는 디폴트 네트워크의 주요 구성 요소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주로 해마의 기능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해마가 어떻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아본다. 그리고 저자 정진환 교수 연구팀의 주요 연구 성과인 '모사-선택'이론에 대해서 비중 있게 설명한다.

모사-선택 이론
정진환 교수 연구팀은 해마의 기억 기능과 상상 기능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모델로 '모사-선택 이론'을 제시한다. 해마는 서로 다른 몇 개의 하위 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치상회, CA3, CA1이 해마의 핵심 영역으로 간주된다. CA3 신경망은 다른 뇌 부위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회귀투사가 풍부한 신경망인데, 바로 이 CA3 신경망은 해마의 경로 재생 및 상상 기능과 관련된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꼽힌다. 그리고 CA1 신경망은 상상한 내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혀졌다. 즉 해마는 단순히 기억과 상상을 떠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상한 내용을 평가까지 수행하는 종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뇌는 이를 통해 상황에 맞는 의사 결정과 행동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한 내용이 바로 '모사-선택'이론의 핵심이다. 정리하자면 CA3 신경망은 경험한 사건들의 재생과 더불어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을 모사(시뮬레이션)하고, CA1 신경망은 CA3 신경망에서 재생되고 모사된 사건들 중 효용가치가 높은 사건을 선택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모사-선택 이론의 핵심은 동물이 비활동적인 상태일 때 여러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하고 평가함으로써 출발 지점과 상관없이 임의의 목표 지점까지 최적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111쪽)


기억은 상상과 창의성의 재료
책에서는 새로운 상상은 기존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하게 설명한다. 우리 뇌는 과거 경험 요소들을 자유롭게 추출하고 재조합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미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창의성은 필연적으로 기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해마라는 뇌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학자들은 기억의 범위와 강도, 상상 순간의 해마 신경망 상태, 해마로 투사되는 조절성 신경세포들의 활동 등 다양한 요소를 연구하고 해마의 기능과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의 기원을 찾으려 노력한다.

“디폴트 상태에서의 상상은 무작위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결국 우리가 평소 어떤 정보를 학습하고 사고했느냐에 의해 달라진다. 다시 말해 상상의 재료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상상의 질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_209쪽

창의성과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디폴트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는 독서

책에서는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평소 의미 있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한 분야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폭넓은 지식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방금 말한 것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는 계속하여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평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나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할 때 기존의 사고를 깨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소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은 창의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만 개인이 경험으로 지식을 쌓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서'를 강조한다. 혁신이란 기존의 틀을 깨는 과정으로 어떤 경험이나 지식의 혁신의 출발점이 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탄탄한 토대를 구축해 놓아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할 수 있다.

“요즘은 간접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경로와 형식이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유튜브와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과학,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쉽고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 영상 콘텐츠는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지만 정보를 숙고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 부족하다. 하지만 책과 같은 활자 매체는 다르다. 읽는 과정에서 특정 문장을 곱씹으며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앞서 읽은 내용을 다시 찾아보고 비교하며 잣니의 지식과 신념 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과정이 자주 일어난다. 반면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때는 앞뒤로 이동하며 내용을 비교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일방향으로 계속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_212-213쪽


“시간을 두고 숙고하며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과 일방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더군다나 책은 여러 날에 걸쳐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서 사이 시간에 자연스럽게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될 기회를 갖게 된다. 앞서 누누이 설명했듯이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동안 우리의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합되고 이를 통해 기존 지식과 새로운 정보가 연결되면서 창의적 사고가 촉진된다. ” _213쪽

『기억의 미래』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은 결국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해 주는 특징인 고차원적 추상화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뇌과학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관련 학문의 연구를 살펴본다. 4부 <상상과 추상을 넘어서>에서는 1~3부에서 설명한 최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개인 수준과 집단적 수준 양쪽에서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또 4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저자는 범용 인공지능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거품이 끼여 있고, 인공지능의 창의성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이 책을 통해 재확인한 것은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나의 상상력과 행동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의 이로움, 새롭고 낯선 경험과 지식에 계속하여 노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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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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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서울여대 철학과 문성훈 교수의 철학 에세이로 니힐리스트로 살아온 경험과 니힐리스트 철학자로서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니체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니체가 생각한 니힐리스트란 '자유 정신'의 소유자다. 자유 정신이란 절대적 진리도 없고, 영원한 사실도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자유 정신을 뱀이 주기적으로 껍질을 벗고 새 껍질을 얻는 '탈피'에 비유하는데, 탈피하지 못하는 뱀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못하는 인간의 정신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니힐리즘은 흔히 허무주의로 번역되는데, 허무주의라는 번역어는 인간 삶과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다고 들리게끔 한다. 그러나 니체가 말한 니힐리스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이것은 오히려 삶의 무한한 가능성과 지속적 자기 창조의 기회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니힐리스트란 세상만사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삶을 긍정하고, 삶에 대한 자기 지배를 강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현직 철학과 교수님이 쓴 책이라 그런지 이 책은 아주 쉬운 서양철학 교양강좌처럼 읽혔다. 이 책은 노자 『도덕경』, 『장자』, 불교 철학의 '연기' 개념, 공자의 『논어』 등 동양의 철학과 사상도 소개하지만, 서구의 철학 중심으로 쓰였다. 니체의 철학을 중심에 두고 스피노자,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 미국의 현대 철학자 마이클 왈처, 쇼펜하우어, 플라톤, 중세 기독교 성직자, 마르크스, 헤겔, 키르케고르, 에리히 프롬, 사르트르, 애덤 스미스, 악셀 호네트, 카뮈, 푸코, 토마스 쿤, 에밀리 로티, 존 롤즈 등 다양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호출된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와 포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중국 당나라 시대의 한시들도 인용된다.



이 책에서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은 미셸 푸코의 존재의 미학과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삶의 다양성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 창조적 삶을 사는 것, 어떤 특정한 삶의 목표나 가치가 특권화되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비정상, 옳고-그름의 이분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책의 지은이가 바라는 사회이자 니힐리스트로서의 삶이다.




@woojoos_story 모집, #이소노미아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_철학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니힐리스트로사는법 #문성훈 #이소노미아

#철학 #우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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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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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출신 작가 파리누쉬 사니이의 신작 장편소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이란 혁명(1979) 이후 30년 만에 재회한 한 가족이 열흘간 함께 지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파라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 태생으로 오랜 세월 이란 사회의 억압과 여성의 억눌린 삶을 조명해온 작품을 썼다. 이번 작품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에 불어닥친 이민 물결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도키라는 이란 소녀가 서술자이다. 도키의 할머니는 아들 셋과 딸 셋 총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할머니의 자식 중 절반은 이란을 떠났고 절반은 이란에 남았다. 이 가족은 이란 혁명 이후 30년 만에 타국의 땅에서 재회하고 총 열흘을 함께 지낸다. 재회의 기쁨은 채 하루도 가지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은 그들이 살았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쌓였던 오해와 원망은 다섯 번째 날 이윽고 터져 나온다. 작가는 한 가족 내부에서 벌어진 싸움을 통해 이란 사회에 내재된 각종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이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겐 여전히 깊은 유대감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화해와 재결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의 이민 물결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란 혁명 이후 이란 사회 내 불어닥친 이민 물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란 사회의 이민 문제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작가는 이민이 이란 사회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수많은 이란인들이 고국을 떠났다. 이민의 목적지와 목적도 이민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다양했다. 혁명 후 이란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잠시 여행을 갔다가 혁명 후 당시의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귀환이 막힌 경우도 있었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ㅎ해서 거주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거의 모든 도시 가정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가족 구성원이 몇 명씩 있다고 한다. 이런 현 상황 때문에 가족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이란 사회에는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쪽 사촌까지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까운 친척조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란을 떠난 가족들과 이란에 남은 가족들 사이에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엄청나게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 타국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고생과 아픔과 상실을 겪었을지 알지 못하고 헤아리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들 사이에는 동포로서의 정서적 유대감도 희미해지고 있다.  작가는 이란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이 동포로서 다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작품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더듬어 본다.





갈등 폭발



첫째 날에는 가족들이 재회한다. 하비브의 딸이자 작품의 서술자인 도키와 도키의 삼촌 모흐센의 아들인 사촌 시루스의 대화를 통해 이란을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 사이의 균열, 오해,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가족들이 재회한 첫째 날의 대화는 주로 옛일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둘째 날의 화제는 이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등장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등장인물의 대화만 들려줄 뿐이고 독자는 대화를 통해 가족 내의 갈등과 이란 사회의 현실을 더듬듯이 파악해 나간다.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다섯 번째 날이다. 물론 이날 이전에도 서로 간의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과 문화 차이를 엿볼 수 있지만 다섯 번째 날 샤마키 고모부와 하미디 고모부 간 벌어진 '대결투'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든 갈등들이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표출된다. 도키의 두 고모부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거친 대화를 들으며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들여다본다. 샤파키 고모부 떠난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극단에 서있고 하마디 고모부는 남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쪽 반대편 극단에 서있다.  




[샤파키 고모부]


"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당신에게 득이 되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가, 모든 게 안정되고 정리되면 돌아와서 당신 몫을 주장할 거라는 뜻이오? 나라는 당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모자가 아니오. 진짜 남자라면... "


" 우리는 목숨과 재산을 내놓고, 뉴스 보도를 준비하고,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폭로했소. 여러 목표를 위해 행진과 회의, 세미나를 준비했소. 이란의 자유를 위해 짐을 짊어졌는데 배은망덕한 동포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감히 우리를 모욕하고 있소. "




[하마디 고모부]


" 샤파키, 그 짐을 내려놓아도 돼요. 이제 너무 애쓰지 마요. 지구 반대편에서 하는 싸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


" 당신 같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내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길 바라는 거요? 절대 그럴 수 없소! 우리는 다시 속지 않을 것이오.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람이 넥타이를 맨 지식인이건, 수염을 기른 종교 지도자건 무슨 차이가 있겠어?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걱정하는 게 아니오. 당신은 한몫 챙기지 뭐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나라의 부를 주무르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오. "




다섯 번째 날 폭발한 갈등은 계속된다. 일곱째 날에는 사촌 마이클과 도키의 대화를 통해 떠난 이들의 자녀들, 이민 2세가 겪는 아픔과 혼란에 대해 듣는다.



[마이클]


" 이제는 더 이상 가족처럼 보이지 않아. 그냥 서로 삐걱거리는 낯선 사람들 같아. "


" 돈은 있어. 그렇지만 나는 가족도, 친척도, 연고도 없어. (...)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혼자라는 느낌이 있어. (...) 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족도, 나라도 없었어. "


" 텔레비전에서는 이란에 대해 나쁜 뉴스만 나오고, 이란인이라는 게 더 이상 좋은 게 아니었어. 외할머니는 '걱정 말거라. 너는 미국인이야. 네 아버지가 이란인이란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고 하셨어. "



[도키]


" 30년의 거리감 때문이죠. 양쪽의 관점과 경험, 심지어 말하는 방식도 달라요. 우리에게는 같이 공유하며 이야기할 미래도, 친구도, 계획도 없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



화해


떠난 이들 남은 이들 각자 모두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오해와 원망은 말싸움이라는 형태를 가진 다소 거친 소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들 각자의 아픔과 슬픔은 뜨거운 눈물과 서로 피하지 않는 시선이라는 증거를 통해 이해 받았고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 


 " 모든 게 날 울리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때문에 울고 있단다. 성공한 의사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하마드 때문에 운다. 이제는 그 애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게 됐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마이클 때문에 운다. 자기 이름이 다리우쉬인지 마이클인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흐나즈 때문에 운다. 이제는 자존심 센 내 딸이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평생을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지 않은 것을 항상 후회했던 모흐센 때문에 운다. 이상주의적 신념 때문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하비브 때문에 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모든 것을 참는 마리암 때문에 운다. 그리고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추위와 어둠의 땅으로 추방된 막내 메흐디 때문에 운다. 그렇게 쓰라린 기억으로 어린 시절을 잃은 너 때문에 운다. (...) "


할머니는 말한다. 이 여행의 핵심은 이 모든 얘기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 어디에나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서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여행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서든 서로 응원하고 함께해 주길 부탁한다고 말이다. 모하마드 삼촌은 여기에 희망을 실어준다. 서로 멀어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음번에는 꼭 집에서 모이자고 말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 작품은 마치 초상집에서 한밤에 모여 앉은 자식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상갓집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고 썼다. 나는 이 비슷한 싸움을 어렸을 때 명절 때마다 보았다. 물론 내가 보았던 집안 싸움과 이 작품에서 드러난 싸움은 다르다. 작품 속 할머니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식들과 손주들의 아픔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고 마음 아파하지만 내가 겪은 현실에서는 그런 어른은 없었다. 



이란 혁명 이후 극단주의자가 집권하면서 이란 사회가 겪었을 억압과 혼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 작품을 통해 읽은 것은 빙산의 일부일 것이다. 작가는 2005년 이 책을 썼을 때 사실 멀어져 버린 관계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이후 여러 일들, 특히 수감당한 동포들의 자유를 외치며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참여로 인해 그들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여전히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강조하듯 우리는 서로를 더 친절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편 진실 보기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우리는 가족을 비롯하여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해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판단 과정이 선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 가득한 작업이며, 우리는 온갖 이유로 이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각자가 겪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나 아닌 존재의 아픔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의 무지는 오해와 불신과 원망을 낳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스스로의 아픔에만 빠져 있을 때는 이 작품을 떠올려 보자.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도처에 널려있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들과 그들의 자녀들 모두가 다 아프고 힘들었듯이 말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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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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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아프리카누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1488년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여행가이자 상인, 외교관, 지리학자였던 실존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이 책을 옮긴 이원희 번역가는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16세기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코스모폴리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항해 시대의 막이 오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이름은 알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 알파시 알자야티였다. 그는 어렸을 때는 조국에서 할례를 받았고, 성인일 때는 타국의 노예가 되어 개종한 뒤 교황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아랍어, 튀르크어, 카스티야어, 베르베르어, 히브리어, 라틴어, 이탈리아어까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라나다에서 부유한 검량사의 사랑받는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우수한 학생이었다. 경전을 통째로 외우는 명석함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살피는 법을 알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가 사람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다. 술탄이 향락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할 때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생계를 위해 의복과 말, 무기를 팔아서 연명하는 것을 보았다. 민심을 보살피기는 커녕 폭군으로 변하는 군주들을 보았다.

그는 사업 수완도 좋아 20대 초반에 도매상인으로서 큰 부를 쌓는다. 소설은 대항해 시대에 동방과 서구 세계의 만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동서양이 무역을 통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교류하지만 문화, 종교, 민족, 인종 등 무수한 이유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전쟁을 벌인다. 당시를 격동의 시대로 표현하는데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그 표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교섭? 무슨 목적으로?”

“평화를 위해서. 지중해권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살 수 있고, 전쟁이나 해적 행위도 없이도 교역할 수 있다면, 시칠리아 해적에게 납치되는 일 없이 내가 가족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튀니스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 ___ p480

그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신적 유연함과 빠른 판단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냉혈한 군주 셀림 1세의 마수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슬람 제국을 도망치다가, 해적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어 어느 성에 갇히게 된다. 그가 갇혀 있을 때 교황의 측근이 자신에게 찾아오는데, 그는 여행가로서 한 활동, 술탄의 사신으로서 국제적 경험을 쌓았던 것을 빠뜨리지 않고 말하는 순발력을 보여준다. 이어 그들을 위해 할줄 아는 이탈리어 몇 마디도 들려주는 센스까지 지녔으며, 이탈리어를 배우겠다고까지 말한다.

한편 그가 생존에 급급해 모든 것을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세계에서 기독교의 세계로 건너가 겪는 혼란 들도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수염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을 금지한다.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은 교황에 대한 도전이며 심지어 신을 모독하는 불경한 표시로 여겼다. 그러나 무어인 그는 수염이 관례인 나라에서 태어났고 굴욕과 굴종의 표시인 면도를 거부한다. 그는 술탄의 왕국에서 교황의 세계로 건너가 잘 정착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었던 외국인이었다.

❝ (…)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이슬람 제국을 도망쳐야 했고, 로마에 와서는 교황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 역설을 받아들이지만, 양심에 거리낌마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서도 내 동족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간 걸까? ❞ ____ p452


이 작품을 읽으면 먼저 이슬람 문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간의 충돌과 교류를, 기독교 세계 내부의 갈등을 배운다. 진지하고 건조한 역사책에서 읽었던 사건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woojoos_story 모집 #교양인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레오아프리카누스 #아민말루프 #교양인 #우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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